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 지하에 보물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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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친선전람관'에서 2km 지점, 지하 1백m에 건설 | ||
탈북자 출신의 기자가 쓴 이 기사에 따르면 이 보물궁전은 김일성 사망 이후 3개 공병여단이 투입돼 건설됐다. 3년여에 걸쳐 완공된 이 궁전의 벽과 바닥장식은 모두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장식됐고 각종 집기들도 일제나 이태리제 등 최고급이라고 데일리NK는 보도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
그런데,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인근에 각종 보물, 선물들을 따로 모아둔 '지하 보물궁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보물궁전'은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된 선물들이 유사시 파괴될 우려하여 선물 대피장소용으로 건설되었다. 또 아주 귀중한 보물들은 전시하지 않고 별도로 보관하기 위한 만든 은밀한 곳이다. 지하 1백m 아래에 있는 은밀한 곳이기 때문에 따로 명칭도 없고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만 안다. 김정일은 지하 '보물궁전'을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 만들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향산군과 평안남도 녕원군 경계에 있고, 지하 '보물궁전'은 국제친선전람관에서 향산군 향암리 방향으로 약 2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다. ‘속도전’으로 건설된 최고급 지하궁전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은 공병국 3개 여단을 투입하여 묘향산 향암리에 땅굴을 파고 이곳을 꾸렸다. 1994~1997년까지 북한은 3백만명이 굶어죽는 대아사 시기였다.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탈북자 김기영(가명)의 증언에 의하면 군인들은 깡보리밥에 염장무를 먹으며 힘들게 공사를 진행했다. 지하 1백m를 뚫고 들어가 억수로 쏟아지는 석수와 싸우며 한치한치 착암기와 정으로 뚫고 들어가는 이 공사에서만도 3백여 명이 죽고 수백명의 불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군인들은 영양실조에 허덕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유사시 핵폭탄이나 자연재해(지진, 침수)에도 걱정없이 든든하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최상급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건설자재는 최상급으로 쓰면서도 건설군인들에게는 보리밥을 먹이고 빠른 시일내에 총돌격전으로 공사를 끝내라고 장교들에게 지시했다. 근 3년에 걸쳐 공사를 완공했는데 벽과 바닥 장식은 모두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장식하고 홀과 복도바닥은 외국에서 사온 진귀한 여러가지 색깔로 된 옥돌을 깔아 그야말로 최고급으로 건설했다. 문손잡이와 대문짝, 테이블과 걸상들도 모두 일제로 사들여 왔다. 1단계 공사는 56여단이 진행했다. 1단계 공사가 끝나고 56여단은 철수했다. 내부 장식과 마무리 작업은 공병국1여단에 맡겼다. 공병국1여단은 김일성 김정일 별장 등을 짓는 이른바 특수건설을 전문적으로 맡는 부대이다. 여단장 자체가 중장(별 둘)이고 다른 부대에 비하여 공급도 잘되고 노동당 입당도 가장 많다. 김정일은 "1여단은 나의 부대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신임이 대단히 컸다. 남한에 와서 코엑스 전시회를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자본주의 나라에서 그 정도 공사를 한다면 어림잡아도 수천만 달러는 들어가는 공사였을 것이다. 김정일은 완공된 다음 지하 전람관을 돌아보고, 공사를 잘했다고 치하하고 국가수훈도 해주었다. 북한에서 공사가 큰가. 작은가 하는 것은 그 공사에서 영웅이 몇 명 나왔는가 하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 공사에서 영웅이 무려 수십명이 나왔다. 공사가 완공되고 얼마 후 수많은 수송차(box car)들이 선물을 싣고 꼬리를 물고 묘향산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하여 평양과 묘향산에 산재하던 김부자의 선물들이 대부분 지하궁전으로 진열됐다. 김정일은 "위대한 수령님의 한평생이 어려 있고, 위대성의 산 증거인 선물은 만년대계로 지켜가야 할 국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상 전쟁의 우려도 있고 김일성 사망과 더불어 이른바 '곁가지'들이 선물을 넘볼까봐 몰래 지하에다 감추었다는 것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이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입국)hyj@dailynk.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