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유네스코 등재 `유교책판`의 선비정신, <font color=blue>김병일</font&…
본문
[세상사는 이야기] 유네스코 등재 `유교책판`의 선비정신 | |
기사입력 2015.10.16 16:17:10 | 최종수정 2015.10.16 19:45:43 |
|
이산가족찾기 기록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책판은 이름부터 생소한 감이 있다. 책판(冊版)은 전통시대 나무판에 글씨를 거꾸로 새긴 후 먹을 묻혀 내용을 찍어냈던 목판 중의 하나로 순전히 책을 찍어낼 용도로 만들어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 다른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유교책판은 팔만대장경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팔만대장경은 불교경전인 데 비해 유교책판은 유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국가가 제작을 주도한 팔만대장경과 달리 유교책판은 민간의 자발적인 관심과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13세기에 제작된 단일 책판인 반면 유교책판은 15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500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문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집은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저작 모음집을 가리키는데, 그 제작 과정을 들여다보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학덕을 갖추고 평생 올곧은 삶을 사셨던 선현이 돌아가시면 서원이나 문중회의 등의 엄정한 공론 과정을 거쳐 공동체 출판 형태로 문집 발간을 결의한다. 그러면 그분이 평생 쓰셨던 글을 수합해 문집에 실을 글을 결정한 후 일정한 크기의 원고지에 정서(正書)하여 초고를 마련하는 한편, 적당히 숙성된 판재를 구해 글씨를 새길 판목을 제작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각수(刻手)가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여 글자를 새기고, 마지막으로 완성된 내용을 종이에 찍어 책으로 제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문집의 저자와 평소 교분이 있던 지인이나 관계된 서원과 문중 등에 기증됐다. 우리의 문집은 이처럼 대부분 기증용 비매품으로 제작됐는데, 이는 판매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중국이나 일본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문집을 판매가 아니라 기증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은 이에 대한 선조들의 생각이 남달랐음을 의미한다. 문집을 단순히 책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선현과 조상의 정신이 담겨 있는 신성한 대상으로 존숭한 것이다. 이는 책판 제작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을 문중이나 지역 공동체가 합심해 기꺼이 감당한 데서도 증명된다. 제본용 종이값은 그만두고 판각비용만 따지더라도 요즘 시세로 한 장당 200만원 정도로 책 한 권 만드는 데 1억원가량 소요됐다. 이 때문에 퇴계선생문집처럼 방대 문집은 제작비용이 수십억 원대를 넘어가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이처럼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우리 조상들이 책판 제작에 열과 성을 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거기에 담긴 선현의 정신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가르침이요, 진리라고 생각해 영구 보전·계승 방법으로 책판을 만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현과 스승의 가르침을 후손과 후학이 탐구·전승하는 500년 집단지성(集團知性)의 역사가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가치는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유교적 인륜공동체(人倫共同體)였다. 이 점에서 유교책판은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이 스며 있는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그 안에 담긴 선비정신이 새롭게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