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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데스크] '11대 43'의 증시 딜레마..김영규 <증권부장>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지난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금리인상을 단행했을 때,월가는 '예상한 결과'라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이 사전에 금리인상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시켜준 결과였다. 월가는 금리인상 여부나 폭보다는 오히려 그린스펀의 '입'에 더 큰 무게를 뒀다. 그의 경기진단은 향후 금리동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세계 중앙은행의 총재직 역할을 수행해온 그린스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특히 미정치권 내에서는 너무 정치적이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자리보전이 정책적 줄타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월가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그의 결정이 결코 시장의 요구와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경제는 생물이다. 주위환경의 변화에 복합적인 반응을 나타내며 때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쪽으로 튀기도 한다. 시장을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몰면 부작용만 키우게 된다. '경제는 심리'란 말도 이래서 나왔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말을 빈번하게 인용했고,현 정부가 경제를 비관하는 일부 계층을 겨냥해 음모론을 제기한 것도 이같은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8·15 경축사'를 통해 "지나친 비관과 불안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경제가 심리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막연한 구호는 실망 매물을 유발하게 된다. 증시가 단적인 예다. 국내증시가 올들어 세계 주요국 증시 중 가장 낙폭이 컸다면 정부 정책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월요병'처럼 또 다시 '블랙먼데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한 주를 맞는 게 우리 증시의 현주소다.
이는 분명 증시가 외국인 손에 넘어가면서 꿈과 믿음이 사라진 결과다. 국내시장에서 외국인의 보유 지분율은 43%를 웃돌고 있다. 미국과 일본 시장의 외국인 지분율 10%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국내 기관비중이 11% 정도(지난해 말 현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미국 50%,일본과 영국의 40%대와 비교조차 어려운 왜소한 규모다.
그렇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여전히 증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기관투자가를 옥죄고 있다. '기금관리 주체는 당해 기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다'는 기금관리기본법 3조3항이 버젓이 남아있는 지금,여야 정치권이 증시를 살려야 한다고 외쳐봤자 공허할 수밖에 없다. 꿈이 없는 증시에 단타가 판치면서 카지노 자본주의 양상이 심화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와중에 힘센 외국인은 제1금융권인 은행에 이어 투신 증권 등 제2금융권도 서서히 접수하고 있다. 조지 소로스펀드가 서울증권에 이어 SK증권 등 매물로 나오는 국내 증권사들을 모두 입질하고 있지만 당국자들은 글로벌이란 명분앞에 팔짱만 끼고 있다.
정부가 시장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시장은 즉각 거부 반응을 나타낸다. 금리인하 재정확대 등 다양한 부양책도 좋지만 정부정책에 대한 믿음이 우선돼야 시장은 순기능으로 돌아선다. 경제가 어려운 지금,'8·15 경축사'가 경제해법을 제시하는 데 너무 인색했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래서다.
경제는 심리다. 정부가 '11 대 43'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나설 때 국민과 시장은 신뢰를 보내게 된다.그린스펀 효과는 구호가 아니라 시장의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