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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회 지석환 선배님의 <중앙학교 발전을 위한 제안서>를 잘 읽었습니다. 모교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간직하고 계신 선배님의 열정을 충분히 느꼈습니다. 그 열정에는 아무리 해도 따라가지 못할 17년 후배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선배님의 제안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열정에는 공감한다는 점을 밝히며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중앙은 그곳에 있어서 중앙이지, 그곳에 있지 않다면 중앙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영원불변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겠지요. 변화는 필연입니다. 그러나 뿌리는 지켜야 합니다. 변화한다고 뿌리조차 바뀌어버리면 그것은 이미 그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중앙의 이전’은 결단코 반대합니다.
선배님께서는 ‘교육의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의 이전을 주장하셨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먼저, 지금 ‘교육의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 앞으로 50년 100년 후에도 계속해서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만약 시간이 지나 ‘교육의 인적 자원이 풍부한’ 입지가 다른 곳에 형성된다면 그 때 또 이전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중앙학교 발전을 위한 대전제는 ‘학생을 찾아가는 중앙이 아니라 학생이 찾아오는 중앙’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려대학교가 중앙과 같은 재단이라는 사실밖에 모릅니다. 재단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모교 캠퍼스를 고려대학교 제3캠퍼스로 이용하도록 하자는 선배님의 제안에 대해서는 몹시 의아합니다. 만약 재단에서 이같은 선배님의 제안과 같은 일을 추진한다면 중앙 교우의 대다수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중앙은 우리 중앙이고, 고려대학교는 모르는 대학교입니다. 왜 모르는 대학교에 모교의 캠퍼스를 내줘야 합니까?
‘인재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근본적으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 평준화정책에 의하여 우수한 인재의 선발 및 양성의 기회를 잃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세월이 이미 30년입니다. 학교 평준화정책에 의하여 고교에 진학한 68회 선배들도 50세가 넘어섰습니다. 3만 명의 중앙 교우 중 2만 명에 가까운 수가 학교 평준화정책 이후의 동문입니다. 중앙이 책임 있는 교육기관이라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지 못해 인재를 양성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2만 명에 가까운 68회 이후의 중앙 동문이 인재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거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만 인재라고 보지 않습니다. 학교는 인재가 아닌 학생이라도 인재로 양성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이른바 일류대학교에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학교가 명문이라는 고정관념은 이제 떨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평준화정책 이전의 ‘화려한 명성’을 추억하는 노․장년층 명문고교 출신들의 향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준화정책 폐지를 주장하는 근본에는 바로 그 향수가 있다고 봅니다. 중앙은 어쩌면 그 향수에 기대어 30년을 보내며 평준화정책 이후 동문들의 기를 죽여 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준화 이후에는 그 이전 선배들께서 고교 서열화에 의해 받았던 ‘영혼의 상처’는 없습니다. 국가 정책에 의해 고교에 진학한 것이 죄라면 죄일까요. 중앙이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기보다 평준화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보다 더 열심히 인재를 양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재학생들의 미래 가치를 높이려는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중앙중학교의 특목고 진학률이나 폐지를 말하는 것보다 우선은 중앙중-중앙고의 연계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체계와 프로그램을 만들어 중앙중 학생들이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다른 중학교 학생들도 중앙에 오고 싶어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선생님들의 열의가 있어야겠지요. 중앙으로 진학하면 ‘뭔가 달라진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심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뭔가 달라진다’에서 ‘뭔가’를 ‘뭘’로 채울 것이냐 하는 고민이 중앙학교 발전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의 내용 중 지엽적인 표현에서 감정을 상하셨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제가 왜 중앙에 애정을 갖는가 하고 자문해 봅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중앙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중앙은 그곳에서 좋은 학교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중앙에 대한 선배님의 애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후배들을 사랑으로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