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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활빈단,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 '바로 알리기' 캠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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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빈단 홍정식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종로구 계동 중앙고 교우회(회장 정몽준)체육대회 참석후 교정내 설립자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 동상과 독립운동 책원지인 3ㆍ1기념관 앞에서 일제 강점기에서 독립을 위해 교육입국을 행동으로 실천한 인물을 친일로 덧씌우는 오도된 역사관을 가진 좌파세력을 성토하면서 인촌 바로알리기 진실 켐페인을 벌였다.
김성수 [金性洙] 한국 언론인·정치가 브리태니커 김성수 요약정보
1891. 10. 11 전북 고창~ 1955. 2. 18 서울. 교육가·언론인·정치가.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인촌(仁村). 경중(暻中)의 아들이다. 3세 되던 해 백부 기중(祺中)의 양자가 되어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907년 영어학숙(英語學塾)에 다니면서 송진우(宋鎭禹)·백관수(白寬洙)와 함께 변산(邊山) 태호사(泰護寺)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 긴조[錦城] 중학교 등지에서 수학했다. 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에 졸업했다. "신문화에 의한 민력배양(民力培養)을 바탕으로 한 민족독립"이라는 신조를 갖고 졸업 무렵에는 일본의 문물을 시찰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민력배양을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등이었다. 1915년 4월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4월, 3·1운동을 계기로 형성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를 육성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계몽에 힘썼다. 당시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사원들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는 경영난에 빠졌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다. 특히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과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등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의 송진우·최원순(崔元淳), 천도교의 최린(崔麟)·이종린(李鍾麟), 〈조선일보〉의 신석우(申錫雨)·안재홍(安在鴻),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대구의 서상일(徐相日), 평양의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결성하려 했으나 사회주의자와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로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2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2년 3월에는 교육구국의 이념으로 1905년 설립 이래 계속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맞섰다. 1935년부터 8·15해방이 되기까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학교 도서관에 비장할 고서(古書)와 박물관에 진열할 골동품 수집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은 우리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8·15해방이 되던 해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송진우와 함께 보수우익세력의 정당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 수석고문을 지냈으며, 1946년 1월에는 당시 한국민주당의 당수이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맡았다. 정치가로서의 김성수는 민족독립과 민주정치의 구현을 위해 언제나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단결을 추진하는 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여겼다. 1946년 동아일보사 제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해 9월 한국민주당 당수, 19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한 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의 뒤를 이어 1951년 5월 15일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1952년 5월 29일 격렬한 문구로 된 장문의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이승만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송진우와 함께 우익세력의 대표자로서 "공(公)을 무겁게 하고 사(私)를 가볍게 하기를 항상 힘쓰라"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일생의 신조로 삼았다. 1955년 심근염(心筋炎)으로 임종하는 순간까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국자였다. 생전의 그의 공적을 크게 받들어 장엄한 국민장이 거행되어 고려대 뒷산에 안장되었으나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10월 18일 고려대 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어 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