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앙교우님모든분께 정월대보름날 맞아 가내 행운과 건강이 넘치고 항상 둥근달처럼 화목하고 인정이 넘치길 기원합니다. 60회 홍정식배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행] 아산 외암마을
충청도 아산 남쪽을 지나는 금북정맥에서 뻗어 나온 지맥은 광덕산(698.4m)을 지나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외암마을은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설화산(447m)을 주산으로 하고, 멀리 서남쪽에 솟은 금북정맥의 봉수산(535m)을 조산으로 들어앉았다. 충청도 반가의 미학을 보여주는 전통마을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李挺)이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안 이씨(禮安 李氏)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숙종 때 학자인 후손 이간(李柬)에 의해서다. 그는 마을 주산인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자신의 호를 ‘높을 외’ 자를 쓴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 후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렸다. 그런데 한자는 언제부터인지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안에는 민가가 밀집되어 있고 그 주변에는 논과 밭이 정겹게 둘러싸고 있다.이들 중 넓은 마당과 정원을 갖추고 여러 칸의 목조 기와집을 가진 큰 규모의 고가(古家)들이 20여 채에 이르고, 그 사이사이엔 작은 규모의 집들이 섞여서 모두 60채가 자리잡고 있다. 반가(班家)에는 참판댁․병사댁․감찰댁․교수댁․참봉댁․ 국사댁 등 주인의 관직명을 따서 부르는 택호, 그리고 재직하던 고을명이나 출신지명을 딴 영암댁․신창댁․양성댁 등의 택호가 붙여져 있다. 대부분 조선 후기에 건립된 외암마을 고택들은 구조와 양식에서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세를 과시하려는 성향이 있는 여느 지방의 반가와 달리 거창하지 않고, 텃밭과 돌담길 등이 반가와 함께 어우러져 오히려 담백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또 설화산의 화기(火氣)로 인한 화재와 재난을 염려하여 마을로 끌어들인 계류가 집들 사이로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정원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들은 대부분 낮지도 높지도 않은 사람 키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돌담 사이로 나있는 골목길은 제법 고풍스런 멋을 풍긴다. 또한 골목길이 많아 관람 동선 잡기가 쉽지 않지만, 마을 입구에 있는 외암민속관을 먼저 들러 외암마을의 내력을 이해한 다음 천천히 골목길을 걸으면서 둘러보면 된다. 한편, 외암마을 이참판댁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주(家酒)인 연엽주는 고종에게도 진상하였다고 전하는 전통술이다. 그 동안 집안에서 제삿술로만 빚어 왔으나 요즘은 일반인들도 그 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을에는 연엽주를 빚어 파는 집이 여럿 있다. 2월 11일에 대보름행사 펼쳐져 정월 대보름은 우리 겨레의 ‘밝음사상’을 반영하는 큰 명절로서 그 날을 전후해 전국에서는 마을 공동체 행사가 많이 열린다. 외암마을도 대보름 전날인 2월 11일 방문객을 초대해 장승제를 연다. 이는 마을의 액운을 막고 전^^을 물리치기 위하여 마을 수호신인 장승에게 지내는 동제(洞祭)다. 잔치는 토요일인 11일 오후 1시쯤 시작한다. 외암민속관 근처에 장승을 세우고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나면 풍물패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분위기를 슬슬 잡아나간다. 오후 2시 마을 노인이 주관하는 엄숙한 제례 의식은 30분 정도 걸린다. 이후는 외암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의 차례다. 원하는 방문객들은 장승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릴 수 있다. 오후 3시 풍물패가 다시 흥을 돋우면, 마을 곳곳에서 연날리기를 비롯해 투호․제기차기․썰매타기․떡메치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연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서부터 인절미 재료까지 행사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외암마을에서 준비를 한다. 썰매도 보통 때는 1대 빌리는 데 1,000원씩 지불해야 하지만, 이 날만큼은 무료다. 또 오곡밥․약식․귀밝이술․부럼․복쌈․진채식 등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날에 만들어 먹는 별식을 ‘상원절식’이라 하는데, 외암마을 측에서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대접한다. 이윽고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들면 풍물패가 신명나게 막바지 흥을 불지핀다. 그리고 오후 7시쯤 시냇가 옆의 논에서는 쥐불놀이가 늦겨울 밤하늘을 수놓는다. 쥐불놀이에 필요한 깡통과 나뭇가지 등도 당연히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다. 또 둥근 달이 온 마을을 밝게 비출 때면 한켠에선 달집태우기를 한다. 달집이 거의 타들어 가면 풍물패와 어우러진 잔치 한마당이 다시 벌어지고 8시간여 동안 계속된 대보름 행사는 밤9시쯤에 서서히 막을 내린다.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가보면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외암마을 입장료는 대인 1,000원, 소인 500원. 주차요금은 1,000원. 