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 답장: 이원종교우(63회)기사가 하나더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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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막 자란 '거친 음식'이 보약
농사꾼 이종원 교수 "직접 기른 50여가지 채소ㆍ토종닭이 보약"
입력 : 2004.10.07 10:59 38'
들판에서 막 자란 '거친 음식'이 보약
노랗게 물든 가을 들녘이 평화롭게 휘감고 있는 강릉시 회산동 심씨마을. 이곳에서 15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이원종 (52·강릉대 식품과학과) 교수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밭두렁을 따라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개량 한옥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 한눈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빨간 함석 지붕집이 바로 ‘교수님댁’이다.
“멀리서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저희집 많이 남루해서 어떻게 하죠. 태풍 때 비 샌 데를 좀 손 봤더니 지붕이 누더기가 됐네요.” 이원종 교수와 부인 김경애(50)씨는 낡은 함석집이 맘에 걸렸는지 쑥스럽게 웃으며 손님을 반겼다.
이 교수는 시골 농가에 살며 손수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사짓는 교수’다. 단순히 취미삼아 농사를 짓는 그런 ‘무늬만 농부’가 아니라 20여년 농사를 지어온 ‘베테랑 농부’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멜빵바지에 장화를 신고 집앞 텃밭을 일구며 구기자, 고구마, 개두릅, 호박, 가지, 쑥갓, 상추, 고추, 근대, 당근, 감자, 토마토 등 50여종의 채소를 텃밭에서 직접 길러먹는다.
이 교수가 처음으로 농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초 미국 노스다코타주립대 유학 시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 손에 흙 묻혀 본 적도 없었던 그가 학교에서 1년에 10달러만 내면 학생들에게 양도해주는 밭에다 깻잎과 상추를 기르면서부터였다. 아무 것도 없던 씨앗에서 줄기가 뻗고 이파리가 돋는 걸 지켜보면서 ‘농사짓는 재미’를 처음 맛봤으며 지금은 아예 그속에 투신해서 살고 있다. 교수 경력(86년 부임)보다 농부 경력이 조금더 오래 됐으니 어쩌면 ‘교수하는 농부’가 더 정확한 타이틀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농사가 좋다지만 함석집에서 살 각오를 하기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강단에 섰을 때는 강릉 시내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둘째 딸아이가 잔병치레를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이었죠. 그러다가 교환교수로 잠시 캐나다에 갔는데 아이가 몰라보게 건강해지더라고요.”
양국 생활의 차이는 단 하나, 답답한 시멘트덩이 아파트에 살다가 흙과 풀이 깔린 주택에서 산 것이었다. 부부는 딸이 ‘흙’을 밟고 살지 않아서 약봉지를 달고 산 것이라 생각하고, 90년 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아파트를 팔아 강릉 교외의 텃밭이 딸린 조그만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당시 함석집의 가격은 15만원. 지금껏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궁이 부엌을 입식부엌으로,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보일러를 설치한 게 리모델링의 전부였다.
“주위에서 숨겨놓은 재산이 엄청난 줄 아는 사람들도 있어요. 설마 교수 전재산이 이것밖에 없겠느냐며 의심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진짜 전부예요.”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 ‘거친 음식’이다. 전공이 식품과학인지라 원래 건강음식에 관심이 많았는데 채소를 직접 길러먹다 보니 이론과 실제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원종 교수가 말하는 ‘거친 음식’이란 온실 속 화초처럼 화학 비료의 ‘보호’를 받으며 유약하게 길러진 음식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에서 스스로 자라난 식품을 말한다. 그런 자생력을 지닌 식품일수록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생리활성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우리 몸도 튼튼하게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지난 7월에는 그간 ‘거친 음식’을 직접 재배해서 먹고 산 경험을 바탕으로 책(위기의 식탁을 구하는 ‘거친 음식’)을 펴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앞마당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토종닭을 가리키며 “저렇게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토종닭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친 동물성 음식”이라고 말했다. 닭 얘기가 나오니 할말이 많은 듯 이 교수의 얼굴에 희색이 돈다.
“닭은 저희 식구나 다름없어요. 벌써 ‘닭 아빠’ 생활한 지도 20년이 넘었네요.”
유학 시절 연구실에서 실험용으로 사용됐던 닭들을 처분해야 하는데 ‘실험용’이라고 낙인찍힌 닭들이라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도 없고, 결국 닭 잡는 법을 배워 며칠 동안 죽은 닭을 양손에 주렁주렁 싸들고 집에 와야 했다. “한동안은 꿈에 닭이 나타날까 무서울 정도였다”며 부인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닭을 직접 키우게 된 건 시골집으로 이사오면서부터다. 채소만 먹다보니 단백질이 부족한 것 같아 토종닭 파는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몇 마리를 사서 길렀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한 마리씩 잡아먹고, 달걀을 받아서 이웃과 나눠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자처럼 고운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단칼에 닭을 치는 이 교수를 보고 친구들은 ‘닭백정’이라고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 한창 인터뷰 중인데 갑자기 이 교수가 벌떡 일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중요한 손님이라도 왔나 했더니 시커먼 도둑고양이가 닭 우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고양이 녀석들 얼마나 고약한지, 우리가 어떻게 ‘모셔온’ 닭들인데 호시탐탐 노린다니까요. 저 녀석들이 제일 무서워요.” 옆에 있던 부인의 설명이다.
