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우리땅 찾기.. 대통령이 나서라 제 영토도 못 지키는 현실 안타까워 2004년 09월 06일 PM 12:56:39 | | | 활빈단, 우리땅 '간도'를 되찾기 위한 간도탈환국민운동본부결성 - 독도에 대한 일본의 끊임없는 망언과 함께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가 이슈가 되면서 '영토(領土)'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시민단체들이 앞장서 제국침략주의 일본에 의해 잃어버리고 잊혀져 온 우리 땅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로 불르기도 했음) 간도(間島)찾기범국민운동에 나섰다. 활빈단(대표.홍정식)은 6일 노무현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위원장에게도(통일부홈페이지 자유게시판 통해) 간도되찾기에 대통령 등 남북한정부가 직접 나서 강도높게 전개해줄 것을 촉구하는 국민의 소리를 전하기로 했다. 특히 활빈단은 '잊혀진 우리땅 간도를 되찾자'며 김영삼.김대중(YS,DJ) 전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들에게도 살아생전에 되찾은 간도땅 밟아 볼 것을 호소하고 예비역장성,역사학자,역사학도,시민단체,애국시민들이 우리땅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 총집결해 한목소리를 낼 것을 호소했다. 이와 함께 활빈단은 한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 반쪽을 북한이 중국에게 분할해 준 민족반역행위를 규탄하고 북한의 백두산 분할이 불법행위이며, 무효임을 전세계에 알리는데도 주력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활빈단 홍정식대표는 "북한이 민족의 영산 반쪽을 중국에게 넘겨준 백두산 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인 잊어버린 땅, 간도(間島)는 일찍이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땅인데, 정작 우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르고 잊어 온 민족의 엄청난 수난의 역사속에 가려져 있는 망각속의 땅이 돼 버렸다"고 분개했다. 또한 활빈단은 국회재적 299명 국회의원중 52명 의원들만 간도되찾기운동에 나서고 나머지의원과 외교통상부장차관 등 고위공직자들은 수수방관,침묵하고 있는 것에 개탄을 금치못해 분노를 느끼기까지 한다면서, 애국심 옅은 이들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들에게 '간도무심국민의대변자'라 적힌 동뺏지를 나눠주고 의원 및 장차관승용차와 집대문, 사무실문에도 질책하는 내용문이 적힌 스티커를 붙여줘 경종을 울려줄 방침이다. 요량이다 한편 활빈단은 지난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힘센 나라들은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영토사냥에 혈안이 됐었고, 힘없는 나라들은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걸며 몸부림을 쳐왔다면서, 제 영토도 지키지 못하는 오늘의 국내 현실에 일침(一針)을 가했다.
♠성 명 서(전문) 1.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은 일제가 우리 땅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대신 만주철도 부설권, 석탄 채굴권 등 각종 이권을 챙긴 것"이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이 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이 "강제.협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명시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원천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당연히 무효"임을 내외에 선언한다. 1.국민들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는 우리 땅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고착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과 "52년 중.일 간에 체결한 평화조약에도 양국은 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협약.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돼 있다"는 조항을 상기해 간도되찾기에 국민역량을 총집결시키자! 1.한국 영토의 43배가 넘는 땅을 가진 나라가 벼룩의 간을 빼 먹듯 우리영토인 백두산의 할양을 북한에 강요해 결국 일부를 뺏아간 중국의 소탐작태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1.1909년 청·일간에 불법적으로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 우리 정부는 간도협약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동안 북·중간에 양국의 변계조약을 체결하는 등 일련의 변화가 있었지만 중국의 간도지역의 불법점유에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불법점유에 대한 방조는 우리 정부가 중국의 시효 취득을 인정한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부는 나라의 몸뚱이 일부가 잘라져 나가는데도 중국눈치나 보며 ‘외교적 차원의 고려’라는 눈앞의 이해 관계를 이유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정부는 간도협약은 원천무효이지만 주장할수있는 기간은 국제법상 앞으로 5년밖에 안남았음을 상기하라. 자연적 형성된 無主 중립지대에 대해선 실효적 지배권·역사적 權原이 주인으로 결정된다는 점을 냉철히 인식해 우리 정부는 자료확보해 영유권 주장해 외교총력전을 펼쳐 간도땅을 되찾아라! 1.해외교포를 포함한 남북한 국민 모두는 간도가 발해와 고구려의 활동무대로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이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땅임을 직시하고. 간도의 역사와 간도 되찾기 운동에 하나로 똘똘뭉치자!
