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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0회 작성일 2004-07-15 00:00
백순지회장님께...또한 광복둥이이신 55회선배님들께..

본문

백순지회장님,또한 나라되찾을 때 태어나신 광복둥이이신 55회선배님 제위

막중한 중앙교우회를 이끌 교우회장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중앙역사100년에 남을 민족사적 쾌거를 준비해보세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억지 생때를 쓰는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면 우선 애국애족심에 불타는 중앙교우20여분과 뜻을 합쳐 대마도
반환운동본부를 어느학교동창회에도 없는 특별기구로 운영하며 민족혼
을 불러 일으켜 주실 것을 특별제안드립니다.
 
미국LA등 해외에 계신 중앙교우님 모든 분들도 흔쾌히 동참해주시리라
믿습니다.여행자클럽회장님도 하셨으니 현지에 먼저 가보시구요...
 
행동하는 민족학교중앙교우회를 만드는 전기도 될수 있고 자라나는 후진
들에게도 애국심을 고양시킬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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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_icon9.gif조선, 대마도 정벌후 관직내려 통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2004-07-15 20: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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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_s_frame2.gif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高麗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 성의 제3문으로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됐다.pn_s_frame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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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高麗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 성의 제3문으로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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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_s_frame2.gif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pn_s_frame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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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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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태극기 꽂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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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icon-ps.gif 투명사회 강원운동본부와 바다살리기 국민운동 강릉지부, 녹색운동, 활빈단 등 동해안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강릉 주문진해수욕장에서 '대마도 상륙운동 발대식과 출정식'을 갖고 있다. 강릉/구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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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우리땅, 역사적 근거 충분하다”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


시민단체 활빈단(단장 홍정식)이 한 일본 극우단체의 독도상륙 시도에 반발, 8월 중 일본 대마도까지 열기구를 타고가 ‘대마도=한국땅’이라는 선언을 하기로 한 가운데 국내 역사학자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원광대 나종우 교수(원광대 사학과·한일관계사)는 6일 KBS 라디오 시사 플러스에 출연해 “대마도는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전 까지 우리 땅 이었다는 사료가 광범위 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 땅이었다며 임란 전 까지 조선시대 때 변방에 파견하는 관리였던 경차관, 채찰사등이 대마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세종원년(1419년) 대마도 정벌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땅’이라는 태종의 교유문이었다는 게 세종실록에 기록 돼 있다” 며 “일본의 역사 자료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13세기 일본의 사서 ‘진대’ 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을 비롯해 “1723년 대마도의 대학자 등정방이 편찬한 ‘대주편련락’이라는 책에도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행정구역)이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또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일본 고사기에서 대마도를 지칭하는 진도(쓰시마)는 ‘한반도에 가는 배가 머무는 곳’,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향지도는 ‘한국의 섬’ 이란 뜻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언제부터 일본 땅에 편입 됐을까.

나 교수는 그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꼽았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이나 일본 모두에게 척박한 땅인 대마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 주민에게 식량을 대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곳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이 임란 때 대마도를 한국 침략의 거점으로 이용하며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마도가 확실하게 일본 영토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초 라는게 정설.

나 교수에 따르면 임란 이후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 대마도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싹튼 민족의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8일 대마도 반환을 최초로 주장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이에 즉각 반박하면서 대마도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본격화 됐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3년동안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를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대마도=일본땅’ 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완성했다는 것.

나 교수는 “1965년 한일협정때는 다른 중대사안에 밀려 거론조차 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느라 한국정부는 대마도 문제는 거론조차 못했다”며 아쉬워 했다.

