1929년 10월30일 전남 나주역에서 한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했다. 이를 지켜본 光州高普(광주고보)의 조선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과 싸움을 벌였다.
학생들 간의 싸움은 전국적으로 149개교 5만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抗日(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서울 徽文高普(휘문고보) 5학년 甲반 이원영 학생은 데모를 주도했다. 그를 비롯한 5학년 甲반 학생들은 함께 抗日구호 깃발을 제작하고, 시위대를 조직했다.
데모 준비를 마치고 행동을 개시할 무렵, 휘문고보에 수백 명의 정사복 일본 경관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이미 학교 안팎에 진을 쳐 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나가서 싸우겠다』며 학생들이 뛰쳐나가려던 찰나, 당시 휘문고보 이윤주 교장이 5학년 甲반 교실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일제히 교단에 선 교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한참 말 없이 교탁 앞에 서 있던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굵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교장선생님의 두 뺨에는 두 줄기 굵다란 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우리는 일제히 책상에 엎드려서 흐느껴 울었다. 한참 그대로 계시던 교장선생님께선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대로 나가 버리셨다. 차마 사랑하는 제자들을 희생시킬 거란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뛰쳐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끓는 피가 용솟음치는 제자들을 그러지 말라고 만류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눈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 일생을 두고 이 선생님의 눈물이 가끔 내 머리 속에 어른거리곤 한다〉 (1977년 徽文 45호, 이원영, 徽文高普 8회, 「선생님의 눈물」 中)
高宗 황제가 校名 하사 |
설립자 민영휘. 高宗은 그의 이름 「휘」자를 따서 「휘문」이라는 校名을 하사했다. |
민족의 설움과 기쁨을 함께해 온 「徽文(휘문)」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1906년 5월1일, 高宗 황제의 칙명으로 설립자 河汀 閔泳徽(하정 민영휘) 공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徽文義塾(휘문의숙)이 개교 100주년을 맞은 것이다.
1906년부터 「휘문」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지만, 실제 휘문의 역사는 閔泳徽 공이 자신 소유의 땅에 「광성의숙」을 연 1904년부터 시작된다.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친히 이름을 내리시는데, 『원래 이름이 있는데, 광성의숙입니다』라고 감히 말을 올릴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절, 휘문은 「나라를 지키자」는 뜻으로 문을 연 「민족 사학」이었다. 명성황후의 조카인 閔泳徽 공이 1904년 학생 30명을 받아들여 자택에 학교를 연 것이 광성의숙이다. 광성의숙은 1905년 궁내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서울 종로구 원서동, 지금의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에 학교 건물을 지었다. 1906년 8월20일 첫 입학시험을 치르고 130명의 신입생을 선발해 어학·물리·작문·수학·지리 등의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휘문은 私立학교였지만, 황제의 칙명으로 개교한 학교답게, 당시에도 훌륭한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 자체적으로 교과서 인쇄와 편찬을 할 수 있는 인쇄소 「徽文館(휘문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서실과 각종 과학실험 기자재 등의 시설 수준도 다른 학교보다 나았다. 조선의 명문가 자제들이 총독부에서 세운 公立학교 대신 휘문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휘문은 당시 「양반 학교」, 「귀족 학교」로 통했다.
1918년 「휘문의숙」은 「휘문고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수업연수는 4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7월에는 6년제 중학으로 학칙을 개정했고, 1951년 9월 지금의 3년제 중학교,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됐다. 1978년 2월 정부의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72년 동안 자리했던 서울 종로구 원서동을 떠나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유로운 교풍으로 「글쟁이」 量産 |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계동에 있던 舊휘문교사인 稀重堂. |
서울 강남구 대치동 휘문고등학교 교정 한쪽에는 휘문을 거쳐간 시인 鄭芝溶(정지용·15회), 金永郞(김영랑·21회)의 詩碑(시비)가 서 있었다. 당대 최고의 「글쟁이」들이 휘문을 거쳐갔다. 「금삼의 피」 등을 쓴 소설가 月灘 朴鐘和(월탄 박종화·11회), 「봄봄」을 쓴 소설가 金裕貞(김유정·21회), 「탈출」을 쓴 소설가 李無影(이무영·1920년 입학), 「바보 용칠이」를 쓴 소설가 崔泰應(최태응·1930년 입학), 「병든 서울」을 펴낸 시인 吳章煥(오장환·1931년 입학), 「금조산」을 쓴 소설가 方英雄(방영웅·53회),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金勳(김훈) 등이 휘문 출신이다.