♠국민 여론 '빼앗긴 땅.역사 찾기' 여론 비등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빼앗긴 우리 영토가 있다. 노력하면 되찾을 수 있지만 그곳은 여전히 남의 땅으로 버려져 있다. 이제 6년이 지나면 완전히 남의 땅이 되어 버린다는 주장도 있다. 그 땅의 이름은 간도(間島). 시인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 나오는 북간도가 그곳이다. 하지만 대개는 한자만 보고 어디 북방 변두리의 작은 섬으로 짐작한다. 간도는 섬이 아니다. 간도는 우리 민족이 태동하고 찬란한 역사를 영위했던 광활한 북방영토의 이름이다. 간도라 하면 넓게는 만주 지역 전체를 일컫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 우리가 흔히 ‘옌볜’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옌볜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간도의 중심인 옌지 시내는 이곳이 조선족의 자치주임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한글 간판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갖가지 잡다한 물품을 팔고 있는 재래시장은 특히 낯이 익었다. 우리나라의 70년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모든 것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어 남의 나라, 남의 땅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간도에 이주해 땅을 일구고 개척한 것은 우리 민족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청나라에 영유권을 넘기면서 중국 영토로 편입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간도는 민족의 설움과 상처를 한 몸에 안은 채 잊혀져 가고 있는 비운의 영토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요한 모든 조약들이 원천 무효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유독 간도협약에 있어서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우리가 방관하는 사이 중국은 간도영유권에 대한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면 과연 간도를 되찾을 방법은 있는가. 인천대 법학과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정부가 의지를 갖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면서 “당장 정부가 나서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식선언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고, 간도가 ‘영토분쟁’이 있는 지역임을 국제 사회에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전제 하에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유리한 자료를 수집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간도가 북한과 접해 있어 우리 정부가 나설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국가 차원의 대응은 1975년 국회에서 간도자료집을 만든 것이 전부라고 한다. 간도영유권 연구도 몇몇 학자들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북방영토 연구에 전문성을 가진 학술단체는 ‘백산학회’가 유일하고, 이마저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30년간 간도문제를 연구했다는 모 교수는 “연구를 통해 간도영유권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며 “솔직히 더 연구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지 오래”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민족정신을 일깨운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2백여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광활한 우리의 북방영토 간도. 분명 간도는 섬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잊혀진 땅이기에 그곳은 섬보다 더 멀고 외롭다. 경인교육대학 강석화 교수(한국사)는 “영토 귀속을 판단하는 데는 그 나라 국민의 영토의식도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온 국민이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경제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간도문제를 좀더 두고 보자는 신중론도 있다. 그러나 영토보전은 경제논리에 앞서는 원초적인 문제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다. 석정희 기자 | junghee@massmedianews.com |
|
|
|
|
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지금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동쪽 끝에 있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거의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 한국에서 간도라고 하는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옌지다오〔延吉道〕라고 한다. 이 지역 곧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또는 동간도)라고 칭하고,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하류유역, 즉 지금의 지린성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에 해당되는 곳을 서간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간도지방이라고 하면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청(淸)나라의 발상지에 가까워 청나라 왕조가 봉금(封禁)의 땅, 즉 이주를 금하는 무인지대로 삼았으므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 해서 붙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간도(墾島)·간도(艮島)라고도 적었는데, 앞의 것은 조선 후기에 조선 농민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고, 뒤의 것은 조선의 정북과 정동 사이에 자리잡은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형은 남서쪽에 백두산(2,744 m)을 주봉으로 하는 창바이산맥[長白山脈]이 달리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북한과의 국경으로 두만강이 흐르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다리링[大麗嶺]·라오예링[老爺嶺]·장광차이링[張廣才嶺]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5월 초순까지 강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하여 지린성에는, 거의 북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설치되어 있고, 압록강측의 서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두 지역을 비롯한 지린성에는 104만(1982)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구의 과반수를 넘는 이들은 조선족 특유의 생활·풍습과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원래 간도는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며, 발해도 이곳을 영토로 삼았다. 고려 때와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후 조선 후기 숙종 38년(1712)에는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졌으며, 철종 말·고종 초부터 한국인의 개간과 이주가 시작되었다. 특히 1869년 무렵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지방으로 들어갔다. 본래 간도지방은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에 가까워 봉금지역으로 정하여 만주족 이외의 입식(入植)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이주한 조선인에 의해서 개간이 진척되어, 1882년 청나라 정부가 한인(漢人)에게 개간을 공인해 주었을 때는 이미 많은 땅이 개간된 뒤였다. 그 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간의 간도지방 국경문제는 미확정이었으나, 조선의 외교권을 쥐게 된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조선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주장하는 국경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무렵인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침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또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찾아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이 급증하였는데, 이때(1910년 9월∼1911년 12월) 간도로 간 사람은 2만 5000여명이나 되었다. 또 일제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조선 농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1926년에는 간도지방의 조선인 호수는 5만 2881호(중국인 호수는 9912호)였고, 농토는 전체의 52%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한국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건너간 간도는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투쟁의 기지가 되었다. 많은 민족운동가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1910년대의 의병투쟁, 20년대의 항일독립군 등으로 일관해서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주사변(1931)을 전후한 시기에는 간도의 한국인은 일본의 침략주의와 중국 관헌의 대항 사이에 끼어, 예를 들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같은 복잡한 고난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항일투쟁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1945년 8월에는 중공군이 간도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49년의 중공정부 수립 후 52년에 연변조선족자치구, 55년에 자치주가 되어 조선족의 민족자치가 인정되었다.