나 교수는 “일본은 시끄러울때 마다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한다면 감정적 대응밖에 안 된다. 하지만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리땅이다(대마도~후쿠오카는 147km). 우리는 만주만 잃어 버린 게 아니라 대마도도 잃었다”며 “대마도는 언젠가는 되 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해식 동아닷컴기자 pistols@donga.com 200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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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1. 대마도의 역사 개괄

'고려시대' 중엽부터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 체제' 하에서
대마도는 고려에 종속되어, 고려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대마도 구당관(對馬島 當官)'이라는 고려 관직과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주는 등 정치, 경제적으로 대마도는 고려에 속했으나, 고려말 여몽 연합군의 대마도 및 일본 정벌과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인한 고려와 대마도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대마도인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구'로 변질되어 고려말 수많은 약탈을 행하였고, 고려말 이후에도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근거지)이 되어 조선 연안 및 중국 남부 해안에서 많은 약탈을 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왜구 근절의 목적으로 수 차례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후 '수직왜인(受職倭人)(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제수 받은 왜인)' 제도 및 고려 시대의 진봉선 무역과 유사한 '세견선 무역' 등의 체제하에서 다시 대마도는 조선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하여
조선의 지리 및 실정을 정확히 아는 대마도는 '임진왜란 침략의 전진기지'가 되어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대마도는 '쓰시마'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고 당파싸움에 미친 조선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반면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므로서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대마도는 완전히 일본 정부에 편입하게 되었다. 


2. (독도와 대마도의 영유권 문제 연계 전략)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훨씬 시기적 연원도 깊고 자료도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대마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 노력 및 전국민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며 일본이 독도문제를 제기할 때 마다 우리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즉, 한일간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반드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고 '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현재의 독도와 같은 외교적인 문제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한일관계사학회


 
3.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대마도 반환 불씨 지펴야*<한겨레21에서 발췌한 기사>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는 건국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한후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에도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하였으나 일본측의 항의와 당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온 내각이 발칵 뒤집히며 반발하였다.
그런데도 이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9년 1월6일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한 이대통령은 이틀 후인 1월8일, 대일강화회의 참가계획을 발표하면서 또 한 번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앞으로 열릴 대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깔고 있는 올바른 발언이었다.

대마도는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대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혼이 깃들인 섬이다.
올해 4월 부산 부경대학교(구 부산수산대) 강남주 총장은 대마도에서 입시설명회를 갖고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150km쯤 떨어져 있는 일본보다는 53km 만 떨어져 있는 한국을 더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강총장이 대마도에서 입시 설명회를 갖고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깊이 음미해볼 만한 일이다.

구한말 국제정세에 우둔했던 우리는 쇄국정책을 선택해, 대마도가 일본의 억압 속에 일본 영토로 귀속된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당당히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따져볼 때다.


 
 대마도는 원래 한국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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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1806)]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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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전도(1860)](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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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국도(제작시기 미상 - 일본 가고시마현 현립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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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4 (화) 17:38 연합뉴스 연합뉴스 기사보기

활빈단 `대마도=한국땅' 선언할 것"

(대구=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한 극우단체가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것이라고 선언한 가운데 우리나라의 시민단체인 활빈단이 일본 대마도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활빈단 관계자는 4일 "오는 8월 15일이나 국치일인 8월 29일에 부산을 출발, 일 본 대마도까지 열기구를 타고 가 대마도에서 `대마도=한국땅'이라는 선언을 할 방침 "이라고 밝혔다.

활빈단은 또 일본 사도회의 독도 상륙 시도와 관련,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포 항.울릉지역 시민단체와 독립유공자유족회, 독도 관련 NGO 등과 독도침탈 망발 규탄 및 응징을 위한 긴급대책모임을 결성, 이들의 야욕과 망발에 쐐기를 박는 강경 대응 책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어 "(사도회의 독도 상륙 기도 선언은) 중.일간 센카쿠 열도 분쟁처럼 한.일 외교마찰을 야기하려는 의도가 농후하다"고 진단하고 관계 당국이 이들의 정체파악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duc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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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활빈단,日극우단체 독도상륙기도 강력대응 나섰다


일본 극우단체 '시도카이(士道會)' 독도 상륙시도에 대한 시민단체들이 반발이 거세다.

