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장인 권오석, 애국자들 학살했다 3-5일 마산서 ´권오석 행적 다큐´ 1차촬영 유가족 오열…"권여사 재판현장에 있었다" 권오석씨 묘 새단장…인근엔 경비초소까지 2004-09-06 17:51:30 현정권 실세, 그 중에서도 한 나라 대통령의 치부를 건드리는 일은 참으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특히 그 치부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약자라면, 두려움과 자신을 둘러싼 안위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 맨 위부터 1. 권씨에 의해 학살된 변증섭씨 아들들이 차례를 지내는 모습. 2. 1950년 12월 1일 학살된 양민 11명의 합동 장례를 치르는 사진(사진제공 : 변재웅씨), 3. 다큐 촬영을 위해 증언을 해 줄 유가족들. ´盧장인 다큐-민간인학살 진실을 말한다´(가칭) 촬영을 위해 서울을 떠나 6시간을 달려 도착한 경남 마산시 진전면. 많은 감시(?)와 관심속에 우리의 첫 발을 내딛은 곳은 감나무가 드리워진 낮은 담장과 오래된 건물임을 증명하는 이끼 낀 기와로 덮힌 시골 농가였다. 그 농가의 주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씨로부터 학살당한 故변백섭 면장의 바로 밑 남동생 만섭(89. 유가족 대표를 맡고 있는 변재환씨의 부친)씨다. 변만섭씨의 뒤로 그의 조카들, 이번 다큐의 중심적 증언을 해줄 변재원(74. 변백섭 면장과 함께 강금 당한 유일한 조카)씨와 변재희(70.故변백섭씨의 셋째 형의 3남)씨가 앞서 도착해 촬영일행을 맞았다. 우연히도 9월 3일(음력 7월 19일)은 권오석씨에 의해 학살된 11인 중 9인이 학살된 날이었다. 그 자손들이 진전면에서 차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소식을 접했다. 촬영팀 일행은 변재희씨와 함께 1시간을 달려 권씨에 의해 학살된 故변증섭(故 변백섭씨의 6촌)씨의 자손들을 만나, 부친에 대한 기억과 부친 없이 살아온 설움 등에 대해들을 수 있었다. 변증섭씨의 장남 재웅(65)씨는 “농번기가 되면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항상 우셨다. 다른 집은 남자들이 나서서 논일을 했는데, 우리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고생을 했다”며 “부친이 없는 서러움도 서러움이지만 집안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며 술 한 잔과 함께 울분을 삭였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은 두렵다"며 “아직 (권여사 일가와)화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을 촬영팀에게 전해, 이번 다큐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느끼면서 첫날 촬영을 마쳤다.
- 맨 위부터 1. 당시 창원군 치안 본부대가 자리했던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의 현재 모습. 2. 변백섭 면장의 둘째 딸 경숙씨가 부친이 학살당한 현장에 도착하자 울분을 토하고 있다. 3. 권오석의 묘. 4. 권씨 묘 주변의 경비초소. 둘째 날은 각지에서 온 유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산 진동면에 위치한 변증섭씨의 차남 변재욱(62)씨가 경영하는 식당에 한데 모인 15명의 유가족들은 어렵게 살아 온 시절, 당시 경험담 등 저마다 할말도 많고 구구절절 사연도 깊었다. 이들의 수십 년 한을 몇 시간의 인터뷰로 다 담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가족들은 맺힌 한이 많았다. 특히 이날은 앞서 [월간조선]에 보도된 것 외에 추가적인 증언들이 나와, 촬영팀의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변백섭씨의 조카 변재원씨는 권오석씨와 그를 부축하는 부인, 그리고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던 권양숙 여사의 뒷모습을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고, 당시 권오석씨로부터 재판을 받았다는 김창수(74)씨는 자신이 재판을 받을 당시 어린 권여사와 모친이 함께 자리했었다고 증언했다. 또, 젊은 나이에 남편을 권씨로부터 잃고 어린 딸마져 병으로 숨져 너무 괴로워서 음독자살까지 하려고 했었다던 故주정호(권씨로부터 학살)씨의 미망인 정연순(78)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당시 상황을 설명해, 보는 이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정씨는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무척 어려웠음을 밝히며 죽은 남편의 한을 풀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후 촬영팀은 유족들과 함께 자리를 옮겨 당시 창원군 치안대 본부가 위치했던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로 향했다. 적석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방마을은 아슬아슬한 계단식 지형으로 정상인이 다니기에도 비좁고 위험해 보여 당시 후천적 장님이었던 권오석씨가 외부활동을 하기에는 타인의 도움이 절대 필요했을 것으로 보였다.