관리사무소 041-544-8290 홈페이지 www.oeammaul.co.kr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서울 4대문 중 유일하게 일반인 접근이 불허된 북대문 '숙정문'(사적 제10호)이 38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숙정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 등과 함께 건축된 곳으로 지난 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출입이 통제돼왔다. 대통령 경호를 위한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 청와대는 8일 북악산 숙정문과 그 일대 1.1km를 내년 4월부터 국민에게 개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민에게 북악산을 돌려준다는 의미와 함께 과거 냉전시대 유산을 정리한다는 의의도 갖고 있다. 숙정문에는 소나무와 철조망이 공생한다 37년 동안 출입이 통제된 북대문 숙정문 주변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소나무 자태가 일품이다. 남쪽지방의 소나무들은 재선충 때문에 비상이지만 서울성곽안 북악산 소나무는 짙푸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돌로 층층이 쌓여 길게 늘어선 성곽은 소나무를 돋보이게 하고, 소나무는 성곽의 운치를 더해준다. 내년 봄이면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는 숙정문이 8일 기자들에게 먼저 공개됐다. 서울 삼청동 삼청각 옆 홍련사에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숙정문에 닿을 수 있다. 단, 군부대의 경비 탓에 총 3개의 철조망을 통과해야 한다. 10km 넘게 이어진 성곽 주변에는 소나무만 있는 게 아니다. 날카로운 2중 철조망과 경계 경비를 서는 군 초소도 서울성곽과 함께 이어져 있다. 숙정문과 이어진 성곽에 오르면 아차산과 남산은 물론이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숙정문에서 북악산 정상방향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촛대바위다. 촛대바위에 오르면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가 일직선 시원스레 보인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렇게 좋은 곳을 이제야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됐다"며 "많이 늦었지만 아름다운 문화재와 자연풍광을 시민들이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얼굴에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내년 4월에 개방되는 구간은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총 1.1km이다. 현재 문화재청은 숙정문 개방을 1일 3회, 회당 50명으로 제한할 계획이다. 청와대 경비를 비롯한 군부대 경계경비 문제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시민들에게 개방하기 전까지 총 12억원을 투자해 탐방로 주변과 주차장 등 편의 시설을 정비하고 주변 생태 환경을 조사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10년 동안 총 1330여억원을 들여 서울성곽 전체를 복원하고 정비한다는 계획이다. 유 문화재청장은 "일제가 무너뜨린 돈의문(서대문) 등의 성문과 성벽 복원을 추진해 복합문화재인 '사적 및 명승'으로 승격지정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Historical City)'로 등록하는 것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닫혀진' 역사, 숙정문 숙정문은 태조 5년(1396) 9월 만들어졌다. 처음 붙여진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숙정은 '북방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이고,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큰 차이는 없다. 사실 숙정문이 '닫혀진 문'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태조 13년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숙정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며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했다. 이에 숙정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숙정문은 다른 문루와 달리 통로의 구실을 하지 않았다. 위치로 봤을 때도 다른 3개 대문과 달리 산 속에 있어 일반 사람들의 통로로 사용됐다고 보기 어렵다. 인적이 드문 탓에 조선시대 중종반정 때는 군사들이 집결한 곳으로 사용돼기도 했다. 숙정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닫혀진 문으로 존재했다. 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할 때였다. 숙정문은 이처럼 폐쇄된 문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북문으로 칭했다. 중종 18년부터 숙정문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 이후엔 두 명칭이 혼용된다. 이름이 달라지기 시작한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한자 표기를 달리 하여 중종 26년 북정문(北靖門)이라는 표현과 선조 20년의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이 있다. 북문이 주로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해 시장을 옮기고, 북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발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