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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2005-04-21 00:00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할아버지의 중앙고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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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나의 천년'(푸른역사, 2004)  
  - 출판평론가 표정훈이 할아버지 은석(隱石) 표문학(表文學)이 회고하는 인촌에 대해 쓴 구절.
  - 표문학은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일제에 항거해 동맹휴업을 하다가 퇴학, 경성전기학교를 다녔음. 사회주의 계열운동을 함.
 
P 160
  곤란할 수도 있는 또하나의 질문. 할아버지는 인촌 김성수(1891~1955)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신이 다니신 중앙고보는 1915년 인촌이 중앙학회로부터 인수하면서 사실상 설립자가 된 학교였다. 비록 중앙고보에서 학업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오늘날 중앙고등학교의 동관과 서관, 그러니까 각각 1923년과 1921년에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 완공한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수십 년만에 돌아보시고 깊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 두 건물은 각각 사적 제283호와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할아버지는 인촌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인촌이 중앙고보에서 강연을 할 때였다. 강연이 끝날 무렵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코가 개코라는 소문이 있는 데 정말입니까?” 강연장이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중앙고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촌이 해외여행 중 개코를 붙였다는, 그러니까 요즘 말로 성형 수술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학생들의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총대를 멘 셈이었다. 인촌의 대답? 그냥 웃고 말더란다.
  그 밖에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당시 용산고보와의 축구 경기는 늘 패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끝나곤 했다는 이야기, 특히 그들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면 효과 만점이었다는 이야기. 국어학자 이윤재(李允宰:1888~1943) 선생이 수업 도중 몰래 우리나라 역사, 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 외적을 물리친 위인들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 주다가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일화. 고보 시절을 추억하시는 할아버지는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가신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인촌의 친일 행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에 대해 비난하지는 않았다. 왜일까? 조심스럽게 여쭈어보니 역시 조심스럽고 간단하게 답하셨다. “그는 자본가였다. 자본가가 자본을 축적하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치 않은 의미가 함축된 사회주의 계급 이론에 입각한 답이었다. 할아버지는 중앙고보에서 훌륭한 스승들과 만날 수 있게 해 준 인촌을 분명 존경했다. 그리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다.
 
P 143
  "중앙고보 선배들이 몰래 전해주었지. 보성고보의 최병직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프롤레타리아 ABC' '마르크스 레닌' '자본론' '레닌전' '스탈린전' '제국주의와 식민정책' '군국주의와 독재주의', 그밖에 각종 투쟁사.... 이런 저런 책들을 각자 읽고 평가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랬어."
  "발각되면 큰일이었겠네요."
  "물론이지. 선배들이 늘 강조하는 것도 '극비, 또 극비'였으니까. 어느날 보성고보의 최병직이 하숙방에 찾아오더니, 종로서에서 지금 학생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있으면 모두 불태우라고 하더군."
  "결국 누군가 발각되고 말았군요."
  "나를 찾아오곤 했던 최병직과 동료 윤순달 등이 본의 아니게 노출되어버리고 만 거야. 그도안 정성들여 기록해놓은 노트를 불태우자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해 놓고 그에 대한 나름의 평가와 생각도 적어놓고... 정말 열심이었는데 말이야. 최병직의 말에 따라 노트를 불태우고 나서 저녁을 먹는데,  고등계 형사들이 들이닥치면서 종로서로 가자고 하는 거야. 이상하게 별로 불안하지는 않았지. 종로서에 가니 방마다 학생들이 꽉 차 있더군." (중략)  
 "의식화라... 그렇지, 의식화된 거지.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바로 'ML(마르크스 레닌) 당'의 지하조직원들을 검거하는 일이었더군. 낭산 김준연이 책임비서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그러니까 당시 제3차 조선공산당을 ML당으로 부르기도 했거든. 1928년의 일이었을거야."
  "그럼 할아버지는 조선공산당 당원이셨나요?"
  "철 모르는 고보 초급생이 당원은 무슨 당원.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직이라고는 전혀 몰랐었지.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의 최하위 세포가 되어 있었던 거야. 여하튼 종로서에서의 경험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어. 고문에 견디는 묵비 투쟁 방법도 철저하게 교육받았고, 지령에 따라 경성 거리에 삐라를 살포하기 시작했지."
  "조직원이 된 거군요."
  "그렇지, 조직원이 된 거지.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 학교란 일제의 노예를 만드는 기관에 불과하며,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은 일본 제국주의를 때려부수고 혁명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광주학생의거가 그 즈음에 일어났는데, 서울에는 영향이 없었나요?"
  "왜 없었겠니? 동맹휴업 열풍이 일어났지. 결국 나는 퇴학 처분을 받고 중앙고보를 떠나야 했어."
  "그래서 경성전기학교에 입학하신거군요."
  "그렇지, 전에 너에게 말한 적이 있지? 지금 서울 개포동에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의 전신이라고 말이야. 얼마 전에 그곳에 가서 학적부를 열람해보니...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가더 구나."  (중략)
   "그럼 경성전기학교 시절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셨나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지. 이미 경성전기학교에는 임건호, 윤순달 등 중앙고보를 중퇴한 사람들이 '잠입'해 있었어. 권오직 선배의 지도로 학교 안애서 조직을 강화하고 독서회 활동을 벌이고 이론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지."
  여기에서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윤순달은 초기 북한 정권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국 부국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52년 다른 남로당 출신자들과 함께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53년 60년 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가 북한의 정치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북한 측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따르면, 1981년 12월19일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권오직은 1939년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이관술, 김삼룡, 정태식, 이현상 등과 함께 이른바 경성 코뮤니스트 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중앙고보 재학시절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에 참여하기도 한 이현상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고보 선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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