<간도에서의 항일독립운동> <기지 건설>1910년 무렵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간도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결과, 서간도에서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고, 북간도에서는 명동촌(明東村)과 왕청현(汪淸縣)의 나자구(羅子溝)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가 세워졌다. 삼원보에는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항일 민족지도자들이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군사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명동촌에는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한편으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나자구에는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간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또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의 미산〔密山〕에는 신민회가 세운 무관학교에서 1500명 가량의 한국교포청년이 훈련받으며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독립투쟁의 전개> 한국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간도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평화적인 시위였던 3·1운동의 한계를 느낀 한민족 사이에서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론이 대두되었고,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모든 교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잇달아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 현지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며, 1919년과 20년의 2년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국 국내에 침투하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조기에 제거하려고 1920년 10월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2개 연대의 병력과 시베리아 주둔의 병력 일부를 동원하여 이른바 간도출병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지역인 지린성과 옌지다오 일원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싸움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었는데, 이 두 전투에서 독립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봉오동으로 유인, 기습하여 157명의 전사자와 300여명의 전상자를 내게 한 전투였고,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통솔한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교전을 벌여 연대장을 포함한 적군 1200명을 사살한 승전이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 독립군이 만주의 동포들이 전적으로 지원해 준 인적·물적 자원으로 이 대규모의 독립전쟁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간도지역의 동포를 비롯한 재만교포와 모든 한민족에게 독립투쟁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군대를 대거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으나, 주력부대는 이미 소만국경지대의 미산으로 이동한 뒤였으므로, 무고한 재만 한국인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산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이곳에서 약 3500명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1921년에 소만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으로 옮겨 갔으며, 알렉세브스크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1922년 말 무렵부터 다시 간도지역으로 복귀하여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이 일제의 완전지배하에 들어간 1933년에 한국독립군은 활동을 중지하였고, 끈질긴 투쟁을 하던 조선혁명군도 38년 해체되었다.
<현황> 간도지역에는 1930년대에 조선족이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며, 현재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의 과반수인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행정중심지는 옌지〔延吉〕시이며, 그밖에 투먼〔圖門〕와 옌지·왕칭〔汪淸〕·훈춘〔琿春〕·허룽〔和龍〕·안투〔安圖〕·둔화〔敦化〕의 6현(縣)이 있고, 압록강 쪽에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임업이 활발하여 옌지시[延吉市]에서는 훈춘재[琿春材]·젠다오재[間島材]라고 하는 목재를 산출한다. 옌지 분지는 한민족이 최초로 벼를 이식한 곳으로 수도작(水稻作)이 이루어지며, 그 밖에 콩·수수·옥수수·보리 등도 재배된다. 광물자원은 석탄·유모혈암(油母頁岩)·구리·납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룽징[龍井]에는 제강, 라오터우거우[老頭溝]·허룽[和龍]에는 탄광, 톈바오산[天寶山]에는 구리·납 광산이 있다. 한편 분지와 계곡은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젠다오미〔間島米〕의 산지이며, 수수·콩·담배와 인삼·녹용 등의 한방약재, 목재 등이 많이 난다. 탄광의 개발과 철강·기계·금속·방적 및 제지업이 성행하고 민족색이 짙은 도자기, 조선비단을 생산한다. 또 연변대학 등 조선족 특색을 살린 교육·문화시설이 있다.
<간도문제> 19세기 후반에 우리 겨레의 이주민이 늘어 그 곳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꾸미자, 청나라는 간도 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조정에 한민족 철수를 요구하여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삼아 이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겨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간도의 소유권을 계속 주장했다. 그 뒤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켜 관리하게 하는 한편, 포병을 기르고 조세를 받아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여 자기들이 관리한다고 하며 간도 파출소를 두더니, 1909년(융희 3년)에 간도 협약을 맺고 만주(중국 동북 지방)에 안봉선을 건설하는 권리를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고 말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