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동문들에게***
시간을 가지고 읽어보기를 기대하고
Marquee 태그로 편집했던 것인데...
김갑일 동문과 같이 시간에 쫓기는
동문들을 생각하지 못한 점이 아쉬어
여기에 화면을 펼쳐서 다시
편집해서 올립니다.
미안 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45회 공준수로부터
******************
***삼전도비***
- 2006년 04월 14일 -
비명 -
하늘은 서리와 이슬 내려 숙살하고 생육하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 떠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베푸셨네.
황제께서 동국을 정벌할 제 십만 대군으로 우르릉 쿵쿵
흡사 호랑이와 표범이었네
참가한 군사는 서역 사막에서부터 저 북방까지 망라되어
창 들고 돌진하니 그 기백 매섭기도 하여라.
황제는 매우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니
빛나는 열 줄 글은 준엄하고도 따스하였네.
처음엔 어리석어 알지 못해서 스스로 근심을 끼쳐드리자
황제께서 밝으신 명을 내려 잠 속에서 깨어난 듯하였네.
우리임금 삼가 승복하고 신하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위력이 무서워서만 아니라 오직 그 덕에 귀의하였네.
그 마음 황제께서 높이 사 은택과 예우가 흡족하였고
얼굴을 펴고 웃음 웃어 무기를 거두셨네.
게다가 하사하신 것은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니
서울의 사녀들이 그 덕을 노래하였네.
우리 임금 서울로 돌아간 것은 황제의 배려였고
황제는 군대 거두어 우리 백성 살리시고 흩어진
우리 불쌍히 여겨 농사지어라 권하였네.
국가는 옛 모습 되찾고 사직은 새로워지니
마른 뼈에 살이 다시 붙고 얼었던 풀뿌리가 봄을 만났네.
드높은 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세 삼한은 황제의 덕이라
가선대부예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신 여이징 봉교전
자헌대부한성부판윤 신 오준 봉교서
자헌대부이조판서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신 이경석 봉교찬
숭덕 4년(인조 17년 1639) 12월 초8일에 세움
******************************
음악이 끝나면 Player button을
눌러서 음악을 다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삼전도비**
사적101호:
삼전도 한비,
삼전도 욕비,
청태종 공덕비
또는
대청황제공덕비 라고 불린다.
세운 해: 1639년(조선조 인조 17년)
소재지: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번지 3호
이비는 1639년(조선조 인조 17년)
청나라 태종의 군영이 있던
한강변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인조가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유적비 이다.
비문에는 대청황제공덕비라
적혀 있어있으나
사적 지정 당시 이곳의 지명을
따서 새로이 삼전도비라
하였다.
비석은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한 용머리 장식과
비문을 새긴 비 몸이
하나로 되어있는 형태로서
거북받침대는 내모난 받침 대
위에 놓여있다.
비의 앞면 오른 쪽은 만주문자 20행,
왼쪽은 몽고문자 20행
뒷면은 한문으로 되어있다.
이 비의 문장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다.
이규태의
'600년 서울'을 보면
강요에 의해 이 굴욕적인 비문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 한성판윤(서울시장)
오준은 양심을 구하고자
벼슬을 버리고 붓을 꺾어
두 번 다시 글씨를 쓰지 않았다하며
그의 오른손을 돌로 찍어
^^을 만들었다 고 한다.
그리고
한말 갑오개혁 이듬해(1895년)에
청일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청나라 세력이 위축되자 민초들이
이 비석을 한강물속에 쓰러뜨렸던 것을
1913년 고적이란 명목으로
건져내어 다시 세웠고,
해방 후에 다시 민족의 치욕적
비석이라 하여 쓰러뜨려
땅에 묻었던 것을
1963년에 문교부가
파내어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사적 101호로 지정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8호선의 석촌 역 6번 출구로
나가 곧장 2.3분 거리에
편의점 '쎄븐일레븐'이 마주친다.
그 점포를 마주보며
왼편 골목으로 돌아서 가다가
세 번째 십자로의 왼편 대각선으로
어린이공원이 보인다.
그 공원을 뒤로 접한 곳에
삼전도비가 공원을 뒤로하고 동쪽을
바라보고 정좌(?)하고 있다.
아래에 20커트의 삼전도비 사진을 깔았다.
(1) 서울시내 송파구 석촌동 289-3호에
사적 101호로 지정 되어있다.
1639년에 세워졌다.
(2) 위의 사진의 왼편에 나타난 까만 동판그림으로
조선조 인조가 청나라 군사가 지켜보는 가운에
청나라 태종에게 엎드려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굽실거리고
잘못을 용서받는 굴욕적인 장면을 동판으로 재현해 놨다.
당시 김상헌 같은 주전론자와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와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조가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1637년 정월 30일 남한산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례를 올리고
있는 장면을 연출해 놨다.
작금의 시대상황과 비교하건데
시사하는바가 크다.
최명길(1586-1647) -
실질을 중시하는 영명학적고를
바탕으로 청나라의 침입 때
주화론을 주장하여
상화를 담당했으며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담당하면서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620년대 중반 후금의 위협에 대해
척화 론이 조정의 다수세력을 차지했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여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주화론을 주장했다.
1636년 한성부윤(서울시장)을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홍익한 등의 척화론. 주전론에 대해
다시금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
거대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힘도 없으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보는 듯해 마음이 뭉쿨하다.
(3) 위 동판 그림
(4) 삼전도 비의 측면
(5) 삼전도 비 옆에 거북받침대가 보인다.
여기에도 보조비가 하나 있었음 직하다.
(6)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7)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8)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9)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0)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1)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2)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3) 삼전도 설명문동판
(14) 삼전도 비의 안내문
(15) 삼전도비 안내문
(16)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7) 삼전도비의 거북받침대 - 인상이 고약하게 보인다. ^:^, ^:^
(18)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19) 삼전도비의 뒷면
(20) 삼전도비의 또 다른 장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