이제 시골사람 다 됐지만 처음에는 이 교수 가족들도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미국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던 큰딸 아이가 제일 문제였다. 큰딸 아이는 비만 오면 질퍽해지는 시골길도 싫어했고, 밭에서 길러낸 채소보다는 햄버거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시골생활 15년. 이제는 닭똥 냄새가 구수하게만 느껴진다는 이 교수 부부는 고향인 서울에 가면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난단다. 어느새 훌쩍 커 지난해 미국으로 시집간 딸도 간혹 함석집이 그립단다. 오실 때마다 “이런 데서 살지 말고 제발 나오라”는 장모님의 잔소리도 이젠 아무렇지 않다. 두 부부는 이 너덜너덜한 함석집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토종닭을 가리키며)얘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디 가겠어요. 이제 평생 얘들하고 여기 살아야죠.”
노랗게 물든 가을 들녘이 평화롭게 휘감고 있는 강릉시 회산동 심씨마을. 이곳에서 15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이원종 (52·강릉대 식품과학과) 교수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밭두렁을 따라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개량 한옥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 한눈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빨간 함석 지붕집이 바로 ‘교수님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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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시골 농가에 살며 손수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사짓는 교수’다. 단순히 취미삼아 농사를 짓는 그런 ‘무늬만 농부’가 아니라 20여년 농사를 지어온 ‘베테랑 농부’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멜빵바지에 장화를 신고 집앞 텃밭을 일구며 구기자, 고구마, 개두릅, 호박, 가지, 쑥갓, 상추, 고추, 근대, 당근, 감자, 토마토 등 50여종의 채소를 텃밭에서 직접 길러먹는다.
이 교수가 처음으로 농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초 미국 노스다코타주립대 유학 시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 손에 흙 묻혀 본 적도 없었던 그가 학교에서 1년에 10달러만 내면 학생들에게 양도해주는 밭에다 깻잎과 상추를 기르면서부터였다. 아무 것도 없던 씨앗에서 줄기가 뻗고 이파리가 돋는 걸 지켜보면서 ‘농사짓는 재미’를 처음 맛봤으며 지금은 아예 그속에 투신해서 살고 있다. 교수 경력(86년 부임)보다 농부 경력이 조금더 오래 됐으니 어쩌면 ‘교수하는 농부’가 더 정확한 타이틀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농사가 좋다지만 함석집에서 살 각오를 하기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강단에 섰을 때는 강릉 시내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둘째 딸아이가 잔병치레를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이었죠. 그러다가 교환교수로 잠시 캐나다에 갔는데 아이가 몰라보게 건강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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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숨겨놓은 재산이 엄청난 줄 아는 사람들도 있어요. 설마 교수 전재산이 이것밖에 없겠느냐며 의심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진짜 전부예요.”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 ‘거친 음식’이다. 전공이 식품과학인지라 원래 건강음식에 관심이 많았는데 채소를 직접 길러먹다 보니 이론과 실제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원종 교수가 말하는 ‘거친 음식’이란 온실 속 화초처럼 화학 비료의 ‘보호’를 받으며 유약하게 길러진 음식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에서 스스로 자라난 식품을 말한다. 그런 자생력을 지닌 식품일수록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생리활성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우리 몸도 튼튼하게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지난 7월에는 그간 ‘거친 음식’을 직접 재배해서 먹고 산 경험을 바탕으로 책(위기의 식탁을 구하는 ‘거친 음식’)을 펴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앞마당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토종닭을 가리키며 “저렇게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토종닭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친 동물성 음식”이라고 말했다. 닭 얘기가 나오니 할말이 많은 듯 이 교수의 얼굴에 희색이 돈다.
“닭은 저희 식구나 다름없어요. 벌써 ‘닭 아빠’ 생활한 지도 20년이 넘었네요.”
유학 시절 연구실에서 실험용으로 사용됐던 닭들을 처분해야 하는데 ‘실험용’이라고 낙인찍힌 닭들이라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도 없고, 결국 닭 잡는 법을 배워 며칠 동안 죽은 닭을 양손에 주렁주렁 싸들고 집에 와야 했다. “한동안은 꿈에 닭이 나타날까 무서울 정도였다”며 부인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닭을 직접 키우게 된 건 시골집으로 이사오면서부터다. 채소만 먹다보니 단백질이 부족한 것 같아 토종닭 파는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몇 마리를 사서 길렀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한 마리씩 잡아먹고, 달걀을 받아서 이웃과 나눠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자처럼 고운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단칼에 닭을 치는 이 교수를 보고 친구들은 ‘닭백정’이라고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 한창 인터뷰 중인데 갑자기 이 교수가 벌떡 일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중요한 손님이라도 왔나 했더니 시커먼 도둑고양이가 닭 우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고양이 녀석들 얼마나 고약한지, 우리가 어떻게 ‘모셔온’ 닭들인데 호시탐탐 노린다니까요. 저 녀석들이 제일 무서워요.” 옆에 있던 부인의 설명이다.
이제 시골사람 다 됐지만 처음에는 이 교수 가족들도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미국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던 큰딸 아이가 제일 문제였다. 큰딸 아이는 비만 오면 질퍽해지는 시골길도 싫어했고, 밭에서 길러낸 채소보다는 햄버거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시골생활 15년. 이제는 닭똥 냄새가 구수하게만 느껴진다는 이 교수 부부는 고향인 서울에 가면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난단다. 어느새 훌쩍 커 지난해 미국으로 시집간 딸도 간혹 함석집이 그립단다. 오실 때마다 “이런 데서 살지 말고 제발 나오라”는 장모님의 잔소리도 이젠 아무렇지 않다. 두 부부는 이 너덜너덜한 함석집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토종닭을 가리키며)얘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디 가겠어요. 이제 평생 얘들하고 여기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