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막시무스 퀸틸리아누스
본문
막시무스 퀸틸리아누스 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제국 쇠망사>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내 독서 습관은 딱히 스타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기도 하고, 보다가 말고 훗날을 기약하는 책도 상당 수가 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여러 종류의 책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읽기도 한다. 지하철을 탈 일이 있으면 그에 맞는 가벼운 책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집중이 필요한 무거운 책을 읽기도 하고... 특별히 원칙이 없고 그냥 자유롭게 읽는 편이다. 한편으로 보면 좀 경박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운 스타일이 몸에 배서 억지로 잡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이파는 방식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 책에 따라 내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그런 방식을 취할 수가 없다. 그러면 단박에 책이 싫어져 버린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다가 처음엔 기번의 격조 높은 문장과 정열적 묘사에 흥미를 느꼈으나 조금 읽다 보니까 지겨워져서 그만 뒀다. 아무런 동기가 없이 역사책을 읽는 것은 정말 '따분' 그 자체다. 그러鳴?<로마제국쇠망사>의 시작 부분이 영화 <글레디에이터>와 일치한다는 얘기를 듣고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보게 되었고, 영화 속의 두 매력적인 남자,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전쟁 야영지에서 집필했다는 <명상록>도 한 권 사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1776년에 1권이 출판되고 뒤이어 2,3권이 나왔는데, 까치에서 나온 데로 손더스 발췌 번역본을 보면 대략 서기 100년 - 1500년. 안토니우스 시대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다루고 있다. 최근에 유명해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는 로마사가 아닐까 한다
기번의 문장은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무척 매력적이다. 그는 과감한 평가 기준을 갖고 있고 ( 객관적이라고는 안했다 )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과 적절한 시점에서 판단을 유보하거나, 딱 들어 맞는 회의를 하기도 한다. 애매모호하게 얘기하거나 말을 돌려서 문제를 은폐하려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가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편견의 소유자이고.. 때문에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편애를 하는 편이라서 책이 출판된 이후 호불호(好不好)가 극단적으로 나뉘기도 했다 한다.
내가 주로 관심있게 본 것은 안토니우스 시대부터 코모두스 시대 까지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워서 알고 있던 몇 몇 인물들에 대한 몰랐던 사실과 상반된 평가 등이 있었으나 여기에선 다 생략하기로 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그의 아들 코모두스 시대 까지만 보기로 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인간의 범죄와 오류와 불행이 거의 기록되지 않은 참으로 희귀한 역사를 제공한 시대라고 기번은 얘기한다. 그는 사생활에서도 온후하고 선량했으며 소박하고 근면했다 한다. 12세의 나이에 경도되었던 스토아 철학의 영향으로 그는 자기 자신에 엄격하고 다른 사람의 과오에 관대했으며,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자애를 베풀었다. 그의 사후 1세기 쯤 지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초상을 집안에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기번이 지적하는 것은 태평성대가 한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서기 180년 마르쿠스는 다뉴브 하반의 진중에서 급사했다고(로마제국쇠망사) 되어 있으나 그의 명상록에 나오는 연보에는(육문사 간행) 그가 비인에서 3월 17일에 페스트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19세의 아들 코모두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급사했다고 알려지는 것으로 좀 더 드라마틱한 죽음을 선택한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인 그는 오랫동안의 수난과 전쟁에 지쳐 진중에서 <명상록>을 쓰면서 고독과 유랑의 시간을 달랬을 것이다. 명상록 1권에 보면 누구에게 어떤 점을 배웠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겸손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막시무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 나는 막시무스로부터, 자제력과 확고부동한 목적의식, 어떤 불운 속에서도 항상 쾌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품위와 온화한 성품이 훌륭하게 조화된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모든 의무를 묵묵히 불평없이 수행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믿고 있는 그대로 말하며, 옳다고 판단한 것만을 행동한다고 신뢰했다.. 중략> 아우렐리우스는 막시무스의 이런 성품을 수양된 것이라기 보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그를 알게 된 데 대해 신들에게 감사하다는 구절도 뒷부분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신뢰와 총애가 지극했음을 엿볼 수 있다.
막시무스 역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였고 집정관을 지냈다. 막시무스에게는 콘티아누스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의 단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로마제국쇠망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형제를 같은 해에 집정관으로 승진시켰으며 나중에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그리스의 민정을 맡도록 하는 한편 군사지휘권도 주어 형제가 게르마니아에서 대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황제가 죽고난 뒤 그의 아들 코모두스에게 무고하게 희생되고 만다.
영화에서는 선과 악의 대비로 막시무스를 죽이려했던 코모두스가 먼저 죽고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의 독침에 찔려 죽지만 역사는 좀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코모두스는 막시무스가 죽고 난 이후로도 즉위 13년 동안 온갖 악덕과 비행을 일삼다가 측근에 의해 교살된 것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밥맛없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우아한 용모와 대중연설은 집권 초기에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끈 것으로 나와 있다. 코모두스는 날마다 잔인한 오락을 통해 신들의 용맹과 솜씨를 흉내내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로마의 헤라클레스라고 자처하면서 세쿠토르(검투사)가 되어 735회나 싸운 기록이 나와 있다. 그는 검투사들의 공동 기금에서 수당을 받았는데 그 금액이 거금이어서 로마 백성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명상록>을 읽어보면 <내가 가난한 사람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자 했을 때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돈이 내게 있었음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이 남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처지를 당한 일이 없음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라는 구절 속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 아들 교육은 왜 그 모양으로 시켰는지-. 원래 마르쿠스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병으로 다 죽고 코모두스 하나와 딸 넷 만 살아 남은 것으로 나와 있다. 마르쿠스가 못된 아들을 맹목적으로 편애하여 백성들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말았어야 했고,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도 가족을 지목한데 대한 (당시에는 드물었다.)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식에 대한 빗나간 사랑이 그의 덕망에 누를 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처음에 이 두 권의 책을 볼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막시무스에 대한 관심이 컸으나 한 사람은 황제고, 한 사람은 집정관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기록의 대부분이 편중되어 있었다. 기록이 적기 때문에 상상력이 개입될 소지가 더 많은 건지-.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의 막시무스는 강인함 속에 애잔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만 그런가? ) 헐리우드 영화라서 '가족애'를 유난히 강조하는 바람에 그런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는데 전투에 앞서서 그의 두툼하고 투박한 손이 마른 모래를 집어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 수확을 앞둔 밀밭을 지나며 바람에 춤추는 밀을 손으로 쓰다듬는 장면이 그런 애잔함을 더해준다. '아름다운 인생'이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원하는 소박함 속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혹시 오다가다 그가 형제와 공동 집필했다는 논문의 일부를 만나게 된다면 <운수 좋은 날>로 선포하고 싶다.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로 번역된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2001/4/20)
* 내가 아는 누구는 막시무스의 역할을 한 러셀 크로우의 매력에 대해 "가공하지 않은 다이아몬드"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가공하지 않은"이다. 세련된 컷팅을 위해 손을 댔다 하면 그의 매력은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가공을 하면 더 빛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