4일 시민단체인 활빈단은(단장 홍정식) '사도회'의 우발적 행위에 민족수호차원에서 열기구를 타고 대마도로 가 '대마도는 한국령'이라는 시위도 감행하는 등의 강력한 응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또 독립유공자유족회(회장.김삼렬), 동해수호국민운동본부(상임대표.최인상),투명사회운동본부(대표.박순종), 윤봉길의사 월진회(회장.박충신)및 민족문제연, 독도관련NGO, 경북포항.울릉지역 시민단체등 민족호국단체들과 함께 독도침탈망발규탄및 응징 긴급대책모임을 결성한후 이들의 독도침탈 야욕과 망발에 쐐기를 박는 강경대응책도 논의할 예정이다.

아울러 활빈단은 국정원,외교통상부,경찰청외사정보부등 관계당국이 중.일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타이)분쟁처럼 한.일외교마찰을 야기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이들의 확실한 정체파악에 즉각 나서라고 요구했다.

뿐만아니라 이들이 우리 영해를 넘어올 경우 해경이 국내법과 국제법에 따라 강력히 대응해 지체없이 선박과 침략자들을 긴급체포후 서대문독립공원및 역사박물관등으로 압송해 줄 것도 촉구했다.

따라서 이들이 전시된 일본의 침략만행 사진자료등을 바르게 직시해 자국의 침략사를 깨우쳐 대오각성토록 할 것도 주문했다.

한편 활빈단은 이들의 우발적인 행동이 지나해 초 한국의 독도우표 발행시일본극우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한데 이어 2월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망언한데 자극을 받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앞서 활빈단은 지난 3.1절 85주년일에 일본 동경시내 일왕궁앞과 후지산, 나리따국제공항에서 한일합방무효 선언대회를 개최하고 일대사관과 기내에서도 고이즈미총리의 독도망언,신사참배 규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오주섭기자zoo428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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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4 (화) 16:41 연합뉴스 연합뉴스 기사보기

일본 극우단체 독도 상륙시도에 시민단체 반발

(동해=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의 한 극우 단체가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동해안 지역 시민단체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활빈단(단장.홍정식),동해수호국민운동본부(상임대표 최인상)와 투명사회운동강원본부(본부장 박순종)는 "5일부터 동해안 도로를 일주하며 일본 극우파의 독도상륙 기도 음모를 규탄하는 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4일 밝혔다.

이 단체는 또 독립유공자유족회와 독도 관련 NGO, 강원도와 경상북도 등 동해 안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독도침탈망발규탄 및 응징 긴급대책 모임을 결성,일본의 독도침탈 야욕과 망발에 쐐기를 박는 강경 대응책을 논의키로 했다.

이와 함께 시민단체 활빈단은 조만간 열기구를 타고 대마도로 가 "대마도=한국령!"이라는 시위도 감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 시코쿠(四國) 다카마쓰(高松)시 '니혼시도카이(日本士道會) 회원 4명 은 4일 소형선박을 타고 시마네(島根)현을 출항, '독도는 일본땅'이라며 해상 시위 를 벌인 뒤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것으로 알려져 해양경찰과 독도경비대가 현재 비상 근무에 돌입했다.

yoo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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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듣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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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우리땅(가사와 내용)

아~ 아~ 우리의 아리랑과 무궁화꽃 노래가
항상 울려 퍼지는 곳
우리의 섬 대마도...


아~ 부산의 야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우리의 섬 대마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상 대대로 우리의 은혜를 입은 곳
대마도....


우리의 땅 이곳은 언제부터 음~
왜인들이 차지하여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한맺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부터 쓰시마란 이름으로 바뀌어
침략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는가..


(2절)
이승만 대통령이 반환하라 외쳤던
우리의 섬 대마도..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반복) 침략자 일본은 들어라.
그대들의 스승 호오슈의
위대한 뜻을 기억하며 대마도를 반환하라.


우리의 섬. 대마도!

