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제 훼스탈로 유명한 한독약품은 진기한 기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우선 49년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노사분규가 한 번도 없었던 기업이기도 하다. 1975년 설립된 후 30여년간 파업을 하지 않은 노조가 이 땅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또 제약업계 최초의 공개기업이다. 주식시장이란 개념이 희미했던 76년에 상장을 한 후 한번도 배당을 건너뛴 적이 없는 주주중시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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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는 또 하나의 흔치않은 기록을 세웠다. 외국계 합작기업임에도 창업 2세인 김영진 사장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 선임된 것이다. 2세 경영인이야 흔하디흔하지만 외국계 합작사의 경우에는 거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신뢰’였다고 김회장은 강조한다. 합작 파트너와의 신뢰, 주주와 신뢰, 직원과 신뢰, 고객과 신뢰. ‘신뢰’는 한독약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인상마저 들었다.
외국계 합작기업에서 한국 쪽 파트너사의 창업 2세가 최고경영자로 선임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아무리 합작 파트너의 창업 2세라도 기업을 승계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경영수업을 받아왔습니다. 84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한독약품에 입사했는데 2개월의 오리엔테이션만 받고 바로 당시 합작사인 독일의 훽스트사로 건너가 2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검증작업이 이어졌습니다. 한독약품에 10여년 근무한 후인 96년에야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당시 훽스트사와 부친인 명예회장 사이에 함께 일을 하면서 능력을 검증한 후 조건을 만족시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합의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독일에서의 경험이 경영에 도움이 됐습니까.
물론입니다. 귀국 당시 한독약품은 겉으로는 합작회사였지만 회사 내부의 업무 프로세스나 문화는 100% 국내기업이었습니다. 개선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습니다. 훽스트사의 선진 시스템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한국 사업장과 독일 훽스트사 사이의 불신관계를 털어버리는 데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귀국 당시 한국측 직원들은 훽스트가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훽스트사의 구조조정본부와 국제사업부에서 각 1년씩 일해서 훽스트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전혀 사실무근이었어요. 훽스트사 경험이 없었다면 오해를 풀지도 신뢰를 이어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49년 연속 흑자기업입니다. 국내에서는 매우 희귀한 일인데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보다 창업주이신 명예회장의 공이 훨씬 큽니다.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기는 창업기와 자리를 잡아나가는 기간인데 이때 흑자를 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흑자를 냈거든요. 결국 외국기업과의 합작 등 당시에 매우 신선한 접근을 통해 조기에 기반을 잡고 안정적인 성장을 낼 수 있는 기틀을 세워놓은 게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합작사, 주주, 고객, 직원 등 이해관계자들과 굳건한 신뢰관계를 유지한 것도 중요한 요인입니다. 사실 한독약품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이해관계자들과 ‘신뢰’가 두터워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요즘 ‘지속가능한 경영’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한독약품의 경우 지속가능한 경영의 비결은 ‘신뢰’였습니다.
한독약품은 무분규 사업장으로도 유명합니다. 강성노조가 즐비한 국내 기업환경에서 어떻게 장기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역시 ‘신뢰’입니다. 어떤 노조도 100% 만족하는 곳은 없습니다. 한독약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대화를 많이 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결론을 도출하고 합의된 사항은 반드시 지켜왔습니다. 반대로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요구는 철저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자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면 결국 노사간 신뢰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그동안 적자를 내지 않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겠죠. 아무래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노사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마련이니까요.
타협할 수 없는 요구의 기준이 있습니까.
과거 회귀적인 요구는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노사관계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단체협상에서 노조측이 수당 제도를 확대하자고 요구하더군요. 절대로 안된다고 대답했죠. 애써 폐지한 과거의 불합리한 임금체계로 돌아가자는 요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한독약품도 10개가 넘는 수당 항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당 항목이 많은 임금제도는 급여 체계를 왜곡하는, 전근대적 제도여서 노사합의에 따라 어렵게 폐지했습니다. 이를 부활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매출이 줄었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지난해 매출 감소는 ‘아마릴’이라는 제품의 매출이 급격히 떨어진 탓입니다. 당뇨병 치료제인 ‘아마릴’은 전세계적 베스트셀러입니다. 국내에서도 매년 600억원 가량의 매출을 창출한 히트작입니다. 문제는 2004년에 ‘아마릴’의 특허기간이 종료돼 무수히 많은 제네릭 의약품이 시중에 쏟아져 나왔다는 거죠. 대략 100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릅니다. 지난해 내놓은 ‘아마릴’의 복합제제인 ‘아마릴-M’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고 올해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두 자릿수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독약품은 50여년간 제약사업만을 고집한 한우물 기업입니다. 사업 다각화 유혹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합작사이기 때문에 다각화에 대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업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90년대 초반 건강기능식품 시장에 진출한 적이 있죠. 하지만 곧 접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유통은 ‘복마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질서했거든요. 한독약품의 상호를 사칭하는 유통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두면 ‘신뢰’가 생명인 의약품 시장에서 ‘신뢰’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더군요. 철수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유통체계도 많이 투명해져 기회가 되면 제대로, 과학에 기반을 둔 건강기능식품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약사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국민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조화를 이루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윤과 공익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수한 치료제를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첩경입니다. 한독약품은 이를 위해서 창사 이래 줄곧 노력하고 있습니다. 59년 외국사와 합작을 통해 일찌감치 선진적인 생산시스템을 구축했고 95년에는 국내 최고 수준의 신공장을 건설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독약품은 품질에서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발생해도 품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건강을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한독약품은 지난 64년 국내 최초의 기업박물관인 ‘한독의약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현재 보물 6점을 포함, 1만여점의 의약사료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박물관을 독립법인화해 ‘한독제석재단’으로 확대·발전시켰습니다. 사회공헌에 더욱 박차를 가할 방침입니다.
10년 후, 한독약품은 어떤 기업이 돼 있을까요.
국제적인 일류기업입니다. 좋은 제품으로 해외에 진출한 기업이 될 것이고,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계 기업에는 최고의 ‘신뢰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내외의 유수한 제약기업, 바이오벤처 등과 다양한 협력관계를 구축,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 나갈 계획입니다.
약력: 1956년생. 79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84년 미국 인디애나대 MBA. 96년 미국 하버드대 AMP 수료. 84년 한독약품 경영조정실 부장. 독일 훽스트사 근무. 86년 한독약품 경영조정실 이사. 89년 상무. 91년 전무. 91년 아벤티스 파마 대표이사 사장. 92년 한독약품 부사장. 96년 대표이사 사장. 99년 한국제약협회 부이사장(현). 2002년 한독약품 대표이사 부회장. 2006년 대표이사 회장(현)
정리=변형주 기자/사진=서범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