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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등학교 사료 모집을 한다던데,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유홍 (1916년 중앙학교 입학)
1899~1988, 제2,4,6대 국회의원 증언
= 1984년 4월23일 최시중씨 녹음
◆ 인절미에 담긴 민족혼
인촌선생님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나는 18살 먹던 해 1916년 4월에 중앙학교에 들어갔다. 교장이 유근 선생이었다. 그런데 조그만 사람이 무명 옷을 입고 학교 운동장에서 왔다갔다 했다. 처음엔 뭐하는 사람인가 했는데, 그 사람이 인촌이었다.
학교에 들어간지 한달도 안돼 저녁 때 인촌선생이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 양반이 묵는 집에서 나하고 대여섯명 불러서 신입생들을 대접했다. 방에서 인촌은 뒤에 가만히 앉았고, 이중화 선생, 안재홍 선생, 이강현선생 등 등 4-5인의 선생님들이 앉아계셨다. 인촌은 별 말씀 안하시고, 안재홍 선생이 말을 많이했다.
대화는 “너는 성이 뭐냐, 집이 어디냐, 어디 학교 졸업하고 여기 왔냐”처럼 가족들하고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음식을 한 상을 차려줬는데 돌아갈 때 한지에다가 인절미, 대추, 밤, 곶감 등등을 싸주셨다. 그 때 어릴 적에 시골서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과자를 죽 놓고서 엽차 다려놓고서 먹는 것은 겪어봤어도, 이런 일은 서울와서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제사지낼 때나 식혜 대추 이런 것 먹어봤지만,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접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교생이 다 이런 대접을 받았다. 받을 때는 뭔지 잘 몰랐는데, 나올 때는 이게 민족혼이구나 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다른 데에서 과자나 사탕을 주는 것을 받아보기는 했어도, 한지에 인절미 대추 이런 거 싸주는 걸 보고 그 때 받은 인상은 기가 막혔다. 이 때만해도 왜놈이 차지한지 얼마 안될 때(1916년)였다. 인촌 댁에 가서 이런 대접을 받고 나온 학생들은 마음가짐이 확 달라졌다.
- 그 당시는 나이 18세였다. 당시 학생들은 서당다니다 시골 사립학교 다니다가 서울 올라왔으니까 나이들이 많았다. 인촌은 과묵한 양반이다. 좌중에서 별 말씀 없으시다가 이따금씩 “그래, 너 예쁘다”같은 칭찬하는 말씀만 하셨다. 나무라는 말은 한번도 못들었다. 자제분들에게는 엄하셨지만, 보통 때는 말씀이 적으셨다.
- 처음엔 학생들이 인촌선생님을 잘 몰랐다. 교주인지도 몰랐다. 중앙학교는 내가 시골에서 학교다닐 때 그 학교 선생이 윤치영씨와 같이 졸업한 이용창씨라고 하는 분이셨다. 그 분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중앙학교가 사립학교라서 돈은 없지만 사상도 좋고, 누군가 새주인이 나타나서 학교 잘 될거라는 말은 들었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아침 조회훈시
중앙학교의 뒷담은 제일고등보통학교와 연결돼 있었다. 제일고보에서는 중앙을 ‘똥통학교’라고 불렀다. 나는 당시 친척집에서 밥 얻어먹고 다녔는데. 친적집 자녀들은 여자는 경기고녀, 남자는 제일고보를 다녔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내가 중앙학교를 다니니까 ‘똥통학교’ 그만 다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학교를 막상 다녀보니까 “어, 이 학교가 더 나은 것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선생님들이 1,2,3학년 전교생을 모아놓고 훈시를 한다. 대개 다른 선생들이 다 한마디씩 하지만, 인촌은 여간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다. 말은 대부분 안재홍씨가 했다. 안재홍씨는 조회시간에 순전히 민족혼 이야기만 했다. 단군할아버지, 백제, 고려 이야기, 신라의 청년들 이야기 등 옛 역사 고담을 섞은 사상적 선전을 했다. 그걸 매일 하루에 한마디씩 했다. 당시로서는 못할 소리였다. 안선생은 말씀하시는 자신도 저절로 격해서 선을 넘는 말씀을 했다. 이런 말씀(민족적 내용의 훈시)을 매일 한학기 듣고 나니까 “그까짓 똥통학교 왜 다니니? 올해 다니다가 내년에 시험봐서 다른 학교 가라”는 친척형들의 말에 반발이 생겼다.