거제도에서 바라보는 일본의 대마도 .... .img_pre_n.gifimg_next_n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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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가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img_pre_n2.gifimg_next_n.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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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1792_1.jpg현재
00343597_1.jpg다음
장승포 해안도로 일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아름다운 섬, 대마도

본토(132km)보다 부산(45.9km)이 더 가까워 … ‘조선’과의 관계가 운명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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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과 본토를 잇는 국경의 섬’. 쓰시마(대마도) 사람들은 자기네 섬을 스스로 이렇게 일컫는다.
대륙(한국)과의 거리 불과 49.5km, 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이 섬에는 오랜 한·일 문물교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라의 사신 박제상의 순국비와 백제 도래인들이 축성한 금전성, 기원전 3세기 신라의 일족이 정주하면서 전파시킨 붉은쌀(적미), 옛 이즈하라의 성문이었던 고려문 … 대마도의 중심도시인 이즈하라 항(港)에는 길목마다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
 
327284.jpg바다를 바라보는 대마도의 신사들
“해방전까지만 해도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배를 타고 가까운 부산항으로 갔다. 나가사키현 소속이지만 본토보다 부산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부산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대아해운 현지 영업부장 홍세철(39)씨의 말이다. 93년 일본유학을 계기로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그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곳 대마도에서 일본 정부가 파견한 국제교류원으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아소만에서 2대째 진주조개 양식장을 운영하는 하라다진주산업의 하라다(51) 대표는 “진주조개 종패는 대부분 한국의 충무에서 사온다”며 “겸사겸사 두어달에 한번은 부인과 함께 처가집이 있는 제주도에 간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마도가 가지고 있는 이같은 공존의 문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대마도는 80%가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힌 작은 산들의 모임이다. 높은 전망대에 올라 일본 제일의 절경이라는 아소만을 내려다보면 마치 몇 개의 큰 산을 중심으로 작은 섬들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는 일본 본토에서는 보기 힘든 대륙계 식물들과 새들이 서식한다.
6세기경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파된 불교가 가장 먼저 정착한 곳도 대마도요, 태종 때부터 조선 조정에서 보내준 대장경이 보관돼 있는가 하면, 신장 10cm 가량의 고려탄생불도 이곳에 있다.
그 옛날 왜구들의 본거지였던 아소만 북쪽에는 대마도의 수호신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궁으로 돌아갔다 하여 바닷속에 도리이를 세운 와따즈미 신사가 있다.
이 신사의 도리이는 일본 본토와는 정반대 방향인 서쪽,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본토의 신사들이 대부분 동쪽 아니면 남쪽을 향하고 있는 데 반해 대마도의 신사들은 이처럼 서쪽을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327288.jpg조선 국왕의 옥쇄까지 위조한 사연
거제도의 1.5배에 이르는 큰 섬이지만 대마도의 인구는 5만명 남짓하다.
이들이 외부와의 교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지역은 부산이다. 부산(49.5㎞)이 본토(132㎞)보다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믿음이 자리한다.
일본과 한반도의 징검다리였던 대마도는 조선과의 관계가 좋을 때 번창했고, 나쁠 때는 최악의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 전후 대마도인들이 일본과 조선의 외교문서를 위조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과 왜의 고압적 태도 사이에서, 대마도 도주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명(명나라)을 정복하러 갈 것이니, 앞장을 서라”라는 왜의 오만불손한 명령을 “명으로 건너갈 것이니, 잠시 길을 내달라”라는 유화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부터는 조선 국왕의 옥쇄까지 위조하기에 이른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자기들의 살길을 찾아야 했던 섬 주인들의 영고성쇠는 그들의 집단 묘소인 만송원(万松院·반쇼인)의 무덤 크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큰 무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에 살다간 20대와 21대 도주의 무덤이다. 반면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나서야 했던 소 요시토시의 무덤이 가장 작다. 임란 당시 대마도는 가장 궁핍하고 피폐한 상태였다.”
이즈하라 정(町)에서 국제교류원으로 일하고 있는 손수진(26)씨의 말이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통신사 초청을 성사시킨 것도 바로 소 요시토시였다. 그 이후 역대 도주들은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무덤 앞에서 결정을 했다고 한다. 조선과의 평화를 최우선시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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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287.jpg200년 이상 평화시기 계속돼
‘통신사(通信使)’란 ‘서로 믿음으로 통하는 사절’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강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조공을 바치며 다시는 조선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조선은 1609년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후 조선은 200여년 동안 총 12회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처음 3회까지는 임란 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을 찾아오기 위한 것이었고, 4회 이후부터는 양국 사이의 신뢰를 깊게 하고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가르쳐주는 데 목적을 두었다.
통신사 일행은 방문 목적에 따라 300명에서 500명에 이르렀으며 정사, 부사, 종사관과 통역, 군관과 병사, 의원, 화원(화가), 인쇄공, 악공, 뱃사공 등 학문과 기술, 예술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이 선발되었다.
일본은 막부의 장군직 계승이나 일본 국내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조선통신사를 맞이함으로써 정치적 권위를 높여나갔다.
일본은 최고 권력자가 새로 정해졌을 때 대마도 도주를 조선에 파견, 그 사실을 알리고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 사절단이 부산 초량의 왜관에서 통신사 일행을 맞아 대마도까지 안내하면 대마도부터 에도(도쿄)까지는 대마도 도주가 직접 수행을 맡았다.
대마도에서 성대한 영접행사가 끝나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여러 작은 섬을 거쳐 일본의 본토에 상륙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일본 각 지역의 영주들과 에도에서 파견된 영접 책임자들이 호위무사들과 함께 통신사 일행을 수행했다.
 
