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사서 만난 도법 스님 “생명 살리는 지율 내치고 ‘불자’ 따라 생명공학 지지…
불교계 자기모순적 ‘존재의 실상’에 무지한 탓”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 도법 스님은 2004년 3월부터 무려 1만5천㎞를 걷고 또 걸었다. 지리산을 출발해 제주도-부산·경남-광주·전남-대구·경북을 순례했다. 남을 딛고 더 잘 살겠다는 인간의 조급증과 탐욕 때문에 땅에 버려 외면하고 짓밟아버린 생명평화의 마음들을 이삭 줍듯 하나둘 모으는 발걸음이었다. 불교계 안의 조급증과 탐욕이 세상의 것 못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때문일까. 그가 한겨울 가던 길을 잠시 멈춘 채 불교계 내부의 모습에 대해 입을 열었다. 불교계에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일방적 지지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1년 반 전 기자에게 “불교적 세계관과 생명윤리관에 과연 줄기세포 연구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고려치 않은 채 (불자란 이유로) 이래도 되는 것인가”라며 우려하던 바로 그 자리, 지리산 실상사 화림원에서였다.
“불교인들은 불교가 ‘과학적 종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 대한 한국 불교계의 반응은 불교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줄기세포연구 불교세계관 맞나? 이런 감정의 편린들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 그는 듣고 또 보고 있었다.
“조선왕조 500년의 불교 탄압 이후 피해의식에 젖어있고, 해방 후 기독교의 급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 불교계가 불자인 ‘황우석’을 통해 생명공학과 함께 하는 불교라는 자부심을 누리고 싶어한 것 같다.”
이미 확실히 드러난 황우석 교수의 거짓말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고, 여전히 기독교 음모론과 미국의 음모론만을 신봉하는 것은 그런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미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이번 사태는 한국 불교계가 얼마나 자기 세계관과 철학이 없고, 사회 문제의식이 희박한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생명공학이 불교적 세계관에 과연 부합하는 것인지를 살피지도 않고 건너뛰어버렸다”며 “이제라도 불교적 세계관에서 생명공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다.
“불교는 소유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탐진치를 소멸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교다.”
생명공학이 아무리 고도화해도 인간의 소유 욕구를 채우려고해서는 삶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생명공학 연구에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보다 불치병과 난치병과 장애가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불교계가 할 일 아니냐”고 했다.
2년 전 조계종 총무원에 13명의 연구원들로 ‘불교생명윤리정립연구위원회’가 발족했지만 이번 사태를 맞기까지 아무런 감시나 견제 구실을 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도 함께 했었는데, 위원회 초기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반대가 많았지만 점차 찬성이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 연구원들 가운데 조계종립학교인 동국대 소속 교수들은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찬성하는 이들이 많고, 타 대학 교수들은 비판쪽이 많다고 한다. 종단 소속 교수들은 종단의 수장인 총무원장의 황우석 지지발언과 불자 대중들의 지지 여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걱정의 소리들이 있다”
그는 이를 “학자적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불교계 두 화두인 ‘지율’과 ‘황우석’에 대한 반응에도 한 숨을 토해냈다.
“지율 스님과 황우석 교수를 보는 불교계 반응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몸짓이다.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 어떤 가치들보다 우선하다. 더구나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교계는 불교적 숭고함을 평가절하하고 냉소하고 비난하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황우석 교수에 대해선 문제가 드러난 뒤에도 온 불교계가 나서 감싸고 있다. 너무 자기 모순적이다.”
이런 사회 ‘내 자신’도 책임있어 산문 밖을 나서 산골 구석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밤새 얘기를 나눈 지 어느 덧 2년. 그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도시도 농촌도, 진보도 보수도, 다 전도몽상에 빠져 있다”고 했다. ‘위 아래가 거꾸로 됐다’ 혹은 ‘헛된 것’이라는 의미의 ‘전도’를 그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 때문”으로 보았다.
“존재의 실상은 ‘너(상대)에 의지해 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좋으나 싫으나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존재에 대해 무지하니 상대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그래서 경쟁해서 이겨야한다고 하고, 승리해야 한다고 하고, 일등을 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런 몽상에 의해 부자타령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난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남을 딛고 내가 앞서고, 내가 더 잘살아야 하는데 ‘너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며 모두가 너 탓이다. 4500만 전체가 누군가로부터 불신과 원망을 사고 있고, 누군가는 그 불신과 원망을 표출하고 있다. 온통 불신과 원망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황우석’에 대한 불교계의 모습도 이런 일등주의와 승리주의에 다름이 아니라는 게 스님의 걱정이다. 스님은 “이런 사회가 된 데는 ‘내 자신’도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최근 쉬는 동안 단식을 해 더욱 살이 빠진 스님의 뒤로 지리산 소나무들이 여전히 푸르게 서 있었다. 겨울 한기가 가득한 허공에 한줄기 봄 기운을 토하며.
남원 실상사/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