그래서 “야, 이놈들아 너들이 잘되나, 내가 잘되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가서 선생을 만나면 그야말로 성스러운 스승을 만난 것 같았다. 서당에서 하늘천 따지 가르치는 선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두들 성스러워 보였다. 그 당시에는 그 분 하나하나가 누군지는 잘 몰랐던 상태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류근 선생은 황성신문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쓴 사람(장지연)하고 같이 사설쓰던 양반이고, 이강현선생은 한국에서 광목을 처음 짜서 광목을 판 양반이고, 게다가 인촌, 안재홍, 현상윤, 송진우, 최두선(최남선의 동생) 등등 뭐 기가막힌 선생들이다. 그 때 인촌이 중앙학교에 선생들로 집결한 인물들은 건국 내각의 인물보다 훨씬 뛰어났다. 초대 내각보다도 더 뛰어났다. 일류 사상가들이고 애국자들로만 선생으로 모셨다. 그런 분들이 매일 아침에 전교생을 집합시켜서 일장 훈시를 했다. 유근(황성신문 주필, 한학자),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형(한글학자), 권택규(동아일보에 ‘假名人頭上에 일봉이라’란 글을 썼다), 송진우, 최두선, 이강현, 현상윤, 안재홍, 조철호 선생….
매일 아침이면 전교생을 집합시켜 놓고 일장 훈시하는데, 그 내용은 민족주의적 얼과 배일사상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저 북쪽에는 백두산이 서서 있고, 오대산 산맥이 흘러내러가고, 제주도 끄트머리에는 한라산이 솟아 있지 않나. 앞으로는 한강이 흘러간다.’ 허, 말 잘하지. 말이 원체 웅대하고 직선적이었다. “왜 독립선언을 못하느냐. 언제 우리가 누구 말듣고 살았나. 당당히 우리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 않느냐.”면서 수신(修身)시간에 말씀하신다.
기당 현상윤도 그렇다. “왜 우리가 합방에 동의했니? 저들끼리 임금을 억압해서 빼앗아갔지. 그러니까 우리 의사를 들어보소하고, 우리가 민족대회를 열어보겠다는 것이 뭐가 나쁘냐. 뭐가 무서우냐.” 기당은 1919년 3월1일 전날 밤에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날 선생님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 때가 바로 3.1독립선언 뽑고 그럴 때였다.
- 인촌은 무슨 말씀 하셨나.
- 가끔하지. 인촌은 “공부들 잘해라. 우리 민족은 반드시 꽃 필 시절이 오느니라. 우리 학교는 웅원하다. 용견, 성신하라. 지금 안된다고 겁내지 말고, 내가 못하면 내아들, 손자, 증손자가 하고, 1년이 안되면 10년, 50년, 100년, 유태사람은 2000년까지 끌고 온다. 그래도 중단하면 안된다.” 그런 말씀을 가끔하셨다. 가끔하셔.
그런데 그 훈시한 가운데 전체를 잘 보고 해석하면 전부 ‘민족주의’ 선전이다. 조선의 얼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이다. 정신을 잃어버리면 잡아먹힌다. 웅원한 이상을 갖고, 얼을 빼앗기지 마라. 그 때는 우습게 들었다. 그런데 두고두고 민족혼, 민족의 얼을 생각하니까 결국은 배일사상이 일어나더라. 저절로 배일사상이 생겨난다. 배일하라는 말을 겉으로 하지 않아도, 민족주의 얼을 잃지 말라는 훈시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배일사상이 나타난다. 중앙학교가 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 이유가 거기 있다. 그게 교육의 힘이다. 중앙학교 출신들은 야당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여당을 하는가, 야당을 하지.