327286.jpg행렬이 지나가는 데만 5시간 걸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국빈으로 대우를 받았다.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몰려들어 학문과 기술, 문학 등 조선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고, 통신사 일행이 건네준 한시, 그림, 글씨나 책, 도자기 등을 가보로 삼기도 했다.
이들의 행렬은 500여명의 통신사 일행 외에 이들을 호위하는 대마도의 호위 무사들과 각 번의 호위병들도 가세, 행렬이 다 지나가는 데만 5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행렬이 지나가는 모든 길은 깨끗이 청소된 상태에서 모래가 뿌려졌으며, 이 행렬을 머리를 들고 바라보거나 담배연기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정도로 엄숙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통신사 행렬에 끼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많은 절차와 형식을 차려야 했고 짧게는 8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멀고 험한 행로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도중에 많은 병자와 사고를 수반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200년 이상의 평화시기를 유지시켰다.
또한 조선통신사 일행들과 일본의 학자, 문인들 사이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선의 유학은 일본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방문의 해’ 10대 사업 가운데 하나
지금도 이즈하라정(町) 사람들은 매년 8월 첫째 토·일요일이면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대축제’ 행사를 연다.
이를 위해 ‘조선통신사행렬진흥회’라는 모임까지 조직했다.
“한일간의 오랜 평화의 역사 가운데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라는 두 번의 전쟁시기는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런 우호관계는 유럽인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조선통신사행렬진흥회 야마모토 히로미(39·이즈하라정 관광협회 이사) 회장의 말이다. 그는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1년 전인 2001년에 예비행사로 한국과 함께 조선통신사 행렬을 제대로 재현하는 축제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관광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집중 육성키 위해 2001년 개최하는 ‘한국방문의 해’ 10대 사업 가운데 하나로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서 ‘한일 조선통신사축제’를 추진할 방침이다.
조선통신사 행렬 재연은 2002년 월드컵 개막전야제 행사 국민제안 공모 우수작으로도 선정됐다. 월드컵조직위는 지난해 9월 △서울의 중심대로인 남대문-광화문에서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 행렬 재연하고 △한·일 각 1,001명씩 모두 2,002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의 합동공연을 하자는 제안을 전야제 행사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 대마도=글 사진 김기영·남준기 기자 gykim@naeil.com   jknam@naeil.com
 
 



















