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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건 조회 441회 작성일 2005-04-19 00:00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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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主導勢力)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義憤)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變轉)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民主意識)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西歐)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國政)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 ·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 ·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第一步)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 ·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19년 3 ·1 독립운동과 1926년 6 ·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 ·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 ·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脆弱性)으로 미완(未完)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 ·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나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은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이 결국 5 ·16군사정변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지만, 4 ·19혁명이 5 ·16군사정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4 ·19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 ·19혁명에서 촉구되고 추구된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은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가치(最高價値)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4 ·19혁명은 한국 헌정발전사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
4.19혁명의 전개와 의의
1. 4.19혁명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4월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 전국적인 시민혁명으로 전개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2. 4.19혁명 진행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선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 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경무대 진출, 계엄령선포(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이승만대통령 하야(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혁명은 성취된 것이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3. 4.19 혁명의 의의


4.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으로 휘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 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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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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