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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 자료 중에서 중앙학교를 언급한 부분.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1973)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 중 79쪽.
중앙중학은 항일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러한 항일의 교풍을 이어받고 있던 터인데 중일전쟁후로 학교당국은 조선어과목을 수의과목으로 돌려 과목이름만 두었다가 1939년부터는 일어상용을 강요하면서 민족문화에 관한 과목은 전면 폐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국 각급학교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었으며 중앙중학의 일각에서도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활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중앙중학의 현상윤 교장은 수신시간에 민족정신을 환기하는 강의를 하였고, 김상기는 4000년의 민족사를 비밀리에 이야기하였으며 지리를 담당한 최복현은 수업중에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의 전승과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이 당시 3학년생이던 노국환 황종갑 이기을 유영하 조성훈 등은 평소에 뜻이 맞는 학우들로서 매주 한두차례씩 만나 민족정기와 독립쟁취에 관해 협의하여 오던 중 4학년이 되던 1940년 10월에 역사와 정치에 관한 문제를 한 문제씩 연구하여 매주 1회 회합 토론하는 '5인 독서회'를 만들었다.
이들 5인 독서회는 1941년 7월 초순 활동범위를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이기을 황종갑은 고향이 함흥이니 하기방학중에 고향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고, 유영하 조성훈은 일본에 유학중인 선배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으며, 노국환은 그의 부친과 백형을 통하여 김성수 송진우 정인보씨 등의 국제정세관과 임시정부의 소식을 들어오기로 분담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종갑의 서신이 검열에 발각되어 황종갑 이기을은 함흥에서 체푸되고 노국환 유영하 조성훈, 그리고 최복현 교사는 8월22일 서울 동대문서에 구속되었다가 함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1973) 제8권 ‘문화투쟁사’중에서
-(323~324쪽)또 경술국치 직후에 기호학교와 융희학교를 통합하여 중앙학교로 강화한 것, 그리고 1915년에는 김성수가 인수하여 재정은 물론 관리면을 더욱 강화한 것이나, 평안도 정주의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통합한 것이나, 서울의 동원 여자의숙이 동덕 여자의숙과 통합한 것은…이것도 지역 특성에 따라 나타난 민족교육의 전열정비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다음에 이 기간에는 확고한 교육투쟁의 전개를 위한 학교재정 정비작업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보성전문과 보성중학 그리고 동덕여학교와 오성학교를 천도교 재단으로 재정을 갖추게 되었음은 손병희의 민족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일이었으며, 마산의 찬신학교가 지방민의 모금으로 기반을 닦은 것이나, 정주의 오산학교를 위하여 찬무회가 조직되어 재정을 정비한 것이나, 1915 김성수가 중앙학교의 재정을 부담하고 나온 것, 그리고 같은 해 불교재단에서 중앙학림을 세워 후일 혜화전문 혹은 동국대학교의 기초를 닦은 것 등 모두 당시 민족자본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속에서 오직 우국일념에서 추진한 교육운동이었고(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