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해외칼럼 김 父子 찬양 행사 관람 간 남한 사람들
| | [해외논조]North Korea`s reality gap | |
관광 버스가 휴경지(休耕地) 한복판 다리에서 정차했다. 그리고 나서 북한 가이드는 약 1마일 가량 떨어진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선 지역을 손으로 가리켰다. 최경진 이라는 이름의 북한 관리는 북한과 남한의 경계인 휴전선 북방에 위치한 이 유서 깊은 도시에 위치한 개성 공단을 설명하며 "여러분들은 저곳에 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눈으로 보는 것만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 돈 커크 |
그는 이어 이미 남한의 5개 기업이 들어선 이 지역에서 외국인들은 접근이 `금지`되어있다고 덧붙였다. 가이드는 또 개성공단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으로서 12개의 남한 기업이 입주해 있다고 설명했다.
北 경제, 당국 제재로 개선 여지 보이지 않아
그러나 개성 공단이 남북한의 장밋빛 미래를 상징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북한 주재 서방 외교관들이나 원조 단체 그리고 북한을 여행하는 남한 방문객들이 느끼는 현실의 격차는 이만 저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제 막 싹이 트기 시작한 경제적 자유에 대해 북한 정권이 예전보다 더 가혹한 방식으로 제재를 가함에 따라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방 관리는 최근 북한이 여러 수단을 동원해 과거보다 더 숨통을 조이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늘어만가는 서방의 무역업자들에 대한 북한 정치 엘리트들의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심리로 규제가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 달에만 해도 북한은 외국인들의 자국 방문을 허가했으며, 남한에서는 일단의 방문객들이 서울에서 특별기를 타고 북한을 방문해 하루 밤을 묵었다. 이들은 모두 해마다 5.1경기장에서 배경대(5만 명)와 체조대(1만5천명)로 나뉘어 현란한 매스게임을 펼치는 아리랑 축전을 관람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아리랑 축전`, 김정일이 희망이라는 이미지 만들기 위한 행사
1만 명에 이르는 남한 사람들이 정부의 허가 하에 남북 화해란 명목으로 이 달 말 폐막되는 이번 행사 참관을 위해 방북 했다. 아리랑 축전은 북한 주민들과 외부인들에게 김정일이 희망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90분 분량 진행되는 아리랑 축전의 매스게임은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와 사회주의 수호를 위한 군인들의 행진 그리고 가축과 트랙터로 가득 찬 푸른 대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축전의 클라이맥스에서 무용수들은 한반도 형상을 만든다. 배경대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주, 평화, 우정이 쓰여진 프랭카드를 들고 이들 문구를 소리 높여 외쳐댄다. 이윽고 비둘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거대한 확성기에서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이 울려 퍼지며 김 부자에 대한 찬양이 줄을 잇는다. 이를 본 남한 관람객들은 마치 통일이나 된 것처럼 푸른 한반도 모습이 그려진 깃발을 미친(madly) 듯이 흔들어댄다. 그러나 이를 본 외국인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북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매스게임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를 지켜본 작가이자 전직 기자인 브래들리 마틴은 "1979년도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북한은 더 상황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 사람들 말대로 친애하는 어버이 수령이 있었던 때라 그런지는 몰라도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는 농기계와 전기 트랙터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게 바뀌어 버린 것 같다"고 언급했다.
