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 류영재 후배에게....계속 이어지며
본문
후배는 기술하기를.. <또한 과학 연구의 성과에 대하여 윤리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은 이미 원폭을 개발한 과학 기술의 등장 이후 줄곧 문제되어왔던 부분입니다. 우리의 과학 기술은 개발한 기술이 가져올 영향력과 함축성들을 미리 예견치 못한채, 가치 중립적인 연구라는 이유로 윤리적 비판을 비껴왔고, 그것이 오늘날 문명에 거대한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윤리를 둘러싼 전반적 사조가 이른바 '부국강병'의 논리로 휩쓸려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세계를 ‘부정의’ 하게 만들어낸 '제국주의의 논리'였음에 눈감으면 안될 것입니다.> 위의 설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언급하는 설명으로 가고 있는지 그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는데.. 과학자는 과학자로서의 활동과 임무를 수행하면 되지 과학자에게 미래학자나 사회학자의 덕목과 지식을 갖추고 그 역활까지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과학은 사용자의 몫으로 남는 거지요.그걸 두려워해서 과학자가 연구를 못하다면 인류는 영원히 낙오할 수 밖에 없고, 미개인으로 남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 생명 과학이 얼마만큼 발달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겨우 태동한 상태에서 황우석 이라는 아주 특출한 분 때문에 갑작스럽게 각광 받고 있을 뿐인데 생명윤리를 둘러싼 전반적 사조가 부국강병의 논리로 간다는 말이 지나친 비약이고 억측이라고 봅니다. 그건 너무 편향된, 편협한 진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논리가 어떻게 제국주의의 논리로 둔갑하는지? 그러면 작금의 생명 윤리를 둘러싼 잡음이 제국주의 논리로 흐르며 그것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제국주의로 후퇴하는 징조와 조짐으로 회귀할까 염려되어서 생명윤리 문제를 곱지 않는 시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부국강병이라는 것이 결코 나쁜 말이 아닙니다. 전세계 모든 국가의 국가 목적은 부국강병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해서 내려온 일관된 국가 목표일 것입니다. 학자들이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부국강병의 논리를 답습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부국강병이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국가가 부유해져 국민총생산이 높아지고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힘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어서 말하기를.. <저는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황박사의 연구에 대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 '적은 돈을 들여서 큰 효과를 얻으면 된다'는 경제성의 원칙과 편리주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데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냐'면서 목적이 좋으면 수단에 문제가 있어도 큰 문제가 안된다는 식과 다름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윤리를 그런 잣대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줘도 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게 생명윤리의 첫 번째 원칙인 ‘악행금지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술했습니다. 무슨 무슨 주의, 무슨 무슨 원칙 ..이런 것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여기서도 짧은 문맥에 동원된 것만도 ..공리주의,경제성 원칙,편리주의,악행금지의 원칙.. 그냥 주의와 원칙이 아주 난무 하군요. 황박사의 연구나 윤리 문제에다가 참으로 많은 것을 같다 붙이면서 억지 춘향격으로 올가미를 씌울려는 기세가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데 영웅을 이렇게 몰아 붙이는 것은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후배의 주장이 설득력이 부족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뭉떵구리식의 이상한 문제점만을 나열해서 일일이 대꾸를 못하겠는데 논점의 이치나 사리에 맞는 올바른 적용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억지 주장이라는 반론을 피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이상으로 재차 답글을 올리지만, 마지막 남은 부분에 대한 답글은 이어서 한꺼번에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 두번 째 단락은 정말 너무 가슴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군요. 후배의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어떤 것인지 반문해 보고 싶어집니다. 본론으로 들어 가보지요. ****************** <저는 우리나라의 지나친 국수주의(사전적 의미는 ‘우리 것만을 우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배타적 보수주의’입니다)에 우려합니다. 이는 지난 4년 동안의 영국생활, 그리고 선진제국의 여러나라 사람들과 교류해 본 후 뒤늦게 깨달은 제 경험에 주로 근거한 것 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것, 우리 문화, 우리 관습, 우리 式, 그리고 우리의 자랑거리 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비우호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형성해서 몰매질을 가하고 반드시 항복선언을 받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주 기이한 민족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저는 오도된 애국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진정한 애국주의는 찬양과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채찍에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에서 한신대의 윤평중 교수가 이 점에 대해 진단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 우리의 국수주의에 대한 답은 고난에 찬 한국 현대사에 있다. 