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명성황후 사진, <font color=blue>이승철(66회) </font>-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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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명성황후 사진 | |||
입력: 2006년 07월 26일 18:18:25 | |||
1990년 국정 중등 국사교과서에 명성황후라고 소개된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사진은 1894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이라는 잡지 11월 호에 실렸던 것으로 한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기사에 ‘조선 왕비의 상궁’이라는 내용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7년 후 교과서에서 빠졌다. 이후에도 간혹 명성황후임을 주장하는 사진이 등장했으나 아직 진위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영국의 한 사진 수집가가 공개한 사진도 독일어로 ‘시해된 왕비’(Die Ermodete Konigin)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결국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남편인 고종이나 다른 비(妃)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있는 데 유독 명성황후의 것만 없을까. 우선 황후의 노출 및 대인기피증이 거론된다. 그녀가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벌인 목숨을 건 정치싸움 때문에 암살을 우려해 노출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녀가 “쾌활했다”는 언더우드 부인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또 다른 설은 사진이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속설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서양문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세 번째 설은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사진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 듯해 보이나 확실치는 않다. 명성황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다.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조선조에서 왕비로서는 사실상 유일하게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정치적 풍운아였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정치가로서 그녀가 우리 역사에 미친 공과를 따져보는 작업은 등한시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승철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