이 밖에도 서예가 金膺顯(김응현·39회), 화가 李快大(이쾌대·25회) 등이 휘문 출신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다.
휘문을 졸업한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金勳씨는 『校風(교풍)이 합리적이고 자유로워 억눌림과 편견 없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60년대에도 휘문의 학풍은 자유로웠습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녀야 했지만, 우리는 머리를 길렀고 교복도 여러 종류 중 골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 鄭芝溶은 휘문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白樂晥(백낙완·79) 인제학원 이사장은 휘문 36회다. 白이사장은 『시인 鄭芝溶이 내 영어선생이었다』고 말했다.
『휘문이 좋아서 휘문에 입학했지요.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日帝시대에도 대학진학률로 고등학교 서열을 매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5大 사립 중에서도 휘문 진학률이 제일 좋았습니다. 京城帝大(경성제대), 연세大, 고려大의 입학률도 아주 높았고요. 내 삼촌 한 분이 중앙학교 교장이셨는데, 조카가 삼촌 학교 안 가고 휘문 갔으면 더 할 말이 없지 않겠소?(웃음)』
『강당 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는 白이사장은 『휘문은 공부만 시키는 학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日帝시대였지만 휘문만큼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군복 같은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휘문만 자율교복을 입고 다녔거든요.
국어학자이자 시조시인이셨던 李秉岐(이병기) 선생님 같은 분들은 그 험한 시대에도 조선 옷인 두루마기를 입고, 조선어로 교육을 하셨습니다. 동료 교사 중에 일본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회부 장관과 한국외국어大 학장을 지낸 朴術音(박술음) 선생님, 서울大 美大 학장을 지낸 張勃(장발) 선생님, 시인 鄭芝溶 선생이 우리 선생님이셨지. 모두들 名교사, 名강의였답니다』
張志淵이 2代 교장 휘문은 화려한 교사진을 자랑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 주필로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쓴 韋庵 張志淵(위암 장지연)은 휘문의숙의 제2대 塾長(숙장·교장)을 지냈다. 조선어학회를 조직해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국문학자 李秉岐와 權悳奎(권덕규)는 휘문의 교사 출신이다. 휘문 교사 중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日帝시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 중에는 경성제대등에서 충분히 교수를 할 능력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경성제대 녹을 먹고 싶지는 않다』며 휘문 등 私立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휘문의 교사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많았다.
日帝에 대한 문화적 저항 단체인 「조선어연구회」도 휘문에서 시작됐다. 1921년 당시 임경재 교장, 가람 李秉岐 선생 등을 비롯해, 崔斗善(최두선), 張志暎(장지영) 등이 휘문 기숙사에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다. 이것이 1931년 「조선어학회」, 1949년 「한글학회」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국 최초 취주악대 창설 |
1941년 야구선수 모습 |
휘문은 「최초」 기록을 여러 개 갖고 있다. 1923년 휘문은 창덕궁으로부터 악기 72점을 기증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취주악대를 창설했다. 휘문의 「최초」 기록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미들급 부문 동메달을 따 조국에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안겨 준 김성집씨도 휘문 출신이다.
徽文은 1907년 야구부를 창설했다. 같은 해 「황성신문」이 徽文과 황성기독교청년회 팀의 야구경기 결과를 보도했다. 휘문이 17대 8로 승리했다는 이 보도가 우리나라 신문 사상 최초의 스포츠 보도기사다. 그만큼 휘문人은 스포츠 명문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휘문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임시 피란 학교를 세웠다. 당시 부산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뒤켠에 들어섰던 판잣집 네 개가 그것이다. 서울 이화女高 등 몇몇 학교가 부산에 피란 학교를 만들었다. 그해 부산지역 학교 예술제 기간에 경남高, 부산女高 등 지역 학교들은 전쟁 중임에도 학교 예술제를 열 수 있었다. 판잣집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휘문은 예술제를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돈이 없었다.
한 휘문高 2학년 학생이 『우리도 예술제를 해야 한다』며 당시 이재훈 교장을 찾아갔다. 생존조차 어려운 판국에 예술제를 하겠다는 학생의 기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못 할 것이라고 판단한 교장은 『그럼 해봐라』고 했다.
