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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주 선배님, 제 의견에 상세히 댓글을 달아 주셔서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아래에서는 선배님의 반론에 대한 전체적인 제 의견을 적어 보았습니다.
제 글 속에서 황박사를 ‘우리시대의 영웅’으로 표현했듯이, 저 역시도 기본적으로 틀림없이 황박사의 업적에 지대한 찬사와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신적 영웅주의’는 늘 경계합니다. 그 보다는 그의 업적에 대해 보다 차분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입장, 필요하다면 비판적 관점도 피력해 보겠다는 입장임을 밝힙니다. 아마 2331번의 제 글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그 문맥 속에, 저는 저의 이러한 입장을 이미 충분히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 글의 어휘채용이나 부분을 침소봉대하시기 보단 전체적인 글의 맥락으로 이해하며 토론을 전개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선배님의 반론을 크게 두가지 논점으로 묶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윤리 문제와 경제 업적주의 등의 문제
최근 EU 대부분의 국가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 캐나다 등의 기업들에서는 이른 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분야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윤리, 환경경영, 인권의 문제 등이 장기적 관점에 보면 기업의 경영성과(매출액과 영업이익 등)와 상당히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장기간의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당수의 글로벌 기업들은 이 윤리의 문제를 선배님의 말씀처럼 경영전략의 일환으로 채용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왜 이윤추구가 목적인 기업들이(사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다라는 주장도 치열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 문제입니다만) 이러한 고리타분한 윤리의 문제에 천착하는가. 이는 회사의 이미지 제고와 대외 신인도를 높임으로써 결국은 기업가치를 제고하려는 경영전략의 일환이라는 선배님의 주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시간은 지체되고 프로세스는 더욱 복잡해질 지언정, 윤리, 도덕, 콤플라이언스 등을 지키는 기업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지속 가능한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는 점 때문 입니다.(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들은 제가 얼마든지 제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배님의 표현대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나이키와 같은 신발 가게’(매출 5조원에 달하는 기업을 가게로 비유한다는 것 역시 적절치는 않습니다만)도 이러한 윤리의 문제에 천착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생명과학의 분야는, 비록 그 사례적 차원에서는 다를 지언정, 더욱 높은 윤리의식과 더욱 정직한 절차가 요구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저는 나이키의 사례를 제시한 것입니다.
경제 업적주의에 관하여는, 저는 그것이 개발독재시대의 전유물이기에 이제는 한물간 것이라는 입장보다는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사회를 이끌어 왔기에 어쩌면 아직도 우리사회의 곳곳에 잔존할지 모를 ‘하면 된다’’안되면 되게하라’라는 가치덕목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해도 안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안되면 하지 않아야 할 일들도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류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위업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일의 추진에는 합의된 규칙과 원칙상의 방법을 위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삶의 신념입니다.
또한 과학 연구의 성과에 대하여 윤리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은 이미 원폭을 개발한 과학 기술의 등장 이후 줄곧 문제되어왔던 부분입니다. 우리의 과학 기술은 개발한 기술이 가져올 영향력과 함축성들을 미리 예견치 못한채, 가치 중립적인 연구라는 이유로 윤리적 비판을 비껴왔고, 그것이 오늘날 문명에 거대한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윤리를 둘러싼 전반적 사조가 이른바 '부국강병'의 논리로 휩쓸려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세계를 ‘부정의’ 하게 만들어낸 '제국주의의 논리'였음에 눈감으면 안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황박사의 연구에 대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 '적은 돈을 들여서 큰 효과를 얻으면 된다'는 경제성의 원칙과 편리주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데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냐'면서 목적이 좋으면 수단에 문제가 있어도 큰 문제가 안된다는 식과 다름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윤리를 그런 잣대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줘도 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게 생명윤리의 첫 번째 원칙인 ‘악행금지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2. 국수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문제
저는 우리나라의 지나친 국수주의(사전적 의미는 ‘우리 것만을 우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배타적 보수주의’입니다)에 우려합니다. 이는 지난 4년 동안의 영국생활, 그리고 선진제국의 여러나라 사람들과 교류해 본 후 뒤늦게 깨달은 제 경험에 주로 근거한 것 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것, 우리 문화, 우리 관습, 우리 式, 그리고 우리의 자랑거리 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비우호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형성해서 몰매질을 가하고 반드시 항복선언을 받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주 기이한 민족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저는 오도된 애국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진정한 애국주의는 찬양과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채찍에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에서 한신대의 윤평중 교수가 이 점에 대해 진단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 우리의 국수주의에 대한 답은 고난에 찬 한국 현대사에 있다. 망국과 식민지, 분단과 전쟁의 폐허로부터 일어나 반세기만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약소국 콤플렉스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크고 강한 것, 최초와 최고에 대한 집착은 언뜻 보면 우월의식인 것 같지만 기실 열등감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
저는 앞서도 언급드렸듯이, 황박사의 위업은 결코 우리만의 자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위업이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여 국익에 이바지하려면 참으로 복잡다단한 과정과 무수한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선진 제국들과의 국제적 협력과 교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 성과일수록 세계적 시각과 사고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학시술의 첨단 분야에는 연구 자체는 물론이고 연구 성과와 관련된 국제경제와 정치의 역학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영역에 있어서도 세련된 외교센스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가 아직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의 선진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대적 약소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협조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국제관계는 국가의 힘이 지배한다는 선배님의 말씀을 고려할 때 이 점은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직 우리나라를 미국과 같은 세계적 강대국과 힘의 측면에서 비교 운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없는 우리나라가 만일 힘을 발휘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절치부심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국제 외교무대에서 치밀하고 유연한 전략과 전술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끼리는 통할지 모르지만, 국제 무대에서 우리 식의 주장을 펼친다고 한들, 들어 주고 호응할 사람은 안타깝지만 찾기 힘듭니다. 그 보다는 국제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합의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기준에 맞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와 관련된 제 주장의 근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