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우혜]황실용어 제대로 쓰자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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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송우혜]황실용어 제대로 쓰자
현재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과거 문화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성(京城)’이라는 지명은 ‘수도인 성’이란 뜻으로서 조선조 개국 초기에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쌓던 때부터 이미 관용적으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수천 번 등장한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에게 이순신의 출신 지역을 물을 때 “그는 경성 사람인가?”(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라고 물었던 것이 바로 그런 사례들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많은 국민이 ‘경성’은 일제 강점 이후에 쓰였던 왜색 잔재에 불과한 지명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남대문’ ‘동대문’ 등도 비슷한 경우로 태조 때부터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이칭(異稱)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당시 실록을 통해 확인되는데도 엉뚱하게 왜색 잔재로 오해받고 있다.
최근 대한제국 황실의 적계로서는 마지막 혈손인 이구(李玖) 씨가 별세했다. 최후의 전통적 황실 장례식으로 치러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조선조 500년 왕조문화 마지막 잔영이 애잔하게 스러지는 감회를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전통문화의 왜곡이 있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가리켜 ‘황세손(皇世孫)’이라 칭했고 이에 따라 각종 보도 매체들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황통을 이어받았을 그의 신분을 바르게 드러내려면 ‘황태손(皇太孫) 이구’라고 써야 했다. 황실의 황위(皇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태(太)’자를 쓰고, 왕실의 왕위(王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세(世)’자를 쓰는 게 법도다. 그래서 황제의 아들은 황태자(皇太子)이고 황태자의 아들은 황태손(皇太孫)이지만 왕의 아들은 왕세자(王世子)이고 왕세자의 아들은 왕세손(王世孫)이다.
실제로 대한제국 시대에 ‘황태손’이란 칭호를 공식 사용했다. 고종이 통치하던 광무 7년(1903)에 궁내부 안에 ‘황태손 강서원(皇太孫 講書院)’을 설치하여 12명의 관리를 배치했던 것이다(고종실록 고종 40년 12월 6일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이구 씨의 부친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 씨에 대한 호칭에서도 이미 오류를 범했다.
이은 씨는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에 태어났기에 처음부터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다. 왕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왕’에게는 친왕(親王)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은 씨는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여준 이름이 ‘영(英)’이라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고종 황제가 내린 조서나 각종 제도 등에 모두 ‘영친왕’이란 왕호를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1907년에 친왕보다 격이 높은 황태자로 책봉되자 영친왕이란 왕호(王號)가 공식 폐지되었다(순종실록 순종 1년 8월 24일조 참조).
그런데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측은 “이은 씨는 ‘영왕’으로 책봉되었으며 영친왕이란 표현은 일본 황실이 예우의 명목으로 붙인 것”(‘선원세계’)이라는 사실이 아닌 주장을 계속하며 ‘영왕 이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도 바르게 고쳐야 한다.
송우혜 소설가
현재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과거 문화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성(京城)’이라는 지명은 ‘수도인 성’이란 뜻으로서 조선조 개국 초기에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쌓던 때부터 이미 관용적으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수천 번 등장한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에게 이순신의 출신 지역을 물을 때 “그는 경성 사람인가?”(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라고 물었던 것이 바로 그런 사례들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많은 국민이 ‘경성’은 일제 강점 이후에 쓰였던 왜색 잔재에 불과한 지명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남대문’ ‘동대문’ 등도 비슷한 경우로 태조 때부터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이칭(異稱)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당시 실록을 통해 확인되는데도 엉뚱하게 왜색 잔재로 오해받고 있다.
최근 대한제국 황실의 적계로서는 마지막 혈손인 이구(李玖) 씨가 별세했다. 최후의 전통적 황실 장례식으로 치러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조선조 500년 왕조문화 마지막 잔영이 애잔하게 스러지는 감회를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전통문화의 왜곡이 있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가리켜 ‘황세손(皇世孫)’이라 칭했고 이에 따라 각종 보도 매체들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황통을 이어받았을 그의 신분을 바르게 드러내려면 ‘황태손(皇太孫) 이구’라고 써야 했다. 황실의 황위(皇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태(太)’자를 쓰고, 왕실의 왕위(王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세(世)’자를 쓰는 게 법도다. 그래서 황제의 아들은 황태자(皇太子)이고 황태자의 아들은 황태손(皇太孫)이지만 왕의 아들은 왕세자(王世子)이고 왕세자의 아들은 왕세손(王世孫)이다.
실제로 대한제국 시대에 ‘황태손’이란 칭호를 공식 사용했다. 고종이 통치하던 광무 7년(1903)에 궁내부 안에 ‘황태손 강서원(皇太孫 講書院)’을 설치하여 12명의 관리를 배치했던 것이다(고종실록 고종 40년 12월 6일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이구 씨의 부친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 씨에 대한 호칭에서도 이미 오류를 범했다.
이은 씨는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에 태어났기에 처음부터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다. 왕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왕’에게는 친왕(親王)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은 씨는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여준 이름이 ‘영(英)’이라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고종 황제가 내린 조서나 각종 제도 등에 모두 ‘영친왕’이란 왕호를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1907년에 친왕보다 격이 높은 황태자로 책봉되자 영친왕이란 왕호(王號)가 공식 폐지되었다(순종실록 순종 1년 8월 24일조 참조).
송우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