- 맨 위부터 1. 권씨에 의해 학살당한 변백섭 면장의 묘. 2. 변면장 묘 옆에 세워진 비문을 설명하는 조카 변재희씨. 3. 변면장과 함께 강금되어 권씨로 부터 재판을 받은 조카 변재원씨가 그림을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또, 대방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민학살 장소는 꼬불꼬불한 돌길을 차로 15분, 도보로 20분 정도 걸어야 나오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촬영팀과 함께 이 곳을 처음 찾은 변백섭씨의 둘째딸 경숙(71)씨는 “여기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냐”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경숙씨는 “살인자 자식은 청와대에서 호의호식하는데, 아버지 죄송합니다”라며 통곡해 함께 있던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유족들은 한참동안 학살 현장에서 침울해 했다. 촬영팀도 같이 마음이 무거워져 왔고, 이번 다큐를 통해 진실을 제대로 밝혀 유족들의 억눌렸던 한을 풀어줘야겠다는 사명감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침통한 마음을 추스르고 유족들과 다시 이동한 곳은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권오석씨의 묘. 권씨의 묘는 새로 확장해 단장한 듯 묘 주변은 아직 황토에 듬성듬성 잔디가 심어진 상태였다. 또 최근 이장한 듯한 3개의 권씨 일가 무덤들이 함께 있었고 권씨 묘 옆에는 권여사 모친의 묘자리 터로 보이는 빈공간이 있었다. 또 묘 주변에는 베어진 나무들과 함께 묘를 단장하기 위한 재료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으며 경비초소도 있었다. 권씨 묘 주변에 위치한 한 전원카페 관계자는 “올 봄부터 잔디와 황토를 새로 깔았다. 또, 장식을 하기 위해 석재들을 실어 왔으나, 한달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철수 했다”고 밝히며 “경찰들이 매일은 아니지만 묘지(훼손 등)를 감시하기 위해 경비를 섰으나 오늘은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권오석씨의 묘를 보며 촬영팀과 기자들에게 “꼭 한을 풀어 달라. 기자들이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고 거듭 당부의 말을 전했고, 이렇게 둘째 날 촬영도 마무리 됐다. 1차 촬영 마지막인 5일에는 故변백섭씨의 묘를 찾았다. 그의 묘 주변은 무성한 세월 만큼이나 길게 자란 풀들이 채워져 있었다. 변백섭씨가 그렇게 귀여워했다던 변재환씨는 숙부님의 묘 주변을 벌초하며 고인의 한을 꼭 풀어드리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묘지 옆 비석에는 "동족상잔 비극의 와중에서 애국과 새조국 건설에 전념하던 그이의 올곧은 의기를 꺽어놓을 줄이야. 이념의 굴레에 눈감긴 저들의 만행에 참화를 당하니..."라는 구절이 있어 변백섭씨가 살아 생전 애국자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조카 변재희씨는 학살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의 말을 빌어 “숙부님이 죽기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권오석씨와 그의 무리들은 ‘악질 반동분자‘라며 돌과 죽창으로 숙부님을 무참히 찔러 죽였다”고 변백섭씨의 애국심이 남 달랐음을 증언했다. 또 일부 유족들도 변백섭씨가 인민재판 당시 남한체제를 숭배하고, 공산체제로 전향을 하지 않은 등의 이유로 ´반동분자´로 지목돼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2박 3일간의 촬영 일정을 통해 유족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니냐”는 두려움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하는 모습도 역력했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진실을 밝혀, 한을 풀고 가야한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또,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어렵게 살아온 자식들의 설움, 남편과 자식을 잃고 괴로움의 나날을 살아온 미망인의 절개가 1차 다큐 촬영의 주요한 책임감과 무게감을 실어 주었다. 이렇게´盧장인 다큐-민간인학살 진실을 말한다´(가칭)가 2박 3일간의 1차 촬영을 끝마쳤다. 한편 유족들의 증언을 담는 현장에는 마산시 주민자치과 직원 2명이 일찍부터 동석해 촬영과정을 살피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변효진 기자] pinkkongkong@independen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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