◆한글 수업
당시 교과서는 전부 일본어로 돼 있었다. 한국말 교과서는 우리말 독본(주시경 선생이 만든 것), 한문교과서를 빼놓고는 전부 일본어 교과서다. ‘修身’은 책보다는 말로 많이 했다. 수신은 인촌하고 고하가 많이 가르쳤다. 수신을 할 때는 “말이 중요하지, 책은 다 소용없어”하면서 한국말로 가르쳤다. 그 밖의 산수, 역사, 지리 등 전부 교과서는 일본어인데, 말은 일본어지만 가르치기는 전부 한국말로 가르쳤다. ‘국어사용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에서도 한국말로 가르쳤다. 일본놈 시학관이 들어오면 가끔 하는 척 했지만, 수학선생도 전부 한국말로 가르쳤다. 대부분 학생들이 일본말 할 줄도 몰랐다. 일어 선생이 왜놈이 스파이라는 말이 있었는데도, 원체 선생님들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더라. 그래서 중앙학교 출신들이 우국지사고, 학교선생들 전체가 우국지사다. 교육 받은 학생들도 구국운동에 나섰다. ‘웅원’은 하루아침에 독립이 오는 것이 아니다.
인촌이 수신시간에 ‘웅원, 용견, 성신’의 교지를 많이 이야기했다. 교지는 고하, 류근 선생도 많이 말씀하셨다.
◆ ‘헌집 새빛’
1916년 5월 교문 앞에 ‘헌집 새빛’이란 간판을 달았다. 그리고 학교에 잔치를 했다. 그 잔치는 인촌이 인수 후 큰 기념식을 하는 것이다. ‘헌집 새빛’이란 ‘그 학교 망할 적에 새 빛이 왔으니 헌집 새빛이요’, 다른 의미로는 ‘우리민족이 헌집이 무너졌지만 새빛(독립)이 온다’는 의미 아닌가. 크게 보면 장래로 봐서는 ‘헌집 새빛’이고, 작게 보면 ‘헌집에 새빛이 비쳐서 학교 확장한다는 뜻이다. 적게 봐서는 중앙학교를 견준 것이고, 크게 봐서는 조선의 독립을 견준 것이다.
그날 잔치는 환등기로 활동사진도 보고, 한창차려서 아이들과 학부형도 먹으면서 성스럽게 진행됐다. 환등기에는 인촌이 취임하고, 선생들이 강의하는 것 같은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다. 환하게 카바이트 불을 켜고 놀았다.
인촌이 취임한다는 기념식인데 ‘헌집 새빛’이란 것은 적게 봐서는 중앙학교, 크게 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뜻이었다. 그 때 선생들을 보니 선생들이 아니고 민족의 구세주로 보이더라. 내 생각이 그랬다.
학교에 들어가서 인촌선생에게 배운 것이 많이 깨달았다. 인촌은 평범하고 무언, 무소, 침착한 선비로 보였다. 말이 없고 함부로 웃지 않는다. 그냥 평범했다. 말씀이 적고. 깔깔 대고 웃지 않고, 인자하고, 침착하시다. 또 선비형이다. 꾸짖는 일이 적다. 그러나 자식들에겐 엄했다. 용돈 주는 것 엄했다. 일민 상만이가 많이 혼났다. 사모님 있는 옆에서도 많이 혼났다. 인촌이 ‘수신’과 ‘영어 문법’을 많이 가르쳤다. 1학년 영어문법 가르쳤다. 그러나 일이 많으니까 1년 열두달 가르치지는 못했다.
처음 중앙학교 다닐 적에는 부끄럽게 생각해 교문 밖을 나서면 모자도 감추고, 다음해에 다시 시험봐서 다른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6개월이 지나니까 전혀 생각이 달라졌다.
◆마니산 수학여행
1916년 입학해서 5월 그믐께 강화 마니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마포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까지 갔다. 인촌과 모든 선생도 함께 갔다. 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중앙학교 교가도 불렀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세월이 유수같아야~’같은 노래도 불었다.