돈 100만원이 필요했다. 뜯어낼 사람들은 선배들밖에 없었다. 학생은 당시 부산에 피란 내려와 있던 휘문 선배 白斗鎭(백두진) 재무부 장관을 어렵게 찾아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얼마를 기부해 줬으면 좋겠나』
『선배님, 100만원만 내십시오』
『장관 월급이 얼만데 100만원을 내라고 하나』
『장관이 월급 갖고 삽니까』
『허허,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일세』
학생은 白斗鎭 장관으로부터 50만원을 「뜯어냈다」. 다음엔 당시 서울신문사 사장이었던 월탄 朴鐘和 선생을 찾아가 10만원을 「뜯어냈다」. 외과원장으로 부산에 있던 이근용 박사를 찾아가 또 10만원을 「뜯어냈다」. 그렇게 휘문 선배들로부터 「뜯어낸」 100만원이 모였다.
연극계의 代父, 문화계 인사 배출 학생은 부산 영도에 있는 남도극장을 이틀간 빌려 자신이 직접 제작·기획·주연한 연극 「여로의 끝」을 상연했다. 교장도, 선배들도, 학생들도 모두 놀랐다. 휘문高 2학년 임영웅, 이 학생은 훗날 대한민국 연극계의 代父(대부)가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었던 거죠. 피란 가서 연극제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웃음)』
임영웅씨는 휘문을 통해 연극을 시작했다. 1955년, 서울에서 제1회 전국남녀중고교 연극경연대회가 열렸다. 당시 극단에서 조연출을 하며 연극을 공부하던 임영웅씨는 학교 교장으로부터 휘문高 연극 연출을 부탁받았다.
柳致眞(유치진) 作 「死六臣(사육신)」을 공연한 휘문高 팀은 단체 3위에 입상했다. 두 학생이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한 학생이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朴正熙 대통령 역을 맡았던 배우 이진수(작고)씨, 다른 한 학생이 성우 안종국씨다. 이진수씨가 성삼문 역을 맡았고, 당시 高1이었던 배우 박근형씨가 박팽년 역을, 안종국씨가 세조 역을 맡았다. 연출가 임영웅의 첫 작품이었다.
휘문에는 문화계 인사들이 많다. 영화감독 兪賢穆(유현목·37회)씨, 연극인 李海浪(이해랑·1929년 입학)씨, 「용의 눈물」 등으로 유명한 김재형(47회) PD, 「난타」를 기획한 宋承桓(송승환·67회)씨, 「모래시계」·「여명의 눈동자」 등을 연출한 金鍾學(김종학·61회) PD, 가수 이용(67회)·李承桓(이승환·76회)씨, 그룹 「신화」의 멤버인 김동완(90회)씨 등이 모두 휘문 출신이다. 日帝시대에 간송미술관을 세워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 낸 全鎣弼(전형필) 선생은 18회 졸업생이다.
방송·언론계에서는 車仁泰(차인태·55회) 평북지사, 任宅根(임택근·43회) 아나운서, 孫石熙(손석희·67회) 성신女大 문화정보학과 교수 등이 휘문 출신이다.
1938년 아이스하키팀 창설 1936년 휘문고보 3학년 정규택 학생은 아이스하키부를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조선인 아이스하키부는 연희전문학교 팀과 보성전문학교 팀뿐이었다. 정규택 학생은 처음 아이스하키대회를 구경갔다가 마음을 먹었다. 서울에 있는 한국인 중학교에 아이스하키부는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교 외에 평양의 광성중학교와 개성의 송도중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1937년 초가을에 정규택씨는 아이스하키 부원을 모집했다. 운동을 잘 하는 친구들 중에 골랐다. 비용 및 합숙비는 모두 개인 부담, 골키퍼에 관한 것은 모두 정규택 학생이 맡았다. 그렇게 생긴 휘문고보 아이스하키부는 코치도 없이 모여 창경원 연못, 경회루 연못, 한강 및 노량진 논바닥에서 훈련을 했다.
1938년 2월, 휘문고보 아이스하키부는 전조선중등빙구경기대회에 처녀 출전했다. 결과는 뻔했다. 대패였다. 이듬 해, 아이스하키부는 맹렬히 연습했다. 드디어 전국 중등학교 아이스하키대회가 서울대학교 정구장에서 열렸다. 참가팀은 한국계 3개교, 일본계 3개교였다.
