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육낙현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홍정식 활빈단 단장(간도탈환운동본부 대표)등 간도 관련 단체 회원 10여명은 24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간도협약 무효 국회결의안 통과 지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 |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
간도되찾기운동본부(www.gando.or.kr), 한국간도학회 등 회원 10여명과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등은 24일 오후 2시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간도협약 무효 국회결의안 지지 및 국회 본회의 통과 요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앞서 지난 3일 김 의원 등 여야 의원 59명은 간도협약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회원들은 "간도는 근대 조선 말까지도 청나라와 영유권 분쟁에 있었고 우리 민족이 개척하고 실질적 영유권을 행사한 우리 영토였다"며 "2009년이면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기때문에 우리의 대응은 더욱 시급하다"고 말했다.
추석을 맞아 귀향길에 오른 시민들이 이들의 주장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고등학생부터 나이지긋한 할아버지까지 많은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회원들이 서명운동을 받고있는 동안 택시운전 기사를 하면서 작곡활동을 하는 임승완씨 등 3명이 '간도 아리랑', '간도 회복 아리랑' 등을 불렀다.
| | | ▲ 지난 1954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간된 청나라 때 영역을 표시한 지도. 조선을 비롯해 연해주, 파키스탄, 네팔, 인도차이나 반도 등을 모두 앞으로 중국이 수복해야할 영토로 표시해놓았다. | |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서명장에는 간도가 우리 땅임을 입증하는 많은 고지도들이 전시됐다. 특히 전시된 지도 가운데 지난 1954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간된 청나라 때 영역을 표시한 지도가 관심을 끌었다.
이 지도는 조선, 연해주, 월남·캄보디아·미얀마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 파키스탄·네팔·부탄 등 인도와의 국경 지대를 모두 중국이 앞으로 수복해야할 영토로 표시해놓았다.
이 지도의 조선에 대한 설명은 "1636년 청나라 태종이 평정, 1895년 독립인정, 1897년 대한제국으로 개명, 1910년 일본으로 병합 이후 조선으로 개명" 등으로 되어있다. 즉 이 지도의 설명대로라면 1895년까지 조선은 청나라 땅이었다는 말이다.
간도되찾기 운동본부 육낙현 대표는 "서명운동 뿐만 아니라 올해 안에 간도문제와 관련한 학술대회를 여는 등 이론적인 활동도 계속할 것"이라며 "현재 상황은 어렵지만 일단 한국 정부가 중국에 정식으로 간도와 관련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다"고 말했다.
간도협약 무효 국회결의안을 주도한 김원웅 의원은 "지난 16대 때도 간도협약 무효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그때는 서명의원이 19명이었고 임기 말이어서 16대 국회가 폐회되면서 자동으로 폐기됐다"며 "그러나 지금은 17대 국회 초인데다 서명의원이 59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서명에 참가한 의원 대부분이 초선의원으로 이는 간도문제가 과거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문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국회 본회의에 제출될 경우 최소 찬성의원이 100명까지 이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희망을 보였다.
일부에서 간도문제를 지금 꺼내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사정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것에 대해 그는 "영토주권 문제는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된다, 그렇게 큰 영토를 가진 중국이 그 작은 '조어도'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다"며 "지금 불씨를 살려두고 국민들에게 공론화시켜야 남북통일 뒤라도 본격적인 간도되찾기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 ▲ 귀향길에 오른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보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 |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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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OhmyNews 간도와 영유권 주장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이 백산학회입니다. 이글 다른 곳에 퍼날러 주세요....