강화 마니산에서 단군을 모신 참성단에 올라갔다. 그런데 교장 유근 선생이 눈물을 흘렸다. 비는 쏟아지는 데, 다리는 아파죽는데 학생들이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했다. 유근선생이 갑자기 우니까. 유선생은 “여기가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민족을 가르친 단이다. 우리가 여기와서 볼 낯이 없다”며 우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꼭 우리가 독립을 해야겠다는 말씀을 하시진 않았지만, 그런 의미였다. 유교장의 눈물에 인촌도 따라 울었다. 다른 선생들도 막 울었다. 그 다음에 학생들도 다 울었다. 학생들도 감화를 받아서 그날의 경험이 민족사상, 배일사상의 근원이 됐다. 그날 만큼 쇼크 받은 적이 없다. 마니산에 수학여행을 간 것 자체가 민족교육이었다.
◆ 계동1번지 중앙학교
인촌선생은 처음엔 한복을 주로 입었고. 외국갔다 와서는 양복을 즐겨 입었다. 평생 비단 옷은 입어본 일이 없다. 우리나라를 잃었는데 무슨 비단 옷이냐는 것이다. 다만 말년에 병나서 손이 자유롭지 못할 때 비단옷을 입었다. 그전에는 이부자리도 전부 전라도에서 짠 고운 필목(무명베)에서 주무셨다. 그렇게 검소했다.
선생들이 구국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세 불러보니 알았다. 배반한 선생이 한명도 없었다.
6월경 고하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1916년. 고하를 보니까 어떤 시골 사람이 하나 올라왔는데,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는 하이칼라 머리였다. 그 때 인촌은 마침 없었고, 류근 선생하고 안재홍선생, 이휘준씨(졸업생)가 뛰쳐나와서 고하를 반갑게 맞았다. 나중에 고하는 선생도 하고, 교장도 했다.
1916년 여름부터 터를 닦아서 1917년 12월1일 계동 1번지로 학교를 이전했다. 인촌은 고하에게 중앙학교를 맡기고, 인촌 자신은 공사장에 가서 곡괭이질을 했다. 인촌은 계동 1번지에서 애국자 노백린 장군의 땅을 4300평을 사서 인촌자신이 십장이 돼서 인부와 학생들과 함께 중앙학교 터닦는 작업을 했다. 중앙학교나 보성전문이나 학교건물을 지을 때는 꼭 자신이 감독했다. 십장도 그런 십장이 없다. 인촌은 교정의 떼(잔디)도 자신이 직접 씨를 뿌렸다. 씨앗에서 잔디가 자랄 때 잡초가 나면 직접 손으로 뽑았다.
해방 후 정치싸움으로 머리 아프고, 결국 병석에 누운 뒤에 인촌을 만났는데 “아 여보게, 난 학교 앞에서 잔디 심고, 풀 메던 그 시절이 제일 기뻤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하고 말씀하셨다. 잔디심는 이야기는 중앙학교, 고려대학교 다 마찬가지다.
당시 학무국장(문교부장관)은 세끼야였다. 세끼야는 김성수 선생보고 ‘김군, 김군’ 그랬다. 어린 학생들이 보기에도 정말 듣기 싫었다. 저런 ^^이 있나. 여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중앙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난 다음 부터는 ‘김센세, 김센세’ 하더라. 세끼야 국장이 인촌을 ‘김선생’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부터이다.
인촌은 자기 학교를 형태없는 국가조직으로 만든 것이다. 중앙학교 교지를 봐라. ‘웅원, 용견, 성신’. 교육이면서 교시한 것. 물론 민족의 영구한 ‘부국의 책’을 교시한 것이다. 독립만 할 것이 아니라 영구히 이 나라를 지킬 것은 이 방법 밖에 없다. 웅원해야하고, 용견해야하고, 성신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중앙학교 교지가 이렇게 잘 쓴 것이다. 이것은 인촌 김성수의 머릿 속에서 나왔지만, 고하랑 의논한 것일 것이다. 중대사는 인촌이 혼자 정한 일이 하나도 없다. 고려대니 중앙학교니 두 사람은 한 팀이다. 2인1신이다. 그냥 친구로서 붕우의 관계가 아니라, 사생결단한 한국 독립팀이다. 팀도 그냥 어설픈 팀이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고하하고 인촌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고하는 외성적, 남성적이고 인촌은 내면적이다. 견고한 ‘속 결심’은 갔으나 표현방법이 하나는 외성적, 하나는 내면적이다. 인촌을 만나면 어머니같고, 고하는 아버지 같은 생각이 난다. 누가 낫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늘 인촌과 고하가 둘이 만나 싸우는 것을 보면, 고하는 곧 독립이 올 것이 멀지 않다는 주장이고, 인촌은 그리 쉽지 않네. 그리 쉽게 보지 말고 100년 200년 내다봐야한다. 인촌과 고하가 이야기하는 것 들어보면 “또 ^^한다. 내일 모레 독립되나?”하는 말이 들린다.
