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열전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 세계(世系)가 자상치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고 겸하여 글짓는 법도 알았다..후략"라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을지문덕은 고구려국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월 16일이면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격(초擊)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청천강)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지금의 요양 방면)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구걸했으나, 을지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 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몰아부쳐 현도도(玄菟道:지금의 심양 방면)로부터 태원(太原:산서성 태원)까지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州郡)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후략"라고 적혀 있다.
위 문구에 의하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 세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을지문덕은 성(姓)과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문구에 의하면 을지문덕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이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을지(乙支)는 위지(尉支)와 같은 말이고, 위지(尉支)는 고대말로 천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말 위(尉=하늘)는 하늘에 있는 해님과 달님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지(支)는 고대말로 님 또는 새끼라는 뜻이다.
을지문덕이 생존할 시기는 왕조시대(王朝時代)이므로, 왕이 아닌 사람이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위지(尉支)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을지문덕이 왕에 버금가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문덕(文德)이라는 호칭으로 보아, 을지문덕은 지략 외에 문(文)에 능하였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덕망(德望)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여.수전쟁의 발단원인
개황 9년(A.D 589년)에 수(隋)가 진(陳)을 멸망시킨 후 이번에는 고구려를 정벌할 준비를 하자 고구려의 평원왕은 A.D 590년부터 수의 침략에 대비하여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저축하며 막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였다. 이에 수(隋) 고조(高祖)는 새서(璽書)를 내려 "왕은 생각하라 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과 어떠하며, 고구려의 인민이 진(陳)보다 많겠는가?" 하며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개황 18년(A.D 598년)에 수나라 총관 위충(韋沖)이 난하에서부터 당산 사이에 있던 고구려 영유지(領有地)를 점령하여 수성현(遂城縣)과 영락현(永樂縣)을 설치하자 영양왕은 곧 바로 반격을 가하여 빼앗긴 영유지를 다시 수복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여.수 전쟁이 일어났다.
여.수전쟁은 수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맨처음 영양왕 9년에 일어난 전쟁상황을 살펴본다.
「영양왕(孀陽王) 9년(A.D 598년) 고구려가 말갈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입하니 영주총관 위충(韋沖)이 쳐 물리쳤다. 수 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으로 원수(元首)를 삼아 수.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여름 6월 수제(隋帝)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에 당도하자 장마비를 만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유행병이 돌았는데 주라후(周羅 )는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달리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수의 군사가 돌아 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이 전쟁 때 수나라 보기병은 임유관까지 진격했다가 난하에서부터 당산 사이 고구려 성에 있던 군사들에게 후군(後軍)과 보급로가 차단 당하여 굶주리다가 전멸하였고, 수나라 수군(水軍)은 해전(海戰)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大敗)하였다.
3. 살수대첩 전쟁상황
그 뒤 영양왕 23년에 고구려와 수나라 간에 또 전쟁이 일어났다.
「영양왕 23년(612년) 봄 정월 임오일 제(帝)가 조서를 내렸다..중략..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蓋馬)·건안(建安)·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부여·조선·옥저·나라(樂浪)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점선(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堤奚)·답돈(踏頓)·숙신·갈석·동이(東暆)·대방(帶方)·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모두 평양에 집결하라."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고,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사제(社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 제사지내고,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성(馬祖星)에 제사지냈다. 부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隊)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團)으로 하고,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40리 간격으로 보내니, 다 보내는데 40일이 걸렸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또 어영과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이 출발하니 또 80리를 뻗었다. 2월 제(帝)가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수나라 군사들이 모두 모여 물가에 이르러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제(帝)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3개의 부교(浮橋)를 만들어 동쪽 언덕에 대게 하였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가 싸웠다. 우리 군사들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되었으므로, 군사들이 차례로 동쪽 언덕으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맹렬히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이 되었다.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나아가 요동성을 포위하니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제(帝)가 요수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내리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올 때 제(帝)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아라.” 요동성 군사들은 자주 나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帝)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여러 장수들에게 “만약 고구려가 항복하면 마땅히 위무할 것이며 군사를 풀어 공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제(帝)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항거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6월 기미일(11)에 제(帝)는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해자를 살펴보고 장수들을 불러 힐책하였다. “그대들은..중략..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얼굴빛을 잃었다. 제(帝)는 요동성 서쪽 수 리 떨어진 육합성(六合城)에 머물었다. 우리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를 건너 먼저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우리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말리며, 모든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군사를 놓아 약탈하느라고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을 때 복병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배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이에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로 돌아가 주둔하였으나, 다시는 감히 공격할 생각을 못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섬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도에 미쳤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제(帝)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우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요.”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이 정예군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제(帝)를 뵈올 것이요? 또한 나는 이번 걸음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전의 장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을 결정하는 권한이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지금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는 제(帝)가 우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우중문에게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이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강제되어,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제(帝)를 알현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알고 그 말에 따라 되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가을 7월 수나라 군사가 살수에 이르러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모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겨우 2천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가 억만을 헤아렸으나 모두 잃고 없어졌다. 제(帝)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돌아갔다..중략..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이 전쟁이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이 전쟁 때 고구려의 서쪽 변경은 당산 방면이었다. 그 때문에 수나라는 북경 남쪽 탁군에 군사들을 집결시켰다.
