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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순종(1907~10 재위)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
발생 배경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문화정치라는 허울 아래 식민지통치를 한층 강화했다. 일본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한층 강화되었고, 1925년 5월에는 치안유지법을 제정·실시하여 조선민중의 민족해방을 위한 활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중의 민족해방에 대한 의지와 투쟁은 더욱 굳건해졌다. 1924년에는 전국 각지의 수많은 대중단체를 통합한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 전국적 대중조직이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또한 1925, 1926년에는 경성(京城)전차승무원파업·평양인쇄직공파업·평양양말직공파업·목포제유(製油)노동자파업·경성방직노동자파업 등과 암태도(岩泰島)소작쟁의 등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죽음으로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 망곡단(望哭團)·봉도단(奉悼團)이 조직되었고, 4월 28일에는 금호문(金虎門)에서 송학선(宋學先)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
준비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분산적인 투쟁을 통일적으로 결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 것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중앙위원 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權五卨)을 총책임자로 하는 '6·10운동투쟁지도 특별위원회'(이하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인 박민영(朴珉英)·이지탁(李智鐸)과 함께 투쟁지도부를 결성한 후, 상하이[上海]에 있던 조선공산당 상하이 해외부의 간부인 김단야(金丹冶)·김찬(金燦) 등과 6·10만세운동의 투쟁계획과 방법, 격문인쇄문제, 운동자금 등에 관한 사항을 서신교환을 통해 논의했다. 또한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①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조직할 것, ② 6월 10일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③ 시위방법은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배치하여 격고문(檄告文) 및 전단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의 투쟁방침을 세웠다. 이후 투쟁지도부는 북풍회(北風會)계 및 서울청년회계 사회주의자와의 전선통일(戰線統一)운동과 민족주의자와의 국민당(國民黨) 형태의 반제민족통일전선결성을 도모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권동진(權東鎭)·박인호(朴仁浩)·박래홍(朴來泓) 등을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天道敎) 구파와만 제휴하게 되었다. 또한 6·10만세운동을 위한 실무준비에 착수한 권오설은 천도교청년동맹을 지도하던 박래원(朴來源)과 경성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장인 민창식(閔昌植) 등과 함께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의 연락을 담당했다. 박래원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방 야체이카[細胞]와 천도교 교구(敎區), 〈개벽 開闢〉 지사 등을 통해 전국 58개 도시에 연락망을 완성했다. 또 투쟁지도부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조직하여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인 연희전문 문과생 이병립(李炳立)을 유인물 살포 책임자로 선정했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회원인 권오상(權五尙)·조두원(趙斗元)·정달헌(鄭達憲) 등을 중심으로 현장투쟁 지도부를 결성했다.
투쟁지도부의 와해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활동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투쟁지도부는 〈개벽〉에서 일하는 한 여공의 실수로 격문 및 전단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6월 6일 박래원이 검거되고, 7일에는 총책임자 권오설이 연행됨으로써 와해되었다. 이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6·10만세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지도부의 재건에 노력하면서, 이병립의 지도하에 격문인쇄와 선전작업을 벌여 박두종(朴斗鍾)·박하균(朴河均)·이선호(李先鎬)·이천진(李天鎭)·홍명식(洪明植) 등이 각 지역의 선전선동책임을 맡았다. 또한 이때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이동환(李東煥)·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고보(中東高普)·중앙고보(中央高普) 학생들, 이른바 통동계(通洞系)와 접촉하면서 투쟁전술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다.
전개및 평가
6월 10일 일본 경찰의 경계를 뚫고 이선호·이동환·이현상(李鉉相) 등의 지도로 8차례의 시위를 벌였다. 또 6월 10일을 전후하여 인천·개성·강경·홍성·공주·당진·전주·고창·구례·순창·병영·통영·마산·하동·원산·이원·평양·신천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이 투쟁으로 전국에서 약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사건이 확대되면서 그해 7, 8월에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이 일어나 약 100여 명이 대거 검거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조선민중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본질을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을 통해 진행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일부(천도교 구파)의 결합경험은 이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건설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투쟁지도부가 보안상의 미비로 만세운동 이전에 붕괴되었던 것과 사회주의자의 전선통일이 실패했다는 점, 그리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전면적인 협력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들은 이후 신간회의 창립을 통해 일면적으로 해결되었다.
6·10 독립만세운동 상기! 나라사랑를 행동으로 실천하자!