한국에 두 인물이 있지만 인촌은 인자한 유화적이고, 고하는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다. 둘이 묶어놓으니까 하나가 됐다.
인촌은 만사를 고하와 상통을 했다. 고하사상은 인촌사상, 인촌사상=고하사상이다. 두분이 친하다는 것은 다 알고, 친구간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친구도 친구려니와 친구를 넘어선 ‘구국 팀’의 하나였다. 성격은 다르다.
◆고하의 패기
일제 말기 동아일보에 한번 갔더니 2층 마루 올라오는게 꽝꽝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니까 올라오는 사람들이 새빨개. 그게 김석원이야. 빨간 것을 두른 헌병 부하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비행기 헌납으로 제일 먼저는 박흥식, 문명기, 신형욱(국회의원)이가 했다. 동아일보는 문명기가 헌납했다는 글자 하나도 안썼다. 그래서 비협조적이라고 해서 김석원이 온 거야. 칼차고 시뻘건 모자 쓰고 올라오는 것 봤더니 정말 무서웠다.
맨 먼저 앞에 선 놈이 이름이 ‘귀신대장’(오니 다이쇼)으로 불리던 놈이다. 문을 활짝 열어제끼더니, “**오까”했다. “도조루까” 명령적, 위협적인 말로 했다.
송선생이 녹아나는구나. 잡으러 왔나. 요렇게 내다봤다. 때리나. ^^하나. 쳐다보았다. 고하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목을 봐야 고하를 안다. 너 왔느냐는 이야기도 없고, 어서오십시오 이야기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고, 잘못했습니다는 말도 없고, 고개 숙이지도 않고, 쳐다만 보고 있다. 그냥 있는겨. 말하자면 못난 바보놈 같이. 김석원은 “너들 신문은 왜 이리 비협조적이냐”고 다그쳤다. 고하는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저러나 했는데, 나중엔 꼭 부처처럼 보였다. 헌병은 “이제 가자”하고 그냥 갔다. 그걸 보고 굉장한 양반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분하고, 떨렸다.
* 인촌의 어록
“하나를 백번하면 지구만해진다. 하나를 우습게 보지 말라.”
언젠가 인촌이 방직회사에 와서 실을 잡더니, “이걸 백곱만 해봐라 지구만해진다.” 내가 공장장 노릇, 감독 노릇할 적에 잘하라고 하는 이야기다. 직원들이 실을 흘릴 때 주워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3.1운동 전후 인촌
너하구 나하고 이야기하자. 고하가 오지 마라. 그 전에 폐교당했다. 학교는 둬야한다. 그이들 독립운동한다는 것은 ‘사상편’에 나온다.
