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의 일이다. 한국 경제를 끌어가는 '빅3' 자리에 걸출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최각규, 재무장관 이용만, 한국은행 총재 조순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간에 견제심리가 강해서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밑의 부하직원들까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특히 조순 총재는 같은 정권 (노태우 정부) 초기에 부총리를 지냈던 거물이어서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자존심 싸움은 극에 달했다. 당시에도 싸움을 먼저 거는 쪽은 재무부였다.
이용만 장관 특유의 찔러보기로 금리문제를 건드리면 한은은 발칵 뒤집혔다. 결국 하루 이틀 지나 최 부총리를 포함해 세 사람이 조찬회동을 하고 나서야 겉으로 나마 갈등이 해소되곤 했다. 당시 현장을 출입하던 기자는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조찬 장소에 달려갔었다. 언론들은 부처간 '밥그릇 싸움' 을 질타했었고 시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 며 불만이 높았다. 최근 이헌재 부총리의 금리 관련 발언을 놓고 재경부와 한국은행 간에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 부총리가 외신과 한 회견에서 "내년 5%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금리도 낮춰야 한다" 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한은 측에서는 즉각 "콜금리 결정은 한은의 고유권한" 이라며 "외압을 중단하라" 고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이 부총리의 발언이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바로 앞둔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그 저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에 대해 재경부도 공식 논평 을 통해 "내년 거시경제 정책기조에 대한 부총리의 평소지론을 피력한 것" 이라며 한은 측의 과잉반응에 불쾌해 하는 모습이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10여 년 전의 갈등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에 우선 씁쓸함이 느껴진다.
11월 초에 치러진 미국의 대선에서도 경제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부시 진영은 지난 92년 대선에서 연준(FRB)이 금리를 충분히 내리지 않아 경기 회복이 지연되었고 그래서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이 재연되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다. 그런데 연준은 6월부터 50년 만에 최저수준인 연방기금 금리를 서서히 인상하고 있었다. 일자리 창출이 부진하자 연준이 금리인상을 멈추어야 한다는 지적도 일부 언론에서 제기됐다. 재집권을 노리던 공화당으로서는 연준이 금리인상 행보를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부시는 물론 스노 재무장관도 금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금리조정은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누누이 강조되는 것이지만 시장의 예측가능성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 통화정책의 근간도 따지고 보면 당국의 의도를 시장에 알리고 서로 반응해 가는 과정이 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린스펀 의장의 발언을 조금만 눈여겨 추적해보면 통화정책의 큰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시장은 연준의 정책의도를 파악하고 적응해 나가며 그렇게 해야만 손실이 가장 적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물론 뒤돌아보면 그린스펀과 연준의 눈부셨던 정책적 타이밍에 대한 평가가 신뢰의 기본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문제점은 중앙은행의 금리결정을 일사불란한 행정력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로 귀착된다. 이 부총리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권의 적지 않은 주문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총력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재정에서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 쓰러져 가는 경기의 불씨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한은이 이에 적극 부응하지 않자 섭섭한 마음을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는 시장주의자를 자처하는 이 부총리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구태라는 생각이다. 우리 금융시장도 이전과 크게 달라져 시장원리가 작동하고 있는데 금융시장을 상대하는 중앙은행을 여전히 행정력의 일환으로 취급하는 것 은 옳지 않다. 이 부총리는 다소 힘들더라도 시장원리의 순조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발언은 삼가했어야 옳았다. 시장에 불안감을 주는 '중앙은행 건드리기' 는 더 이상 곤란하다. 이번 기회에 한은에도 한 가지를 당부한다면 시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경기인식과 정책타이밍에서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오늘의 말과 내일의 말이 달라서는 곤란하다. 오늘날의 그린스펀과 연준의 권위는 누가 거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뉴욕 = 전병준 특파원 bjjeo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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