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현 정부의 '돌지 않는' 맷돌-62회 양봉진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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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현 정부의 '돌지 않는' 맷돌
'어처구니'는 순수 우리말로 맷돌 돌리는 손잡이를 말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은 '죽은 맷돌'이다. 맷돌이 지닌 상징성의 가치는 맷돌의 이분법적 구조에 있다. 윗돌과 아랫돌은 상과 하, 좌와 우, 여와 야, 이상과 현실, 정부와 기업 등으로 묘사될 수 있다. 맷돌은 이 같은 갈등구도를 균형과 조화로 극복해가는 우리들의 생활 단면을 대변하고 있다.
'어처구니'는 바로 이 같은 갈등구도가 지닌 내재적 에너지를 새로운 가치창출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처구니'는 지리멸렬하게 분열된 국민과 나라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에너지를 용출시켜 줄 지도력과 동의어로 쓰여도 무방할지 모른다.
맷돌은 큰 맷돌도 있고 작은 맷돌도 있다. 그 크기에 따라 '어처구니' 크기 또한 달라져야 한다. 정부가 추진한 'S프로젝트' 같은 것은 수조원이 들어가는 대형 맷돌에 해당한다. 그런 맷돌에 '호남산(湖南産) 어처구니'라는 이유 때문에 '엉뚱한' 어처구니를 들이대니 맷돌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어처구니는 그 모양새도 가지가지다. 유전개발이라는 맷돌에는 '산자부'라는 '어처구니'가 제격이다. 그러나 응당 쓰여야 할 '규격' 어처구니를 제쳐 놓고 자주 쓰던 '손 익은' 어처구니라는 이유 때문에 '잘못된' 어처구니를 들이대니 '탈선한' 철도청과 '눈 속에 얼어버린' 시베리아 유전열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행담도 개발은 S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는 개별 민간 프로젝트였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런 민간 프로젝트에 '동북아위원회'라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금장식이 새겨진 어처구니를 들이대는 것은 "닭 잡으려고 도끼를 드는" 격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노무현 정부의 '돌지 않는' 맷돌이 '어처구니 선택'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위아래로 균형이 잘 잡혀 있어야 할 맷돌 자체가 한쪽으로 치우친 가분수이거나 아예 돌이 하나밖에 없는 '외돌' 맷돌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지적이 많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념적 목표는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맷돌을 '돌 수 없는 외돌 맷돌'로 만드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이념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 초기에 신중한 검토 없이 내건 목표였다. 왜냐하면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적'이라는 단어가 수식어로 쓰이게 되면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제한하는 논리적 모순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했던지 김대중 정부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간판을 내리고 슬그머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슬로건으로 바꾸어 걸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국민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게 됐으며 우리 사회의 이념을 규정짓는 중심 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같은 배경을 무시하고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느닷없이 '민주적 시장경제'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맷돌의 아랫돌에 해당하는 민주주의와 맷돌의 윗돌에 해당하는 (자유)시장경제를 하나로 묶어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 발상은 우리의 이념체계를 '돌 수 없는 외돌 맷돌'로 만들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싫든 좋든 박정희 개발독재는 '배고픔'을 해결했다. 그 기반 위에 서 있는 노무현 정부는 이제 '배 아픈 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위.아랫돌을 묶어버려 맷돌 자체가 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면 배 아픈 병 치료는커녕 배고픈 시절로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처구니 없는' 맷돌처럼 정지해 있다. '죽은 맷돌'을 다시 돌게 하려면 위.아랫돌, 그리고 '어처구니'가 균형을 이루며 제대로 된 삼중주를 연주할 때만 가능하다.
양봉진 세종대 교수·경영학
▶ 양봉진 세종대 교수·경영학 |
'어처구니'는 바로 이 같은 갈등구도가 지닌 내재적 에너지를 새로운 가치창출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처구니'는 지리멸렬하게 분열된 국민과 나라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에너지를 용출시켜 줄 지도력과 동의어로 쓰여도 무방할지 모른다.
맷돌은 큰 맷돌도 있고 작은 맷돌도 있다. 그 크기에 따라 '어처구니' 크기 또한 달라져야 한다. 정부가 추진한 'S프로젝트' 같은 것은 수조원이 들어가는 대형 맷돌에 해당한다. 그런 맷돌에 '호남산(湖南産) 어처구니'라는 이유 때문에 '엉뚱한' 어처구니를 들이대니 맷돌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어처구니는 그 모양새도 가지가지다. 유전개발이라는 맷돌에는 '산자부'라는 '어처구니'가 제격이다. 그러나 응당 쓰여야 할 '규격' 어처구니를 제쳐 놓고 자주 쓰던 '손 익은' 어처구니라는 이유 때문에 '잘못된' 어처구니를 들이대니 '탈선한' 철도청과 '눈 속에 얼어버린' 시베리아 유전열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행담도 개발은 S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는 개별 민간 프로젝트였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런 민간 프로젝트에 '동북아위원회'라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금장식이 새겨진 어처구니를 들이대는 것은 "닭 잡으려고 도끼를 드는" 격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노무현 정부의 '돌지 않는' 맷돌이 '어처구니 선택'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위아래로 균형이 잘 잡혀 있어야 할 맷돌 자체가 한쪽으로 치우친 가분수이거나 아예 돌이 하나밖에 없는 '외돌' 맷돌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지적이 많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념적 목표는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맷돌을 '돌 수 없는 외돌 맷돌'로 만드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이념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 초기에 신중한 검토 없이 내건 목표였다. 왜냐하면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적'이라는 단어가 수식어로 쓰이게 되면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제한하는 논리적 모순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했던지 김대중 정부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간판을 내리고 슬그머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슬로건으로 바꾸어 걸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국민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게 됐으며 우리 사회의 이념을 규정짓는 중심 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같은 배경을 무시하고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느닷없이 '민주적 시장경제'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맷돌의 아랫돌에 해당하는 민주주의와 맷돌의 윗돌에 해당하는 (자유)시장경제를 하나로 묶어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 발상은 우리의 이념체계를 '돌 수 없는 외돌 맷돌'로 만들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싫든 좋든 박정희 개발독재는 '배고픔'을 해결했다. 그 기반 위에 서 있는 노무현 정부는 이제 '배 아픈 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위.아랫돌을 묶어버려 맷돌 자체가 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면 배 아픈 병 치료는커녕 배고픈 시절로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처구니 없는' 맷돌처럼 정지해 있다. '죽은 맷돌'을 다시 돌게 하려면 위.아랫돌, 그리고 '어처구니'가 균형을 이루며 제대로 된 삼중주를 연주할 때만 가능하다.
양봉진 세종대 교수·경영학
2005.06.06 20:38 입력 / 2005.06.07 05:2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