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사학자. | | 본관 | | 순흥 | 호 | | 민세 | 활동분야 | | 독립운동, 정치 | 출생지 | | 경기 평택 | 주요수상 | | 건국훈장 대통령장(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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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본관 순흥(順興), 호 민세(民世). 경기 평택(平澤)에서 출생했다. 1914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16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 교감을 지내며 3·1 운동 당시 시위를 지도하였고, 이어 대한청년 외교단(外交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붙잡혀 3년간 복역했다. 1923년 《시대일보(時代日報)》 창간에 참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로 10년간 재직하면서,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이사를 겸임,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신간회(新幹會) 총무로 활약하다 투옥되어 8개월 후 풀려났고,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신채호의 영향을 받고 조국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 국사(國史)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몰두, 일제 관학자(官學者)들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론(新民族主義論)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8·15광복 직후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 그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곧 탈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을 지내고, 1946년 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 사장, 비상국민회의 의원, 민주의원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의원,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을 지내고 1950년 9월 6·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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