이 경기에서 휘문고보 아이스하키부는 결승에 진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휘문고보는 결승에서 전년도 우승팀을 5대 0으로 물리치고 올라온 일본계 용산중학교와 만나게 된다.
<그때 나의 기분은, 이것은 단순한 중등학교의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우리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의 기개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코치도 없고, 감독 선생님도 없고, 물론 선배도 없었던 우리가 3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10명도 안 되는 응원단과 우승컵을 껴안고 광란의 일순이었다〉 (1999년 徽文 64호, 정규택, 33회, 「휘문 아이스하키 창설의 회고」 中)
申東坡 등 체육계 인맥 2000년 휘문高 교지 편집부가 강남지역 4개 여학교 400명의 학생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휘문고등학교 학생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9.4%가 「스포츠맨」을 꼽았다. 휘문은 스포츠에 강하다.
申東坡(신동파·55회) 대한농구협회 전무이사, 崔喜岩(최희암·66회) 동국大 농구부 감독, 야구선수 陳弼重(진필중·83회), 김선우(88회), 농구선수 徐章勳(서장훈·85회), 玄周燁(현주엽·86회), 방성윤(94회) 등의 스포츠 스타들이 휘문 출신이다.
崔斗善·白斗鎭 국무총리 배출 |
1930년 경주 수학여행 |
휘문 출신들은 政官界(정관계)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에는 崔斗善(최두선·3회), 白斗鎭(백두진·18회) 동문이 국무총리를 지냈다. 白 前 총리는 제10代 국회의장도 지냈다. 全斗煥 정권 시절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李漢基(이한기)씨는 휘문 28회 졸업생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4회 졸업생인 李淳鎔(이순용)씨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李瑄根(이선근·13회) 前 문교부 장관, 鄭憲柱(정헌주·27회) 前 교통부 장관이 휘문 출신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徐廷旭(서정욱) 前 과학기술부 장관도 휘문 졸업생이다.
李允洙(이윤수·50회) 前 의원, 安大崙(안대륜) 前 의원, 田炳憲(전병헌·68회) 의원 등도 휘문을 나왔다.
법조계에는 鄭台源(정태원·38회) 前 대법원 판사, 李鎭江(이진강·54회) 前 변협회장 등의 휘문 출신들이 있다.
휘문 출신들은 軍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崔榮喜(최영희·32회) 前 국방부 장관, 閔丙敦(민병돈·46회) 前 陸士교장, 片將圓(편장원·50회) 前 합참제1차장, 吉亨寶(길형보·54회) 前 육군참모총장 등이 그들이다.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 陸士 졸업식장에서 北方(북방)정책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옷을 벗은 閔丙敦(민병돈) 前 陸士 교장은 휘문高 규율부장 출신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학교로 복학한 閔장군은 학교로부터 2년 아래 학년으로 복학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년 밑으로 들어가면 1년 후배들에게 경례를 붙여야 하지 않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그건 할 수 없었습니다. 2년 후배와는 공부 못 하겠다고 우겼죠. 입학 동기와 같이 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공부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후배하고는 공부 못 하겠다고 계속 버텼더니, 뒤에서 보시던 교감 선생님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부상까지 입고 왔으니 정상을 참작해서 1년 후배랑 같이 다니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했습니다』
휘문 가족 이혜상(52)씨는 휘문高와 같은 동네에 있던 창덕女高를 졸업했다. 이혜상씨의 시아버지인 김성철(78)씨, 남편인 김홍엽(54)씨, 아들인 김경민(22)씨가 모두 휘문 출신이다. 三代 휘문 가족인 셈이다. 김성철씨는 오래 전 회사를 은퇴했고, 김홍엽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김경민씨는 육군 의무병으로 복무 중이다. 이혜상씨의 말이다.
『女高 시절에 주위에 남학교가 많았어요. 경기·경복·중앙·휘문 모두 한동네 학교였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은 휘문 학생을 봤는데, 시아버지·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휘문 동문이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아들이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 「엄마! 나 휘문 됐어요!」라고 전화를 건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집안 전체가 잔치 분위기였죠. 가끔 三代가 함께 모여 휘문 교가를 부르기도 하는데, 참 보기 좋아요. 휘문이랑 저랑 인연이 깊은 것 같네요.
