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제왕적 대통령과 직접민주주의, <font color=blue>장달중(55회)</f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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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제왕적 대통령과 직접민주주의
장달중 |
정치란 사회가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나 일본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걱정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걱정의 노래에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의 ‘정치혁신’외침은 정당정치에 대한 이런 걱정의 노래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인들에게는 이 노래가 정당정치의 종언을 예고하는 백조의 노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백조는 죽을 때 한 번 꽥 하고 소리를 낸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여론의 움직임을 보면 이 백조의 노래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노래 같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정당의 재편보다는 오히려 잠재적인 해체를 예고하는 움직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김 시대에 꽃봉오리를 터뜨린 우리 정당정치다. 산업화, 민주화 과정과 함께했던 정치형태였다. 지난 10년간에는 시민사회의 도전에 재편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진입하면서 무소속 후보의 돌풍에 해체의 수순에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이런 해체의 신호탄이라면 그는 다음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정당 없는 민주정부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느 정치체제고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누가 통치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는 이보다는 ‘누구든 통치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해 보인다. 지금 이 문제를 두고 안철수 후보의 ‘무소속 대통령론’과 문재인 후보의 ‘정당 대통령론’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안철수 후보의 대답은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회의원들에게 당론이 아닌 자율권을 주면 ‘협력의 정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견해다.
예를 들면 학교 교실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각자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 민주적이다. 하지만 국회의 경우는 학교 교실과 다르다. 국회에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서 유권자는 입후보자 개인이 아니라 정당의 공약을 비교해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당론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유권자와의 약속을 배반하는 매우 비민주적인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그가 제시한 ‘공천개혁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강화’ 역시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물론 우리 정당정치의 패러독스적인 현상은 심각한 문제다. 정치참여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정치 불신은 오히려 증가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프라이머리 같은 직접민주주의 방식은 이 패러독스적인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에서 정당에 대한 국민적 통제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프라이머리 제도가 현실에서는 정당 보스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모바일 경선이 초래한 폐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해야겠다는 그의 외침이다. 직접민주주의는 제왕적 지배의 온상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우리 대통령들이 흔히 쓰던 통치방식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명분하에 정당이나 의회를 무시하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즐겨 했다. 자연 의회에 의한 대통령의 권력남용 제한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런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정당정치의 활성화밖에 없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기초적인 정치원리에 대한 의도적인 오해(?)가 안철수 정치혁신의 아킬레스건(腱)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는 정당해체의 자기부정적 예언들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해체의 예언들이 정당쇄신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안철수 후보의 정당정치 부정도 이런 자기부정적 예언으로 끝날지 모른다. 모든 게 이번 대선의 향배에 달려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나 일본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걱정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걱정의 노래에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의 ‘정치혁신’외침은 정당정치에 대한 이런 걱정의 노래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인들에게는 이 노래가 정당정치의 종언을 예고하는 백조의 노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백조는 죽을 때 한 번 꽥 하고 소리를 낸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여론의 움직임을 보면 이 백조의 노래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노래 같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정당의 재편보다는 오히려 잠재적인 해체를 예고하는 움직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김 시대에 꽃봉오리를 터뜨린 우리 정당정치다. 산업화, 민주화 과정과 함께했던 정치형태였다. 지난 10년간에는 시민사회의 도전에 재편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진입하면서 무소속 후보의 돌풍에 해체의 수순에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이런 해체의 신호탄이라면 그는 다음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정당 없는 민주정부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느 정치체제고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누가 통치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는 이보다는 ‘누구든 통치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해 보인다. 지금 이 문제를 두고 안철수 후보의 ‘무소속 대통령론’과 문재인 후보의 ‘정당 대통령론’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안철수 후보의 대답은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회의원들에게 당론이 아닌 자율권을 주면 ‘협력의 정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견해다.
예를 들면 학교 교실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각자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 민주적이다. 하지만 국회의 경우는 학교 교실과 다르다. 국회에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서 유권자는 입후보자 개인이 아니라 정당의 공약을 비교해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당론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유권자와의 약속을 배반하는 매우 비민주적인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그가 제시한 ‘공천개혁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강화’ 역시 걱정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물론 우리 정당정치의 패러독스적인 현상은 심각한 문제다. 정치참여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정치 불신은 오히려 증가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프라이머리 같은 직접민주주의 방식은 이 패러독스적인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에서 정당에 대한 국민적 통제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프라이머리 제도가 현실에서는 정당 보스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모바일 경선이 초래한 폐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해야겠다는 그의 외침이다. 직접민주주의는 제왕적 지배의 온상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우리 대통령들이 흔히 쓰던 통치방식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명분하에 정당이나 의회를 무시하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즐겨 했다. 자연 의회에 의한 대통령의 권력남용 제한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런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정당정치의 활성화밖에 없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기초적인 정치원리에 대한 의도적인 오해(?)가 안철수 정치혁신의 아킬레스건(腱)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는 정당해체의 자기부정적 예언들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해체의 예언들이 정당쇄신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안철수 후보의 정당정치 부정도 이런 자기부정적 예언으로 끝날지 모른다. 모든 게 이번 대선의 향배에 달려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