이 전쟁 때 당산 방면에서부터 난하 사이 고구려 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수나라 군사의 진군을 걸사적으로 저지하지 않고, 주력부대를 통과시킨 후 성을 나와 수나라 군사의 후군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주력부대는 난하에 방어선을 치고 수나라 군사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 다음부터는 수나라 군사의 진군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지 않고 수나라 군사들과 싸우면서 후퇴하는 지연전술을 사용하여 수나라 군사들의 진군속도를 늦추었다.
수나라 군사들은 보급로와 후군로가 차단당하지 않기 위하여 당산 방면에서부터 요하 사이에 있는 고구려 성을 공격하였으나 전부 점령하지못하였다.
수제는 진군로 도중에 있는 고구려 성을 전부 점령하지 못한 채 진군하면 수나라 군사의 후군로와 보급로가 차단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군사들을 전진시켜 압록강 북쪽에 집결시켰다. 이는 중국왕조 정벌군의 약점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왕조의 정벌군은 먼거리에 있는 적을 정벌할 때 그 전 해에 상비군 외에 농민군 등을 모병하고 군수품을 조달하여 군사와 군수품을 공격 준비지점에 미리 대기시켰다가 봄이 시작되는 1월에 정벌군을 출발시켜 겨울이 시작되는 10월에 철군하였다. 만약 10월이 되어도 철군을 하지 않을 경우, 혹독한 추위로 풀이 일찍 마르고 물이 얼고 보급로가 차단됨으로써, 병마(兵馬)가 굶주리어 정벌군의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반면에 고구려 군사는 지형에 능한 이점을 이용하여 정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수시로 정벌군을 공격하고 달아나는 수법을 사용하여 정벌군을 괴롭혔기 때문에, 정벌군은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한 이상 10월이 되면 반드시 철군하였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정벌군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진군로 주변 성에 군사를 주둔시켜 수나라 군사의 후군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주력부대는 싸우면서 후퇴하는 지연전술을 사용하며 시간을 질질 끌어 수나라 군사들의 진군속도를 늦추었다. 즉 10월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문에 수제(隋帝)는 수나라 정벌군이 진군로 주변에 있는 성을 점령하지 못한채 시일만 흘러가자 초조해져서 빨리 평양으로 진격할 목적으로 후군로와 보급로 확보를 포기한 채 군사들을 평양 방면으로 진군시켰다가 을지문덕의 전략에 걸려들었다.
수나라는 진군로 도중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들을 모두 점령하지 않은 채 진군함으로써 보급로가 차단 당하자 보급품을 배로 실어 요동만 동쪽 연안으로 수송한 후, 압록강 북쪽에서 미리 100일분의 식량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은 무거운 식량을 휴대(携帶)하고 이동하느라 기동력이 떨어졌고, 무거운 식량을 휴대하고 이동하던 수나라 군사들은 요지(要地)의 성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잦은 습격으로 편히 쉬지 못하여 피로해졌으며, 피로에 지친 수나라 군사들은 무거운 식량(食糧)을 버림으로써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고, 굶주림에 시달린 수나라 병사들은 싸워 보기도 전에 전투력을 상실하였으며, 전투력을 상실한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대패(大敗)하였다.
4.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전술 요지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전술 요지는 앞에서 본 것처럼 적의 보급로와 후군로를 끊어 정벌군을 고립시키고,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정벌군의 전투력이 가장 약해졌을 때 적을 공격하여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 사학자들의 통설은 여.수전쟁 때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요하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수전쟁 때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요하로 보아서는 수제(隋帝)가 정벌군을 왜 요하 서쪽에 집합시키지 않고 북경 남쪽 탁군 임삭궁에 집합시켰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또 여.수전쟁 때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 요하였다면, 요하에서부터 평양까지는 1천 몇백리 밖에 되지 않아 종심(縱深)이 짦으므로, 고구려 군사들은 싸우다 후퇴하는 지연전술을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 요하였는데도 고구려 군사들이 수나라 군사들의 진군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지 않고 싸우면서 후퇴하는 지연전술을 사용하였다면, 고구려는 공격개시 2-3개월 후에 평양성이 포위당하게 된다. 또 수나라 군사들은 1군 사이의 간격을 40리로 하여 진군하였으므로 그 길이가 960리나 되어 만약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 요하였다면 수나라 군사들은 요하에서부터 고구려의 주방어선인 단단대령방어선을 지나 압록강 훨씬 남쪽까지 진군할 수 있게 된다.
고구려는 적의 후군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지 못한 채 적에게 단단대령방어선을 돌파당하면 압록강방어선이나 청천강방어선은 대군을 막기에 적합하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왕은 항복하거나 도망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된다. 따라서 만약 여수전쟁 때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 요하였다면 고구려는 보급로와 후군로 차단 전술이나 지연전술을 사용할 수 없어 고구려의 주방어선인 단단대령방어선에서 결사적으로 저지하다가 남로나 북로 중 한곳만 뚫려도 항복하였을 것이다. 여수전쟁 때 고구려 군사들이 지연전술과 보급로 및 후군로 차단전술을 사용했던 것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 당산 방면이라서 수나라 군사들의 진군로가 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