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원수와 이웃를 사랑하라! 마 5:43-45
우리는 나를 해치려는 자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은
틀린 것이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달라는 사람에게는 요구하는 것보다 더 주고, 싫은 일을
시키는 사람에게도 더 많이 해 주라"는 주님의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명령은 나를 해치려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법과 사회적 질서에 관한 내용도 아닌 것으로, 나 개인적인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나를 때리려는 사람에게 얼굴을 돌려대느냐 주먹을 쥐고 마주 때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하느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해칠 때, 용서할 수 없습니다. 꼭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복수를 해야 합니다. 아니, 내 이를 부러뜨리면 ^^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즉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높이고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문제가 일어나고 분쟁이 생기는 것은 항상 자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즉 자기의 이익을 찾으며, 자기의 명예를 구하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서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민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를 미워하거나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려는 사람에게 무관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를 해치면 해치라고 해라.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려면 빼앗아 가라고 해라. 욕을 하면 하라고 그래라.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가지신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 얼마나 훌륭한 지위에 오르느냐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격을 수양함으로 세상의 재물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체면이 깎이는 일, 자기가 멸시당한다는 생각을 죽이는 일은 정말로 힘이 듭니다. 혹 유명한 예술가나 천재적인 사람들 중에는 자기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 가족과 친구와 교회에서의 비난을 참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선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더러 우리 자신에 대해 죽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명령을 들으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이 명령에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명예나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옛날 기사들이나 서양의 신사들은 자기 이름을 위해, 명예를 위해 결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개인간이나 국가간에 벌어지는 싸움과 전쟁은 대부분 자존심을 건드릴 때에 일어납니다. 부부 싸움에서 언제 폭력이 시작됩니까?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으면 주먹이 날라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상은 자기 명예를 지키고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이 옳다고 인정하지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멸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 욕심도 버리고, 자기를 높이는 것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상을 사는 이유와 동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7-8)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의 인격을 철저하게 변화시켜서 전적으로 변화된 새 사람만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에 연변대학과 합작하여 병원을 세우기로 약속하고 정부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공산당이 계속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건물의 설계도를 속이고, 공사비를 속이고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도 속이고, 그리고 아주 병원 전체를 빼앗아 가지고 우리를 쫓아내려고 계획을 세운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밉고 화가 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저 공산당들만은 사랑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이 일을 그만두게 해 주십시오. 한국에 돌아가서 예수믿는 사람들과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 안 되겠습니까? 왜 저렇게 보기 싫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일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도 사랑했다. 너는 저들보다 더 깨끗하니? 네가 저들보다 더 나에게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한 줄을 아느냐? 너는 더 더러운 데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여 구원하고 나의 일을 맡겼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는 데, 네가 왜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욕한다고 내가 마음이 아플 자격이 있는가?
나는 그것이 마땅한 죄인이 아닌가?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것을 가져가겠다고 할 때에 아까워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지금 나에게 괴롭고 힘든 이 마음이, 상대를 미워하는 이 마음이 무섭고 더러운 자기중심성과 교만 때문은 아닌가? 나를 높이고 나를 드러내어 내가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삶에서 누가 나의 주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해치려는 사람에게 분노와 미움이 일어날 때에 그것이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구별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싶어하는가?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불안과 긴장, 짜증과 못된 성질,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비참과 불행, 갈등과 미움이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가? 내가 하나님을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자아 때문인가? 이런 것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주장만을 굽히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이려 하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교인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데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무시하려 하고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일이 흔합니다. 이렇게 교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과도 분리됩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옳다고 믿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그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졌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인 데,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찬양하는 사람에게 평강과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정죄하시는 것이 바로 자기 교만과 자기 중심적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생활이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시작하는 것을 알이야 합니다. 성결이란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일들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 에서 시작됩니다. 즉 자기에 대하여 죽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는 이렇게 사신 분을 바로 성경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돌보시지 않는 삶의 표본이십니다. 그분은 자기가 하는 말조차도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주신 말이며, 자기가 행하는 일도 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시키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원수되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그의 친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어째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이제는 내가 모욕을 당해도, 뺨을 맞아도, 속옷을 벗겨가도,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나에 대하여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렇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자기의 노력으로 살려 한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그 성령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말씀을 더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곡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어라고 말했나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원수를 미워하고 멸망시키라는 듯한 의미를 주는 구절들이 있기는 합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문자 그대로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모리 족속과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을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 시편 69편을 보면 원수를 저주하는 노래도 나옵니다. 