활기 없는 개성공단, 북한은 삶이 존재하지 않는 곳
북한주재 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지원단체 소속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정일이 얼마 전 당내에서 가장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보안성 최고책임자를 갈아치운 뒤 내부 단속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휴대전화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강화도 포함됐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의 경우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일반 다이얼 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남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곳 개성에서 본 남한기업들의 공장은 남한의 강력한 산업 시설과 비교해 볼 때 활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이드는 다리 반대편의 텅빈 대지를 가리키며 "이 지역은 호텔과 쇼핑센터가 들어설 자리로 관광 단지가 조설 될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가이드는 "물론 북과 남이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북과 남은 하나의 국가가 될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konas)
필자: 도날드 커크(Donald Kirk), 美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기자 출처: 美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인터넷 리뷰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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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북한 권력 ‘가문의 계승’ | | [뉴스메이커 2005-10-21 10:39] | 포스트 김정일은 누구, ‘후계자 김정철’ 보도에 우리 정부 촉각
올해 1월 27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방송 정론에서 김일성의 1943년 연설 중 “내가 하지 못하면 아들이, 아들이 하지 못하면 손자가…”라는 구절이 언급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후계자 지명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징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특히 금년은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이고, ‘선군정치’를 공표한 지 10주년, 6·15공동선언 5주년 등 그야말로 세 가지 기념일이 겹치는 ‘꺾어지는 해’니까 후계자를 대내외에 공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해석도 제기된 바 있다. 얼마 전에는 영국의 ‘더 타임스’가 당 창건 60주년 기념일인 10월 10일에 김정일이 아들 중 김정철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이라는 보도를 내놨고, 이러한 보도는 국감장에서까지 질의로 제기되어 김승규 국정원장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답함으로써 듣기에 따라서는 김정철의 승계에 우리 정부가 비중을 두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에 입지 굳혀 향후 북한의 후계문제를 점검해보기 위해서는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흔히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광을 업고 후계자가 됐고, 그 이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된 이후부터 끊임없이 권력의 불안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그의 정치적 운명도 사실상 끝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지금도 북한의 최고통치자로서 굳건한 기반 위에 있으며,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나 집단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김정일이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에 의해서만 후계자가 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황장엽 등 고위 탈북자들이 속속 늘면서 알려졌지만,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상당 부분 김정일 자신에 의해 획득된 측면이 강하다. 사실상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1967년 5월 개최된 노동당 4기 15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갑산파를 숙청하면서이다. 갑산파는 1930년대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투쟁을 할 당시 접경지역인 혜산 등지에서 김일성과 연계하여 지하활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 김일성을 결정적으로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알려지게 한 1937년의 보천보 습격사건도 바로 이들의 협조로 가능했다. 이들은 1956년 반(反)김일성 사건인 ‘8월 종파사건’의 주역인 연안계와 소련계 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주도했으며 그 공로로 권력의 탄탄대로를 걷던 인물들. 1967년 당시 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이자 비서인 권력서열 4위 박금철과 5위 리효순 등 고위 간부들은 이 전원회의에서 무자비하게 비판받고 숙청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들을 비판한 사람은 당시 26세의 김정일이었다.
황장엽의 회고에 따르면 1959년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18세인 김정일이 대표단의 관리를 적극적으로 했으며, 어린 김정일은 “완전히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출근길에 나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수집한 이런저런 정보를 건네주었고, 김일성은 이를 다시 확인, 그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안 후부터 김정일의 능력을 신임하게 됐다는 회고도 있다. 요약하면 김정일은 1960년대 후반 갑산파를 숙청하고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했으며, 김일성 가문에 대한 우상화를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1974년 당 정치위원회(지금의 정치국) 위원이 됨으로써 후계자가 되기 위한 공식적인 절차는 사실상 끝났다. 따라서 김정일의 후계구도는 1970년대 초에 완료되었으며, 그후 당을 장악하여 ‘김정일의 당’으로 재편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사무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형식상으로는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으로 보이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보는 북한 체제는 김일성이 구축해놓은 토대 위에 김정일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정일 패밀리가 아닌 사람이 차기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전적으로 김정일 자신이 후계자를 지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권력이 공고화될 수 있도록 조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위대한 장군님’ 자신의 권력이 훼손될 수 있다. 