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55년을 맞지만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한국전쟁 이후 북에 의한 남침설이 정설로 되어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수정주의 해석이 확산되면서 각종 설들이 난무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과정을 보면 1980년대 이전에는 냉전의 맥락에서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이 병존했다. 여기에 북한측의 북침설 주장이 어우러졌다.
이런 혼란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일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이승만-맥아더-장개석 등의 음모설과 같은 ‘남측 주도설’(혹은 북침설)은 더 이상 학계에서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국내 일부 좌파진영에서는 남한에 의한 북침설과 수정주의적 해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된 남침설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세분해서 살펴보면 △북한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는 스탈린 단독주도설(대리전설, 김일성은 완전한 하수인) △김일성 단독주도설 △스탈린 주도-김일성 보조역할설(김영호) △김일성-스탈린 공동주도설(서주석) △김일성 주도-스탈린 지원설(김학준, 신복룡, 박명림) 등이 있다. 보다 단순화하면 현재 논쟁의 축은 스탈린 주도설과 김일성 주도설로 집약된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김일성 주도-스탈린 지원-모택동 동의설이 가장 유력하다. 여기에 국내적 요인으로 북한지도부의 권력투쟁설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북한 양대 세력이었던 김일성의 만주파와 박헌영의 국내파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박헌영이 김일성을 제압할 목적으로 전쟁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의 세력기반이 서울을 중심한 남쪽에 있었던 점 때문에 지금도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소를 중심으로 한 양극체제가 고착돼 가는 상황에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른바 애치슨라인과 관련한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북측의 도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도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음은 이후 소련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더욱 정설로 굳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함에 있어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제일 중요한 변수로 여겼던 것이다.
1980년 이후 국내에서는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해석이 맹위를 떨쳤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한국전쟁은 1945년 해방직후 시작되어 전면전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당시 한반도는 혁명열기로 충만했으나 남한에서 그러한 혁명이 실패하면서 남한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일어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것이다. 커밍스의 주장은 일부 진실을 담고 있으나 전쟁의 기원을 한반도내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요인을 너무 등한시 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커밍스의 주장은 또한 1990년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한국전쟁 관련 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급속히 힘을 잃어갔다. 일방적 주장이 아닌 사실관계에 기초한 실상이 널리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흐루시초프 회고록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만나 한국전쟁에 대해 나누었던 얘기들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1949년 말 김일성은 스탈린과 일련의 협의를 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왔다. 그들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기를 원했다. 김일성의 말을 보면 남한에 일격을 가하기만 하면 그것이 남한에 내란을 촉발시키고 민중의 힘, 다시 말하면 북한을 지배하는 민중의 힘이 남한으로 번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스탈린은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하며 어느 정도 계산을 해서 구체적인 계획(a concrete plan)을 가지고 다시 오도록 설득했다. 김일성은 귀국했다가 모든 계획이 끝나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만나 자신은 절대로 승리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의심을 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탈린은 미군이 개입해 올 것을 우려했으나 우리들은 전쟁이 전격적으로 수행된다면(김일성은 전쟁이 단시일 내에 승리로 끝날 것으로 확신했다) 미국의 개입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의견이 기울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에 대해 마오쩌둥과 의논하기로 작정했다. 여기서 나(흐루시초프)는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발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발상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하여야 한다. 김일성이 그 주도자(the initiator)였다. 물론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도발계획을 말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마오쩌뚱은 역시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마오쩌뚱은 김일성의 제안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그런 전쟁이야말로 한국인 스스로가 해결할 국내문제이므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흐루시초프는 이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전쟁은 김일성 동지의 주도로 시작됐으며 스탈린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 있었다.…… 1949년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공격(남침)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김일성이 한국통일을 위해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제시한 날짜 그대로 합의됐다.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시작됐다.”
이 회고록은 그동안 진위논쟁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에서 나온 다른 자료들 역시 흐루시초프의 회고록과 비슷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1950년 접어들어 소련은 최신무기를 대량 북한에 공급했고, 중공에서는 5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의용군이 귀환해 전쟁을 대비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민간인 99만 2,019명, 군인 25만 6499명, 경찰 1만 8,519 명, 유엔군 15만 2,440명 등 총 141만 8,477명을 희생시켰다. 게다가 학살 및 사망자가 37만 4,160명, 부상자 22만 9,625명, 납치 및 행방불명자 38만 8,23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광복 후 조국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던 국민들은 예상치 않은 재난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산업시설은 모두 망가지고 온 나라가 황폐화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상황에 대해 젊은이들 사이에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쟁의 도발자가 누구인지만이라도 정확히 알아야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