시 69:19-25,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런 말씀을 본 바리새인들이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 시편을 포함하여 악을 처벌하라는 말씀은 항상 공의와 사법적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나 교회에서 일어난 죄악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 개인과의 문제에서 발생한 원수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동일합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4-45)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는 것처럼, 또는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시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가인을 쫓아내셨고, 옛 세상을 홍수로 벌하셨고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꼭 벌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해와 비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신다고 앞으로의 심판을 부인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영원하신 재판장으로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이 땅위의 세속적 삶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짓는 농사만 잘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불의한 자와 악한 자의 노력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분이나,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이 땅위에서의 삶을 다르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는 학생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일류대학에 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암에 걸리지 않거나 교통사고가 안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에는 악인과 선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도 사람의 지위나 신분이나, 학식이나 인격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똑똑하거나 착하거나 잘 생긴 사람만 사랑하셔서 구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나 저의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실만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속에는 더럽고 추한 죄악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오직 영원하신 그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완전한 비이기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다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이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나에 대한 태도와 상관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태도로부터 초연한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초연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자기의 이익에 민감하고, 경계하며, 시기가 많습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즉각 반응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하는 일에 민감하게 지배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불만과 불평이 일어나고 그의 인생이 항상 불행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은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는 만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미워하고 불친절하게 대하고 심지어 잔인하게 대해도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에게 향하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이나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간들의 유익과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의 유익과 구원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을, 악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에게 이같은 연민과 사랑을 품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일을 자기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힘이나 마음으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에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하여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할 때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의지, 내 노력, 내 감정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악의로운 행동에 호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저도 지난 몇 주 동안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저를 모함하고 내쫓으려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중국으로 떠나면서부터 이 땅위에서의 부와 지위에 모든 욕심을 버렸습니다.
저는 86년도에 철원 길병원에서 원장을 해 보았습니다. 해 보니까 원장이라는 자리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91년에 중국에 갈 때에는 제가 지금의 울산대학병원 전신인 해성병원에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었는 데, 원장님이 그때 제게 말씀하시기를 "내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자네가 가면 누가 이 자리를 잇는가?" 하시며 만류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그 자리가 싫었고,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다짐하였기 때문에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떠났었습니다. 또 선교를 위한 기도 모임에 나갔을 때에 만난 하용조 목사님이, "돈 잘 버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어떻게 중국에 가려고 합니까?"하고 묻길래, "나는 이 길이 더 많은 보화를 하늘에 쌓은 길인 줄 알고 있는 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십니까?"하고 되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의 재물과 지위보다,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주실 그 영광스러운 상급을 더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이라고 예수병원 원장 자리를 탐내서 내려갔겠습니까? 예수병원이 너무 어렵고 오랜 분쟁 가운데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서 또 하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가보니 역시 악한 세력들이 이 병원을 사유화하려고 송사를 하고 모함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탐내지 않았는 데, 그 자리를 탐내고 있던 사람들이 저를 미워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자기들이 탐내고 있으므로 나도 탐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봅니다. 어떻게 하든지 저를 쫓아내려고 획책하고 모함하는 것을 바라보며 탄식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저는 하나님께서 그 병원을 깨끗케 하여 참 복음을 증거하는 병원으로 만들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병원의 임상과장 거의 전부와, 직원들 모두가 저를 지지하며, 예수병원을 다시 살리는 길은 저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매일 제게 격려를 보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이 설교말씀을 준비하는 저는 참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이 곧 제게 주신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저에게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내 감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으로, 나의 노력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원수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명하시는 대로 따라갈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원수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랑이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주의 성령께서 제 안에 임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수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도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라고 권했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며 그의 주인의 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제 나도 원수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평강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못하겠는 데..."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가? 나는 안 돼"하고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누구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해를 악인과 의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무참히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시고, 그 믿는 자들을 위해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어느 누구도 내 감정과 의지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시고 다스리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아직도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님을 닮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심히 애통하며 슬퍼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목마르고 주린 자처럼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찾아 그분의 뒤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로 보기 싫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시면 아들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도 어려울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평화가 가득하길 감사하며 기도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