일제하 1926년 6월10일 ‘6·10 독립만세운동’ 90주년일을 맞아 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서울종로구 계동 중앙고교(당시 중앙고보)내 기념비 앞에서 6월 10일을 6·10민주항쟁 기념일로만 알고 있는 세태에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의 국장일에 청년학생들이 서울에서 인쇄물을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제창한 역사적인 날 임에도 잊어져만 가기에 청소년 학생들의 나라사랑 운동으로 승화시키자”며 애국행동실천 촉구 시위를 벌였다.
한편 활빈단은 인촌 김성수(2대 부통령)의 3·1운동 책원지에 6·10 독립만세운동 진원지로 한 때 5대사학 명문인 중앙고교의 교우회장출신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정몽준 前의원에 “청소년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내년 91주년에는 큰 애국행동실천 기념행사가 되도록 6·10만세운동 기념사업 활동에 적극 나서라”고 제의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라면 어땠을까?
6·10만세운동과 중앙고보(중앙고등보통학교)
6·10만세운동의 발생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순종의 인산이다. 그것은 1919년 고종의 인산이 3·1운동의 촉발 원인이 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운동의 기획은 사회운동가와 학생세력의 두 갈래에서 추진되었다.
사회운동 방면에서 거사 계획을 주도한 세력은 조선 공산당이었다. 4월 26일 순종의 별세 소식을 접한 공산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지도자인 중앙고보 출신 권오설을 책임자로 지정하였다. 권오설은 몇 차례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 민족주의 · 종교계 · 청년계 인사를 대거 영입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하고 6월 10일을 기해 시위운동을 전개하며 시위 방법으로 인산날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해 격문과 전단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를 위해 권동진 · 박인호 등 천도교 구파와 제휴하여 천도교 청년동맹을 지도하던 박래원과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으며,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 연락을 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속속 갖추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6월 7일 주모자인 권오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공산당과 천도교가 주도하는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학생세력은 전문학교생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고등보통학교생이 중심이 된 통동계(여기서 통동(通洞)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의 옛 명칭으로 1936년까지 사용되었으며, 6·10만세 시위자로 체포된 학생의 신문조서에 거주지가 통동으로 표기된 데에서 비롯됨)로 대별된다. 이 두 그룹은 각기 격문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였으며 서로 연락을 취하여 6월 10일 인산날 누군가가 만세를 선창하면 이를 기회로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계통의 거사 계획이 인산을 불과 3일 앞두고 발각되자 일제는 3·1운동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고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면서 혹시 다른 거사의 움직임이 있지는 않을까 철통같은 경계를 펼쳐 나갔다. 사상단체와 종교단체, 학교 등에 대해서도 대대적 검속을 단행하였다.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가 약 1만여 명에 달하는 그야말로 삼엄한 상황이었다. 기마경찰 · 헌병 ·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거리로 내몰면서 인산 당일의 거리는 온통 일본 군대와 경찰, 헌병으로 가득 찼다.
6월 10일 장례행렬은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종로3가 → 청계3가 → 을지로3가 → 훈련원(영결식, 오전 11시) → 동대문 → 창신동 → 신설동 → 청량리 → 금곡 유릉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왕의 상여가 통과하는 대로에는 서울 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조문객 등 30만여 명이 운집하고 있었고, 돈화문에서 을지로 길목까지 도로의 동서양쪽으로 고등보통학교생과 전문학교생 1만 4천여 명, 을지로 2가에서 4가까지 남북도로변에 7천여 명의 남녀학생이 도열하였다.
오전 8시 30분 경 순종의 국장 행렬이 단성사 앞 파조교 부근에 이르자 중앙고보 5년생 이선호가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어서 중앙고보생 3-40명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격문 1천여 매를 살포하면서 만세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현장에 있었던 수백 명의 학생도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니 부근에 모여 있던 군중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후 2시까지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 주도로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배포하였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였다. 동대문 앞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이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으며 7~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날 시위로 현장 검거된 학생과 청년은 종로경찰서에 약 150명, 동대문경찰서에 약 50명 등 2백여 명이었으며. 전국적으로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종로3가 지하철 역 2-1번 출구로 나와 옛 피카디리 극장 앞 도로변에 파조교 만세운동 선창 터 표석이 있다. 도로변 물건을 파는 포장마차 사이에 표석이 간신히 자리 잡고 있었고, 주위에는 종이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항일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세운 표석인데 호국보훈의 뜻을 기리는 의미로 주변을 말끔히 치웠으면 한다.사종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