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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전승훈]소녀상의 맨발
기사입력 2012-11-27 03:00:00 기사수정 2012-11-27 05:00:00
전승훈 문화부 차장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정문 앞에 소녀상이 세워진 지 곧 1년이 된다. 지난해 12월 14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1000회 기념으로 세워진 평화비 소녀상이다. 높이 130cm의 소녀상은 울지도, 웃지도 않고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다. 두 손은 치마를 꼭 쥐고, 발뒤꿈치는 여전히 땅에 붙이지 못한 채 앉아 있다.
일본대사관 앞길은 ‘평화로’라고 이름 붙여졌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때만 북적이던 이곳에 평일에도 소녀상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소녀상은 언젠가부터 일본군 위안부가 70, 80대 노(老)할머니들의 문제라고 치부해 왔던 인식에 경종을 울렸다. 일제가 성노예로 끌고 가 잔혹하게 짓밟았던 것은 눈부신 10대 소녀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올해 수요집회에는 소녀상 또래의 여중고생들이 수백 명이나 함께했다.
그러나 올해 6월 말 소녀상의 가슴은 또한 번 무너져 내렸다. 일본 극우단체 회원인 스즈키 노부유키(47)가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 영토’라고 쓰인 흰색 말뚝을 소녀상의 다리에 묶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 대사관 코앞에 매춘부 동상, 매춘부 기념비가 서 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장마가 한창이던 7월 초. 한 경찰관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소녀상에 다가왔다. 서울지방경찰청 13기동대 소속 김영래 경위(49)였다. 소녀상의 움푹 파인 눈에 들어간 빗물은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소녀상이 ‘말뚝 테러’에서 지켜 주지 못한 자신을 야단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그는 소녀상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한 시간 넘게 소녀상에 우산을 받쳐 주면서 근무를 섰다. 이 사진은 SNS를 통해 퍼져 나갔다.
올해 8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에니 팔레오마바에가 의원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경기 광주 나눔의집을 방문해 “소녀상이 너무 작아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치욕적”이라며 더 큰 추모상 건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녀상을 조각한 김운성, 김서경 부부는 “소녀상이 거대해져 미화되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도 실제로 보면 너무 작아 관광객들이 실망할 정도다. 그러나 각국의 국빈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마다 벌거벗은 꼬마동상을 위해 옷을 선물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대사관 앞 작은 소녀상도 설날에는 한복으로, 크리스마스에는 빨간 망토로 갈아입는다. 곰돌이 인형, 꽃, 신발을 놓고 간 사람도 있다. 때로는 작아서 더욱 슬프고, 친근해지는 대상도 있다.
소녀상은 예술작품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일본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는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가 없다”고 망언을 해 대지만, 일본 정부는 소녀상에 쏟아지는 관심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위안부 할머니를 기리는 소녀상은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소녀상의 뒤편 그림자에는 나비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나비는 환생(還生)을 상징한다. 일본 정부는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위안부 문제가 잊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나비는 할머니들의 ‘소녀시대’의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이제 소녀상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