우리 한국 사람 성질이 외국에서 도둑질을 하더라도 높게 평가해준다. 그러나 국내에서 하면 우습게 안다. 그런 폐습이 있다. 독립운동을 툭 덮어놓고.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망하니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선 구국패가 있고, 구미파, 중국(만주파, 상해, 남경파) 등의 갈래가 많았다. 구미파에는 이박사와 서재필을 놔둘 수 없다. 상해파에서는 좋으나 그르나 무식해도 김구나 신익희나 조소앙 등은 빼놓을 수 없다. 만주에서는 홍범도나 김좌진 등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4패들은 다 자기들 잘하고, 한국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놈하고 타협해서 살았다고 ‘친일파’로 봤다. 그러나 제일 애쓴 사람들은 그 네파 중 김성수와 송진우 두 사람 밖에 없다. 왜 그러냐.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고하가 인촌이요, 인촌이 고하다. 인촌 발언이 고하발언이고, 고하발언이 인촌 발언이다. 고하가 하와이 태평양민족회의에 가서 이승만 박사와 악수를 한 뒤 “국내에서 애썼다. 얼마나 고생많았느냐. 그러니 다시 돌아가지 말고, 나랑 같이 하자”는 말에 고하가 거절했다. 그것은 고하가 거절한 것이고, 인촌이 거절한 것이다. 국가란 것은 민족을 떠날 수 없고, 국토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국토와 백성을 지켜야한다. 윤봉길의 의거가 나더라도 그것을 알리고, 써주어야 국내 사람들이 안다. 윤봉길의 의거를 20만 배의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 김성수 송진우다. 손기정이가 마라톤을 제패했어도,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기 때문에 민족의 울분을 불러 일으켰다. 몇 번이나 싸웠느냐. 나석주, 윤봉길 등의 의거가 있을 때마다 이천만 민중에게 알렸다. 7번을 무기정간을 당하고, 1400회를 판매금지를 당했고, 1600회를 압수당했고, 삭제 금지 등 얼마나 싸웠느냐. 그 탄압 밑에서 용하게 매수도 안당했다. 그것은 인촌 아니면 안된다.
◆인촌의 귀족원 작위 거절
인촌은 뭐라고 했냐면,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사람이 죽게 되니까 생각이 나더라. 나를 구조하려고 가니까 큰 교실만한 방에다가 한 가운데 큰 테이블을 놓고는 정립을 하고, 이리 오라고 하더라. 참 두렵게. 김성수가 그걸 받았으면 사주는 없어지는 것이다. 집에 유언을 하고 나왔거든. 머리가 찌릉하고 전기가 통하더래. 생각이 안났는데, 갑자기 생각나더라. 청산유수로 말이 나왔다. 어기 천황께서 나는 일생 일본 대학을 졸업했으되, 제일 숭배하는 사람이 후쿠사와 선생이다. ‘나는 애들 가르치는 것이 평생 소원이니, 애들 가르치게만 해주십시오. 나는 가르치다가 죽을랍니다. 저는 한 것도 없고, 받을 수 없으니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 한 말이 그 생각이 나더라. 그대로 했다. 내가 교육자로서 만족하지, 내가 뭘했다고 작위를 받는가. 후쿠사와 선생을 가장 숭배하는 데 명치천황께 상을 주는 데 안받았다. 나도 교육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사람이 죽게 되니까 급하니까 우러나오더라. 머리 속에서 찌릿하게 생각이 나왔다. 그래서 말을 그렇게 했다. 궁하니까 통하더라.
◆3.1운동의 ‘뿌리’인 인촌
고하는 패기가 있는 사람이고, 인촌은 내면적인 사람이다. 내면적이라고 해서 나약한 것이 아니고 웅원, 용견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독립운동은 혁명처럼 한번 해보는 게 아니다. 바위가 있으면 물로 구멍을 뚫어내는 것이다. 혁명은 이판사판 바위에 부딪치는 것이다. 교육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만 아니라, 민족을 위해서라면 영구히 있는 기관이다. 나라를 뺏겼을 때는 독립운동 인재를 길러내지만, 나라를 찾았을 때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즉 교육은 나라를 잃었을 때도, 나라가 흥했을 때도 민족과 같이 교육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촌은 내명을 해서 자기는 빠지려고 햇다는 것이 아니고, 웅원하게 독립운동을 해야한다. 그래서 자기는 뿌리 역할을 했다. 예전에 임금은 뿌리였다. 임금이 정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촌은 전부 뿌리 역할을 했다. 급하면 근간이 갑자기 뚝 잘려서 줄거리 역할을 하지만, 괜찮으면 뿌리로 돌아간다. 인촌은 성질상 뿌리역할을 했다. 뿌리가 죽어버리면 줄기는 하루 아침에 없어진다.