우리나라 학회(學會) 중에서 30년 이상의 명맥을 이어온 학회는 그리 많지 않다. 드물게 장수하고 있는 학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백산학회(白山學會)라는 사실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간도 등 북방영토 분야에게는 다행이며 자랑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백산학보 권위 지금도 증명
| 북방영토 관련 분야에서 거의 유일한 학회가 바로 '백산'이다. 정부의 담당부서도 없는 실정에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북방영토연구 논문을 다루는 학회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북방영토 분야에서 백산학회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지금도 백산학회에서 내는 백산학보에 실린 논문은 자주 인용되고 있다." 영토관계 연구 학자의 말이었다. 백산학회. 1966년 설립되어 32년 전통을 이어온 북방·대륙관계사 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학자들의 연구단체이다. 이름의 '백산'은 바로 백두산을 가리키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에서 기원되었기에 붙이게 되었다. 백산학회는 매년 1~2권의 학회지를 쉬지 않고 발간해 왔는데 내년이면 50호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백산학회는 현재 신형식(申瀅植. 이화여대 교수. 신라사) 회장을 비롯해 이융조(충북대), 박용운(고려대), 이범직(건국대), 이현희(성신여대)교수 등이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약 7백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회원은 주로 대학의 석사학위 이상의 연구자들이다. 초대회장 김상기씨를 시작으로 유봉영, 조해송, 신형식씨까지 모두 4명의 회장이 역임했다. 오랫동안 평의원제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편집위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거쳐간 평의원·편집위원들의 면면은 역사학 분야에서 주로 고대사 연구자들이었다. 그만큼 영토문제에 대한 연구가 지금껏 역사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7년 넘게 백산과 보낸 육낙현 간사
그러나 30년 전통의 북방,대륙관계사 연구의 산실은 지금 버젓한 사무실 하나 없었다. 북방영토에 대한 국내의 일천한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었다. 을지로의 자그마한 건물에 세들어 있는 백산문화가 바로 백산학회 사무실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백산문화는 백산학회의 총무간사인 육낙현(陸洛現. 55) 씨가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 학회 사무실은 없는 셈이고 단지 연락 장소이다. 그러나 육씨는 이렇게나마 백산학회가 명맥을 유지하며 그 오랜 전통을 자랑하게 해주는 장본인이다. 영토문제로 그를 아는 사람은 육씨를 "학자는 아니나 북방영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학술세미나 같은 것이 열리게 되면 사실상 실무를 거의 도맡아 뛰어 다닌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가 백산학회 일에 뛰어든 것은 1981년부터. 백산학보가 약 27호 정도 발간되었을 때이니 백산과 17년 넘게 보낸 것이다. 85년부터는 생업을 위해 출판사 백산문화를 열어 주로 역사 관련 출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돈 버는 일과는 무관한 일이어서 아직도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가 백산학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81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 있을 당시 유봉영 이사장과 만나면서였다. 그때 처음 이 일에 관여하면서 사명감이 일었다고 한다.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 그가 학회 일에 빠져 열심히 뛰는 이유는 이것이다. 전셋집도 개의치 않고 뭔가 나라에 득이 될 일을 하고 사는 게 그는 못내 뿌듯하다고 했다. 북방영토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이 아쉬워 손수 「간도 영유권 관계 자료집」을 편집, 발간하여 정부 기관에 보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의 주의를 환기시켜 왔다. 그러나 '대답 없는 메아리'였을 뿐이었다. "2009년이 되면 간도의 제소시효가 만료된다. 제소만 일단 해 놓으면 시효는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代에서 되찾지 못하더라도 다음代에서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회일을 하면서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은 정부의 제소이다.
| 초대 김상기 회장 | | 2대 유봉영 회장 | | 3대 신형식 회장 | 육 간사의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하루 빨리 백산학회가 창립 당시인 70년대처럼 활성화되는 것이다. 학회의 활성은 직접적으로 북방영토에 대한 좋은 징조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초기의 권위와 활동 되찾고파
사실 백산학회가 창립되어 70년대까지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학보에 실린 논문의 질도 아주 높았다. 한국을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로 학보를 세계 각국에 보내 그 발송비만도 엄청났다고 한다. 이 비용은 당시 정부지원이 있었고, 또한 기업 언론사 등도 후원이 있어서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래서 학회운영을 위한 기금까지 마련하는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사양길을 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독립적으로 운영하던 학회 사무실도 운영난으로 없어져 버렸다. 기금마련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인 정재호씨(학회 평의원)가 백산학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 정계에 활동을 많이 했던 덕이 컸다. 그는 기업인이면서도 '백산'의 창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초대 회장인 김상기씨는 작고할 때 살던 집이 팔리면 '백산' 운영에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남루한 학회 사무실을 보며 느꼈던 아쉬움은 많이 위로가 되었다. 특히 몇 십 년 동안 계속해서 후원금을 내주는 기업인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 여기저기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재호씨는 아주 최근까지 후원금을 계속 내주었다고 한다. 한때는 기금마련 단계까지 갔던 백산학회.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후퇴해 버렸다. 중국과의 수교로 그 땅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관심이나 열의는 좀처럼 살아날 줄 모른다. 우리의 북방영토 연구가 점점 후퇴되어 버린 것이다. 육 간사는 그러나 희망을 주었다. 6~7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점점 수준 높은 논문이 더 많이 들어오는 등 소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