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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등학교 전경.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한복판 딸깍발이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계동에 위치한 중앙고(中央高)는 민족지도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학교의 대표이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이 학교 설립자인 인촌(仁村)김성수(金性洙)선생의 동상과 함께 석조건물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특히 교정 오른쪽에 3.1민족독립운동을 최초 모의했던 자리라는 의미로 책원지(策源址)라 쓴 비문을 대하니 저절로 옷깃을 여미고 고개가 숙여진다.
중앙고가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민족지도자 산실이 된 것은 오로지 김성수선생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정성이 깃들여있기에 가능했다. 김윤식, 유길준, 이상재 등 민족선각자들이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국가 장래에의 유일한 활로이며 민족교육을 고취하고자 1908년 중앙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유길준이 1914년 급서 중앙학교는 난관에 봉착, 이를 개탄한 김성수선생이 1915년 4월27일 중앙학교를 기꺼이 인수했다. 이 때 큰 아버지 김기중(金祺中), 아버지 김경중(金暻中)이 학교설립자로 되었다. 이후 중앙학교는 김성수선생 혼의 결정체이자 인촌정신의 정수가 되었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호남거부였던 두 분 형제는 원래 서울에다 백두산 이름을 딴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세우려고 했으나 일인들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성수선생은 폐교 위기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 학교경영을 전담하면서 그의 손길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써 중앙학교는 민족교육 도장으로서 반석위에 놓이게 됐다.
일 총독부, 인촌 중앙학교 인수 온갖 방해 협박
정창현(鄭昌鉉) 교장선생님
민족혼을 꺾기위해 자멸을 기대했던 일인들은 큰 낭패를 보게 되자 백방으로 방해, 학교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수선생이 일인들의 온갖 방해와 고초를 감내하며 중앙학교를 기필코 인수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알 수 있다.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 발간한 ‘고하(古下)송진우(宋鎭禹)선생전’ ‘중앙학교와 3.1운동’조(條)를 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하와 인촌은 동경 유학 때 광복운동의 제1단계 사업으로 교육기관을 붙잡자는 밀약이 되어 있었다. 고하보다 1년 먼저 와세다를 졸업하고 돌아온 인촌은 중앙학교 인수교섭을 받은 즉시로 아버지와 큰아버지 두 부친에게 장차 계획과 그 뜻, 그리고 필요성을 설명했다.
두 분은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고 주저했다. 완고하기도 하였거니와 막대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직 인촌은 지성과 열의로써 부친을 움직일 수 있었다. 드디어 부친의 승낙을 얻었다.
그러나 더 큰 난관이 중앙학교 인수를 가로막고 있었다. 고하나 인촌은 특별 요시찰인물이었다. 총독부 학무국장 세끼야(關屋)는 거들먹거리며 인촌이 제출한 중앙학교 인계청원서를 물리쳤다. 총독부가 훼방하고 나선 것이다.
‘뭐,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하고 세끼야는 딴전을 부렸다. 젊은 인촌은 끈기 있게 찾고 또 찾았다.
‘아직도 단념을 않고 있나. 그럼 어디 다음에 와 보시지.’ 세끼야는 김 군이라 멸시하면서 진이 떨어지면 제풀에 물러나리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는 일본정부의 방침으로 조선 민중은 초등교육 정도에 그치게 하되 일본인 교사를 파견해서 감독케 할 것, 특히 배일(排日)사상을 품은 자의 교육 참여를 금지할 것 등의 밀명(密命)을 받고 있는 터라 학무국은 경찰과 직통, 고하와 인촌을 중심한 청년들의 동향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일본 정부, 조선 민중 초등교육 정도에 그치도록 밀명
3·1 독립운동 책원지 비석
인촌도 그런 눈치를 못 챈 것은 아니었다. 허가를 않는 것은 저들의 방침이었고, 허가를 얻고자하는 것은 이쪽의 확고한 결심이었다. 인촌이 우울해 있던 어느 날 와세다대 은사인 나가이(永井柳太郞)와 다나까(田中橞積)가 서울에 체류 중임을 알고 이들을 여관으로 찾았다.
“동경 유학 당시부터 교육 사업을 하려했는데 졸업을 하고 와보니 조선 사람에게는 인가를 해주지 않는군요. 이것은 중앙정부 방침인 것 같기도 하고...”라고 인촌이 말끝을 흐리자 나가이는 펄쩍 뛰며 인촌의 말을 가로막고 “내 말해주지”하며 인촌의 후원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학교 인가를 얻기는 했으나 다음에는 교원허가를 갖고 말썽을 부렸다. 요는 동경에서부터 불온사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인촌은 변명도 했고 달라붙기도 했다. 생전 처음 요리 집으로 끌어내어 술자리도 벌였다.
“이것은 독립운동이니까.” 인촌은 오라면 가고 가라면 돌아서고, 요리를 사라면 사고 출물꾼 노릇까지 하면서도 학교허가 하나 맡는 것도 독립운동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김성수선생은 일본인 관리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을 대로 겪고 난 다음에야 겨우 학교인가를 얻어내게 되었다. 이어 인촌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 지금의 중앙고 자리를 터로 정하고 4,300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학교터 뒤편 숲속에 육군연성학교(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상해임정 군무총장 역임) 참령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도 유명한 일화가 숨어 있다.
인촌이 계동 1번지 깊은 숲속 사려고하자 고하 말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하자 고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먼? 이보게, 큰 길에서 너무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년 뒷면 학교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 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백년대계(百年大計)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데 없었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혀를 찼다고 했다.
중앙고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3.1민족독립운동의 첫 모의 장소였다는 점이다.