만일 김정일이 이런 선택을 한다면 김정일은 북한을 개혁의 길로 이끌어간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정일은 개혁전도사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권력과 위광을 유지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의 세 아들 중 후계자가 되려면 가장 먼저 김정일의 애정과 관심을 끌고, 젊은 김정일이 그랬듯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김정일이 장악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안전과 존립을 위해 발휘되어야 한다. 만일 잠재적인 후계자가 북한이 처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적 마인드를 갖고 정책을 펴나가려 한다면 그는 후계자에서 멀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후계자의 자질은 김정일 정권의 안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사업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김정일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외부적으로 더 급한 문제 산적 과거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관찰하면서 외부의 관심은 김정일의 등장이 북한의 개혁·개방 또는 시스템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데 모아졌다. 그러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김정일은 자신의 승계과정에서 더욱 더 권력집중적인 체제를 만들어 나갔고, 국가운영 방식 역시 지도자의 역할을 강화하고 신비화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따라서 새로운 후계자가 나온다고 해서 북한의 정책방향이나 정치체제상의 변화가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함해서 외부의 관심은 누가, 언제 후계자가 될 것이냐에 쏠려 있다. 한 번쯤 언급의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에 대해 언론이든, 학계든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누가 되든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혁명위업’을 달성하려고 할 텐데 후계자 선정의 타이밍을 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북한은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당 창건 60주년이지만 이 행사를 거창하게 할 형편도 되지 못한다. 경제난은 다소 완화된 듯 보이지만 내실은 나아진 게 별반 없다.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로 눈치빠른 일부 사람들은 상행위를 통해 돈을 벌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민들은 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전언이다. 김정일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감정도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한 고위 탈북자는 누구든지 나서서 김정일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그는 아마도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북핵문제도 김정일의 목을 죄고 있는 악재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내심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바라고 있다. 그런 상황이니 김정일 정권은 개혁·개방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 꼭 미국 때문은 아니지만 안팎의 상황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에게 지금 후계구도는 급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 아들들 중 누군가가 1960년대의 김정일과 같이 아버지로부터 후계자의 자리를 능동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 한 김정일 스스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준비할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한의 후계구도를 보는 관전 포인트는 북한이 처한 대내외 상황이 얼마나 호전되는가, 이를 위해 김정일이 어떤 정책적 선택을 할 것인가에 있지, 누가, 언제 되느냐는 아니다. 유길재〈경남대 교수·극동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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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2005 평양'의 이모저모 ① 사람냄새 없는 '혁명의 수도' | [2005-10-21 19:26] | | ▲ 평양 도착하기 직전 찍은 평양 외곽지역 사진, 산에 나무가 없다 |
| 요즘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고 있다.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고 온 남한 사람들도 이미 수 천명에 이른다. 평양에 다녀온 사람도 그만큼 많이 늘었다.
북한당국은 평양을 이른바 '혁명의 수도'로 부른다. 이 때문에 평양의 시가는 깨끗하다. 또 '깨끗해야만' 한다. 혁명의 수도가 외국인에게 지저분하게 보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평양 주민들은 아침마다 자기 집 앞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평양에는 선택받은 주민들만 살 수 있다. 당 군 내각 전반에 걸쳐 주요부서에 근무하는 주민들과 가족들이 산다. 평양에 산다는 사실 하나로도 주민에겐 영광이고 '장군님의 은혜'다.
도시가 깨끗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89년 평양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 중심구역에 사는 장애인들이나 '흉하게 보이는' 주민들마저 모두 외곽지역으로 보낸 사실을 알면 입맛이 쓸 것이다. 평양은 한마디로 '보여주기' 위한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유럽 관광객들은 평양을 '사람냄새가 없는 무채색의 도시'로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 아리랑 공연으로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평양의 최근 이모저모를 3회에 걸쳐 사진으로 엮어본다.
평양 순안 공항 ->평양 거리 -> 개선문 -> 만경대 학생 소년 궁전
| ▲공항 상점에서 북한술을 비롯한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다 |
| ▲평양거리의 김일성화 |
| ▲당창건 60돌 기념구호가 적힌 구호판 |
| ▲평양의 경찰과 경찰차 |
| ▲공사가 중지된 유경호텔, 꼭대기에 크레인이 방치되어 있다 |
인민대학습당 | 평양시 중구역 남문동 남산재에 위치하고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지난 79년 12월 2일 착공, 82년 4월 4일 개관된 "주체사상교양, 과학기술.문화 지식 보급의 중심기지"로 근로자들의 통신종합대학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연건축면적 10만평방m, 높이 63m, 너비 1백50m, 길이 1백90m에 이르는 10층 건물로 내부에는 6백여개의 방과 6천6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 좌서과 회의실.강의실.문답실.음악감살실.서고 등이 있다. |
| ▲멀리 보이는 인민대학습당 |
개선문
| 모란봉구역, 김일성경기장 옆. 김일성 70회생일(1982년)을 맞아 건설, 문 왼편 기둥에 1925, 오른편에 1945가 써져 있는데, 김일성이 1925년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45년에 개선했다는 의미이다. |
| ▲개선문 세부모습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 등 각지 학생소년궁전에서는 지난 10년간 수백만명의 청소년 학생들로 소조를 운영함으로써 과학자,예술인,체육인 후비들을 키워내는데 적극 기여 했다. |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내부 김일성의 지시가 적힌 액자 |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전경 |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소조 공연 |
김용훈 기자 kyh@dailynk.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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