망국과 식민지, 분단과 전쟁의 폐허로부터 일어나 반세기만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약소국 콤플렉스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크고 강한 것, 최초와 최고에 대한 집착은 언뜻 보면 우월의식인 것 같지만 기실 열등감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 물어 봅시다.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어떻게 다른가요?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자기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국수주의가 될 수 있나요? 나는 오히려 우리 민족이 나라 사랑 마음, 즉 애국주의가 약했다고 봅니다. 일본 외상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람을 국수주의로 매도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국수주의를 거론하기 시작했습니까? 영정조 시대 입니까? 아니면 대원군 시대 부터 입니까? 그것은 해방 후 일본이 퇴각하고 일제 식민사관에 젖은 학자들에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아직도 슬프게도 식민사관이 잠복해 있지만, 그나마 어느정도 정리되고 정화된게 불과 몇년 안됩니다.조센징으로 폄하하는 일본인들의 멸시주의에 국력이 커지고 국민 개개인의 능력과 자신감이 생기면서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서양의 것이 앞서고 우리의 것과 문화등 모든것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매도 되었습니다. 그 지대한 공로자는 일본놈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기득권층 일제 시대의 앞잡이들이 남아서 주도했지만요. 왕조시대의 무지랭이 우리 국민들은 사농공상과 양반제도 때문에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제국주의 물결에 손 한번 못쓰고 전 국토를 고스란히 바치고 36년의 세월을 거쳤습니다. 카스라테프트 밀약도 얄타 회담에서 국가의 운명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바보같이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근대화의 열풍과 서구 선진국을 배우자고 얼마나 목청 높여 외치는 사람들 때문에 그동안 발전도 있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습니까? 돈많고 재력있는 집안 자녀들은 시민권 얻어 해외로 나가고 원정 출산까지 하면서 최후의 자기 방어 보루벽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이땅에 사는 대부분의 민초들은 총칼 들고 목숨바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조국을 등지고 비난하고 헐뜯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 것은 뒤떨어지고 부족하고 서구 선진국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가르쳤습니다.오히려 우리 문화와 관습은 열등한 것으로 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우스운 것은 일본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일본의 친절함과 깨끗함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의 단결력을 부러워하고 우리는 일본을 도저히 따라 잡지 못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논조의 글과 책들이 팽배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각있는 학자와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우리를 재조명하고 우리 문화, 우리 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풍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우리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역사를 통해 꺼집어 낸 것입니다.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유무형의 문화 유산을 빼고도 일상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도출해 내었습니다. 한복의 곡선과 풍만함과 자유로움, 한옥의 넓은 개방성과 미닫이 문과의 놀라운 연계성, 우리 담높이에서 구현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눈높이 실현, 온돌방의 열 효율성의 과학성, 특히 김치 문화로 대변되는 발효음식, 된장과 간장의 제조 과정과 그 기간..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서 발현된 선조들의 높은 창조력과 지혜로움의 우수성을 모르고 있었고 서구 문화만 위대하다는 찬양가에 급급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엠비시 사태에서 보듯 전부 지 잘났다고 설치고 남 험담하기 좋아합니다.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그것도 분명 잘못된 분석이지만..왜냐하면 좁은 농경사회에서 비교 대상은 멀지도 않은 사촌들이 시기의 대상에 오른 것입니다. 조상들을 욕하거나 시기를 하면 불효 막급하기에 동급의 사촌이 제격이었고 사돈의 팔촌까지도 넓게 보는 조선 시대의 지역과 거리 개념의 한계성 때문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것이 국민성과 연계 짓는 것은 올바른 분석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후배처럼 항복선언을 받아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일갈하며 기이한 민족성이라고 표현을 합니까? 정말로 후배는 민족성 인식 자체에 언잖은 선입견과 단견성을 노정하고 있군요. 자의적인 섣부른 예단을 그렇게 쉽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럼 그런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 속에 후배는 안 속하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 황교수 지지하는 국민들을 포함되어 있겠군요. 윤평중 교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그 분 말이라면 모든 논란을 잠재울 만큼 권위의 상징성을 대변하는 분입니까? 뭐 별로 대단하지 않는 학자이지만 설사 대단하드래도 그분의 의견을 앞세우면 후배가 논지가 더 강화되고 영향력이 증대 됩니까? TV 토론에서 나와서 저명한 외국학자 거론하는 일부 토론자 특히 어정쩡한 학자들이 즐겨쓴 수법인데 식상해서 진물이 납니다. 이제 그런 언급을 하면 시청자들이 고개를 돌리는 수준이 되어 있으니까요. 또 우월감은 무엇이고, 그 다른 이름 열등감의 현현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를 해야 하지 않나요? 또한 그 말 자체에 대해서도 통렬히 통박하고 싶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