인촌을 아낀다. 독립운동이야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날 독립하는 나라 봤는가. 한번, 두 번, 세 번 실패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은 2000년을 끌고 왔다. 수많은 실패 끝에 찬스가 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래서 뿌리가 되는 사람을 전선에 내놓는가. 그래서 “넌 가만 있어. 학교 지켜라”. 그 전에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는 망했다. 말살당했다. 그러니 “너는 여기 학교는 지켜야한다.” 인촌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빠지라고 햇다. 인촌은 뿌리기 때문에, 뿌리가 왜 전선에 나서느냐. 줄기는 잘라져도 얼마든지 싹이 나올 수 있다.
33인의 도장을 누가 갖고 있었느냐면 기당이 갖고 있었다. 기당이 다 새겼다. 새겨서 주머니에 갖고 다녔다. 찍을 때 다 찍었다. 33인 중 이갑성이 빠졌다. 한귀퉁이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갑성이가 뽀득뽀득 써 달라고 우겼다. 나이가 이십몇살이라 아직 애들이었다. 내가 한모퉁이 안에 들었다. 내가 빠질께 내 이름 넣어라. 나는 안 넣어도 좋다. 그래서 한모퉁이에 이름을 빼고, 이갑성 이름을 넣었다. 인촌의 이름은 애당초 빼고, 기당 고하는 48인의 이름에 들어갔다. 33인의 제조한 사람이 고하고, 비서격으로 거든 사람이 기당이다. 그것을 넣고 빼는 것은 밤에 다 이야기한 것이다.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수신 시간에 류근씨에게 들었다. 뿌리가 튼튼해야한다. 독립운동도 일체 흥분하면 안된다. 학교 교육도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독립운동은 3단계가 있다. 제1단계가 정치적 독립이고, 제2단계가 경제적 독립이고, 제3단계가 문화적 독립이다. 독립을 하더라도, 독립을 유지하는데는 시멘트가 필요하다. 거기에 손문이 나온다. 저 양자강을 봐라. 양자강에는 모래가 수천억개지만, 그 양가지고는 큰 소리 못한다. 큰 홍수가 져도 씻겨내려가고, 큰 바람(황사)이 불어도 날아간다. 그러나 시멘트로 바르면 꼼짝을 못한다. 사람도 시멘트가 필요하다. 바로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참으로 보배다. 한국을 봐라. 한국은 5000년 역사를 가졌다. 문화, 언어가 상당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망했다. 정치적 독립, 경제적 독립, 문화적 독립을 해도 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민족주의다. 손문은 그렇게 설명했다.
인촌과 고하는 일본 유학을 간 그 이듬해 망했다. 망하고 나니까 얼마나 슬펐겠어. 그래서 고하는 단념을 하고 나왔지. 울분에 못이겨서. 인촌은 내명하니까 남았다. 일본이 아무리 미워도 일본을 죽이려면 배워야하니까 남아야한다. 이것이 인촌과 고하의 차이다. 고하는 패기고, 인촌은 내명이다.
고하는 별 수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한다. 그런데 그 이듬해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삼민주의. 대아세아주의를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김옥균씨가 동양삼국 주의를 주장했다. 동양삼국은 순치의 관계가 있다. 일본이 망하면 한국, 중국도 어렵다. 중국이 망하면 한국, 일본도 이빨이 시렵다. 동양삼국은 도와야한다. 그것을 연장한 것이 대아세아주의다. 손문이 일본에 있다가 중국에 돌아갈 적에 고베에서 내려서 동경에 전화해서 인물들을 불렀다. 연설했다. 한마디 빼놓은 것이 있소.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했다. 3국 동맹주의를 주장했다.
손문이 그 이듬해 혁명 났을 때는 삼민주의를 주장했다.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민문주의. 종의 자식이 하나 있다. 종의 자식은 어떻게도 잘 살 수 없다. 노예생활을 처분하려면 종문서를 빼서 나와야한다(정치적 독립), 나와서는 밥을 먹어야한다(경제적 독립-경방, 농장), 교육도 받아야한다(문화적 독립). 독립운동만 해도 소용없다. 스스로 먹을 수 없으면 다시 노예생활이 된다. 또한 문화적 독립을 해야한다.
인촌의 사상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민생주의, 문화주의다. 손문의 삼민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