3.1운동을 최초에 발의하고 주동했던 인물중 한 사람인 현상윤(玄相允) 12대 교장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1918년 1월 세계1차 대전 파리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전 미국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이 보도를 접한 나는 김성수, 송진우와 중앙학교 구내사택에 함께 거주, 밤낮으로 이 얘기를 나누며 국내에서 큰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 먼저 단결력이 있는 천도교를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나는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중학 최린(崔麟)교장을 만나 의향을 타진, 반대하는 기색이 적어 고하와 함께 최 교장을 만났다. 1918년 11월경부터 시작 수개월 동안 모의거사를 결행키로 하고 최남선(崔南善)의 참여를 권했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또 천도교 중진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은 손병희(孫秉熙)의 궐기를 권유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초순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초고(李光洙작)를 입수, 중앙학교를 방문한 최남선에게 보이니 국내선언서는 자신이 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손병희도 “어린사람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 보기만 할 수 있느냐”고 말해 그날부터 거사는 일사천리 진행됐다”
학교 숙직실에서 3.1민족독립운동 처음 거사모의
3·1 민족독립운동, 처음 모의했던 숙직실
이처럼 중앙학교의 숙직실이 바로 거족적으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책원지가 된 것이다. 인촌이 인수하면서 중앙학교는 민족교육 도장으로 급성장했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오늘날 중앙고의 밑거름이 됐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교편을 잡았다. 이로써 중앙학교는 조선의 대표적 민족지도자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됐고 무수한 민족지도자들이 길러졌다.
김성수선생은 중앙고 교훈으로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을 정했다. 이것은 인촌의 백년대계 교육이념을 집약한 동시에 그의 교육철학을 나타낸 것으로 지금도 초지일관 이를 지키고 있다.
“웅원은 높은 이상, 용견은 굳은 의지, 성신은 성실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오는 2008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재단에서 150억 원을 투입, 우수한 교육환경을 구축하고 우수한 교사를 확보하며 양질의 프로그램을 실천해 21세기국내 최고의 명문학교로 거듭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자립형 사립고를 적극 추진하며 남녀공학도 실시할 예정입니다.”
중앙고 정창현(鄭昌鉉)교장선생의 한마디 한마디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정 교장선생은 “중앙고는 우리 민족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교육의 도장이었다. 김성수선생을 비롯해 윤치오, 유길준, 남궁훈, 유근,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선생 등 저희학교 교장선생 한분 한분이 민족지도자로서 이 나라를 이끌어 오신 분 들이다. 우리학교는 이제 제 3의 부흥기를 맞아 21세기 민족지도자와 민주시민들을 길러내겠다”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중앙고의 미래교육은 자주 자립 자존의 국민성을 배양하는데 우선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그리하여 21세기 주역이 될 한국인을 양성하도록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자주 자립 자존바탕 21세기 주역양성, 자립형 사립고 남녀공학 추진
“민족교육 도장으로서 오랜 전통을 간직한 중앙고만의 특성을 살려 1)애국자를 육성한다. 2)실력자를 육성한다. 3)민주시민을 육성한다. 4)인류애를 실천하는 인재를 육성한다. 는 교육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습니다.”
중앙고의 인성교육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김성수선생은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보성 경신 등에서 일인교사를 배척하고 저항하는 등 민족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한 학생 모두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교훈에도 단순히 지식만을 주입하는 공부하라는 말은 들어있지 않다.
총독부는 김성수선생을 친일인사로 만들려고 온갖 유혹도 해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해 보았지만 언제나 정정당당했다. 이러한 인촌정신이 중앙고 인성교육의 밀알이 되어 지금도 면면히 이어내려오고 있다.
중앙고 인성교육의 대표적 사례에는 이러한 일도 있었다. 인촌은 신년 초하루가 되면 학생들에게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인촌 집에서 직접 떡을 해가지고 와 우리 전통한지에 싸서 주었던 것. 나라 잃은 것도 서러운 조선학생들이 정월 초하룻날 일본 떡 모찌를 먹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인촌의 신념이었다.
정 교장선생은 “중앙고에는 오늘날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 창설자인 조철호 선생이 근무할 만큼 인성교육이 활발했다”며 “지금 학생들이 공부에 치중하다보니 선배들의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100주년을 맞아 선배들의 빛나는 민족교육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진석 추기경, 채문식 전 국회의장 등 거물들 다수 배출
중앙고 동문들은 3만 명에 달하며 수많은 민족지도자들 뿐 아니라 각계에서 중견간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채문식 전국회의장, 윤치영 공화당 의장, 이희승 국어학자, 김용식 전 외무장관 등 거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정치권은 정몽준, 박성범 국회의원 등이 있고, 경제계는 박성용 전 금호그룹회장, 최창락 전 동자부장관, 조중건 전 대한항공부회장, 서정호 엠베서더호텔 회장, 한형석 마니커 회장 등이 있다.
특히 요즘 각광받고 있는 정진석 추기경이 중앙고 출신이며, 이우주 연세대 총장, 정문기 어류학자, 나운영 음악가 등도 있다.
정 교장선생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최고의 교육력(敎育力)’만이 우리나라가 세계제일의 교육 강국, 교육 수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국가가 먼저 시대변화에 맞는 교육여건을 조성해 놓아야 하지만, 학교도 주위로부터 신뢰받는 학교상과 존경받는 스승상(像)을 정립, 학생에게 평생의 성패를 판가름할 감성지능을 길러주고 꿈과 용기를 심어주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e 사상계-2006년 03월 29일 12:10 / 김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