휘문은 단결력이 참 강한 학교인 것 같아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래요. 남편이 무역상사를 하며 5년간 일본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휘문 선후배들이 자주 만나 서로 잘 챙겨 주더라고요. 참 고마웠어요』
韓相範(한상범) 대한항공 부사장은 휘문 56회 졸업생이다. 1997년 작고한 韓부사장의 아버지 한동수씨는 휘문 32회 졸업생이다. 한상범 부사장은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아버지 동기분들이자, 휘문 선배인 어른들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휘문 學風(학풍)에는 품격이 있습니다. 그런 품격 있는 학풍이 80년 넘는 우정, 돌아가실 때까지 가는 우정, 돌아가신 뒤에도 잊혀지지 않는 우정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휘문 출신 선후배들을 만나면 참 반갑습니다』
현재 휘문은 대한민국의 날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한항공 부사장인 한상범씨와 함께 오남수 금호아시아나 전략경영본부 사장이 대한민국의 항공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 밖에도 경제계 곳곳에 휘문 출신 CEO들이 포진해 있다.
鄭英勳(정영훈·50회) MSC KOREA 회장, 李梓旭(이재욱·52회) 노키아 TMC 명예회장, 韓基仙(한기선·62회) 두산주류BG 사장, 趙俊鎬(조준호·69회) LG전자 북미사업담당 부사장, 尹碩敏(윤석민·75회) sbsi 대표이사, 鄭義宣(정의선·81회)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등도 휘문 출신이다.
고교별 파워 엘리트 순위 급상승 |
金善奎 휘문高 교장 |
2005년 9월, 중앙일보가 「한국 사회 파워 엘리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주요 인물 3만1800명의 출신 고교를 분석했다. 이 중 「고교별 파워 엘리트 배출 순위」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1950년대 이전 출생한 휘문고등학교 엘리트 배출 순위는 23위, 1950년대생은 13위, 1960년대생은 8위, 1970년대생은 3위다.
40년간 50大 명문고교에 포함된 학교는 경기·서울·경복·용산 등 16개 학교다. 이 중 지속적으로 순위가 올라간 학교는 휘문이 유일하다.
경기高의 경우 1950년대생 엘리트 배출 순위가 1위, 1960년대생은 3위, 1970년대생은 10위다.
휘문은 학생을 공부나 틀에 얽어매지 않는다. 교복도 인근 학교 중 가장 늦은 4년 전에야 도입했다.
1976년 국어교사로 부임한 이래 30년간 휘문高에 몸담아 온 金善奎(김선규) 교장은 『휘문에는 특유의 선비 기질과 자유로운 기질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끼가 넘칩니다. 휘문 출신 중에 유독 문화 인사들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校風(교풍)으로 이름났던 휘문이 요즘은 입시교육 탓에 힘든 상황이 되어 무척 안타깝습니다. 입시 일번지로 꼽히는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 잡은 데다 나날이 치열해져 가는 성적 경쟁 탓에 학생들의 얼굴에서 피로가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지식 이전에 全人的(전인적) 품성을 키우는 교육을 해줄 것을 강조합니다.
입시 성적에만 만족하지 않고, 100년 휘문의 전통을 학생들이 몸소 체험하며, 이를 다시 이어 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재능과 개성을 한껏 살리려면 학교 분위기가 자유로워야 합니다. 문화산업이 국가 성쇠를 좌우하는 시대가 오면 이런 가치는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전국 최상위권의 진학성적 휘문의 진학성적은 이미 전국 최상위권이다. 올해 서울大에 31명, 연세大 46명, 고려大 54명을 합격시켰다. 주요 特目高(특목고)보다 더 나은 성적표다.
휘문高 1학년 6반 반장 김현규(17)군은 휘문高 100회 입학생이다. 김현규군의 장래 희망은 광고 디자이너다.
『휘문高를 처음 알게 된 건 스포츠 때문인데, 형이 휘문高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휘문高에 가고 싶었습니다. 오고 싶은 학교 오게 돼서 기분 좋고, 제가 100회 입학생이라는 것도 기분 좋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휘문 선배님이신데, 음악 시간에 휘문 교가를 가르쳐 주시면서, 휘문의 역사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휘문人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高1 교과서에 소설가 김유정이 쓴 「봄봄」이 나옵니다. 고등학교 선배가 쓴 소설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도 행운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