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 선생 강건한 필치·기개 '어록비'로 부활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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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 선생 강건한 필치·기개 '어록비'로 부활
목천 독립기념관 본관 건물과 뒤쪽 흑성산 사이에 있는 초록 뜰에 21일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1888~1939)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어른 키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에, 좌대가 중간부터 밑을 받치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였으며 6년 동안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부드럽고 강건한 필치의 논설을 펼친 유명 언론인이었다.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正義) 인도(人道)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1919·‘다시(又) 독립선언서’ 중)
독립운동가들의 어록비가 숲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까지 85인의 애국 문장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호암 선생의 어록비 부근에는 민필호, 조소앙, 이동휘, 김마리아 같은 쟁쟁한 인사들의 비(碑)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독립기념관 관내에 ‘105인 계단’의 오른쪽, 제4전시관 뒤에 비림(碑林) 공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와 중국에서 활약하셨던 독립운동가들을 가운데에 모시고 있습니다.”(조범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독립기념관 어록비는 남자는 독립장 이상, 여성은 애국장 이상을 받은 독립운동가에게 자격이 주어지며 글과 활동내용 등을 어록비 심의위원회에서 검토한다. 호암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2003년 5월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으나 1920~30년대의 민족 지식인들이 가졌던 활동 범위와 세계관은 해방 후 후손들이 펼쳐보인 지평보다 훨씬 너르고 광활했다. 호암이 ‘다시(又) 독립선언서’(애원서)에서 말한 ‘정의’와 ‘인도’는 그해 파리 평화회의의 베르사유 조약(1919)에서 내건 이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호암은 32세 때인 1919년 3월 보신각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 ‘애원서’를 낭독하고,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호암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가 민족문화를 일깨우는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것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일하면서부터다. 그 중심인물이 조선일보 사장 계초 방응모와 호흡을 맞춘 호암 문일평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역사로 본 조선’, ‘대미관계 50년사’ 연재를 비롯해 총 400편의 글을 통해 조선학을 일구었다. 이 글들은 곧 문화운동이요 민족운동이었다.
호암의 2남3녀 중 딸 소영(小英)씨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잡지 ‘여성(女性)’에 기고하기도 했으며, 아들 동표(東彪)씨는 해방 후 조선일보 편집국장(1947~1949)을 지냈다.
독립기념관에 호암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지던 날, 초등학생을 태운 관광버스 수십 대가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다른 어록비들과는 달리 일절 기념행사는 없었고, 간단한 제막식도 보이지 않았다. 호암 선생의 외손녀인 이선영, 이의영, 이계영, 이채영 4자매가 성년이 된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어록비가 세워지는 모습을 간소하게 지켜보았다.
독립운동가·민족사학자 이자 本社고문 지낸 호암 선생
목천 독립기념관 85인 애국문장 옆에 새겨져
신간회·조선물산장려회 참여… 옥고 치르기도
목천 독립기념관 85인 애국문장 옆에 새겨져
신간회·조선물산장려회 참여… 옥고 치르기도
입력 : 2005.06.23 18:52 21' / 수정 : 2005.06.24 05:31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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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였으며 6년 동안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부드럽고 강건한 필치의 논설을 펼친 유명 언론인이었다.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正義) 인도(人道)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1919·‘다시(又) 독립선언서’ 중)
독립운동가들의 어록비가 숲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까지 85인의 애국 문장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호암 선생의 어록비 부근에는 민필호, 조소앙, 이동휘, 김마리아 같은 쟁쟁한 인사들의 비(碑)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독립기념관 관내에 ‘105인 계단’의 오른쪽, 제4전시관 뒤에 비림(碑林) 공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와 중국에서 활약하셨던 독립운동가들을 가운데에 모시고 있습니다.”(조범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독립기념관 어록비는 남자는 독립장 이상, 여성은 애국장 이상을 받은 독립운동가에게 자격이 주어지며 글과 활동내용 등을 어록비 심의위원회에서 검토한다. 호암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2003년 5월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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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은 32세 때인 1919년 3월 보신각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 ‘애원서’를 낭독하고,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호암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가 민족문화를 일깨우는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것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일하면서부터다. 그 중심인물이 조선일보 사장 계초 방응모와 호흡을 맞춘 호암 문일평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역사로 본 조선’, ‘대미관계 50년사’ 연재를 비롯해 총 400편의 글을 통해 조선학을 일구었다. 이 글들은 곧 문화운동이요 민족운동이었다.
호암의 2남3녀 중 딸 소영(小英)씨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잡지 ‘여성(女性)’에 기고하기도 했으며, 아들 동표(東彪)씨는 해방 후 조선일보 편집국장(1947~1949)을 지냈다.
독립기념관에 호암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지던 날, 초등학생을 태운 관광버스 수십 대가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다른 어록비들과는 달리 일절 기념행사는 없었고, 간단한 제막식도 보이지 않았다. 호암 선생의 외손녀인 이선영, 이의영, 이계영, 이채영 4자매가 성년이 된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어록비가 세워지는 모습을 간소하게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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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선생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중앙고보에 재직하셨으며, 2003년 제16회 '자랑스러운 중앙인'으로 선정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