인터뷰 - 마쯔오 테쯔야 나가사키현 대마지청장

민간차원 인적 교류 최대한 지원하겠다
 
한 일 양국에 있어 대마도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현재 섬의 1차산업이 부진한 상태여서 관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쿠오카와 제주, 부산을 잇는 관광벨트를 구상중인데, 대마도는 그 핵이다.
부산지역 청소년들과의 교류를 위해 대마도 내 6개 정이 소규모지만 모두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아리랑축제, 친구음악제, 국경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활성화할 생각이다. 중국으로 가는 수학여행단을 한국으로 바꾸는 문제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월드컵 사전행사 등 민간차원의 인적 교류에 대해서는 최대한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부산 ― 대마도간 대아고속해운(051-465-1114) 씨플라워호가 4월1일부터 정기운항을 시작했다.
매주 월 수 금 오전 10시40분 부산항 출발, 오후 1시에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며, 당일 오후 3시 이즈하라 출발, 오후 5시40분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시속 70km에 이르는 공기부양 쾌속선으로 왕복 운항요금은 11만4,000원.
일본여행센터(02-774-4114)에서는 대마도 문화탐방 여행상품(2박3일/ 3박4일)을 판매하고 있다. 매주 월 수 금요일 오전 10시40분 부산을 출발하며 참가비는 각각 39만9,000원과 49만9,000원이다.
 
 
 


















인터뷰 - 후치가미 기요 이즈하라 정장

한국인들과 함께 각종 기념비 세워
 
부산과 이즈하라간에 정기항로가 생겨 기쁘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울창한 원시림이 대마도의 외형적 자랑이라면, 내면적인 자랑거리는 한 일 양국의 역사 속에서 중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즈하라는 반쇼인 종가 가문이 해온 중간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초등학교 동기들 가운데 10%는 한국 친구들과 같이 공부한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과 함께 최익현 선생 기념비, 박제상 기념비 등 많은 기념비들을 세웠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연합뉴스 2004/05/19 16:34 송고

< 지방안테나 >활빈단, 8월부터 대마도 되찾기 운동

(진도=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 시민단체 활빈단(단장 홍정식)은 19일 진도군 조도면 독거.대마도 주민들과 함께 오는 8월 대마도(對馬島) 되찾기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활빈단은 이날 오후 군수 보궐선거가 실시될 진도지역 방문에 앞서 성명을 통해 "광복절 전후인 8월에 이들 섬 주민들과 독도 수호운동과 함께 원래 우리땅인 대마도 되찾기 운동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단체는 이어 "발대식 이후 신안, 완도, 남해, 옹진, 거제 등 섬으로만 구성된 자치단체의 주민들과 함께 범국민운동으로 확대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단체는 이밖에 "선거법 위반 등으로 단체장이 없는 진도군청의 행정누수 현상과 물밑 사전 선거운동이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돼 바른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사전선거감시 암행감찰을 실시하고 있다"고 아울러 밝혔다.

chog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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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목포방송국

활빈단, 진도지역 주민과 대마도 되찾기 운동


시민단체 활빈단이 진도 조도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마도 되찾기 운동을 벌입니다.

활빈단 관계자들은 오늘 진도군청을 방문해
광복절 전후인 오는 8월부터 조도면
독거도와 대마도 주민들과 함께 발대식을
갖고 태극기 게양 등 상징적인 방법으로
대마도 되찾기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활빈단은 또 진도군 재선거에 따른 불법선거
운동을 막기위한 암행감찰 활동도
펼치기로 했습니다./// 200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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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땅!대마도도 우리땅!

20일 정오 대마도에서 원래 우리땅이다 일본땅 되버린 대마도를 되찾자!며 민족자존수호의지 불지폈다!

 
시민단체 활빈단(活貧團)은 아리랑의 고장인 이곳 진도군 대마도에서 나라 튼튼히 해 외침 받지않는 강한 국민되기운동인 부국강민(富國强民)실천의지로 국태민안을 염원하며 이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설명>

대마도(전남진도군 조도면)주민들,20일 정오 시민단체 활빈단(단장.홍정식)과 김주명 진도군의원등과 함께 잃어버린(뺏기고도 말못하는?) 우리땅 대마도 되찾기운동을 벌이며 부국강민운동 돌입!활빈단 홍단장과 김의원은 해상시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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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도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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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빈단 단원들이 20일 오전 전남진도군 조도면 대마도 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도도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이라는 시위를 벌이며 일장기를 불태우고 있다./조도인포 제공/지방/ 2004.5.20 (진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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