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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저축은행에서 1억원6천만원 가량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비리연루 혐의로 검찰 소환을 두차레나 받고도 끝내 모르쇠로 불응하는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에 자신의 약속한대로 목포역전에서 할복자결할 칼을 보내기로 했다.
활빈단은 한상대검찰총장에 검찰의 소환에 비전향장기수인양 생명걸고 공권력에 맞서는 듯 콧방귀 뀌며 "저축은행으로 부터 돈이나 청탁을 받은 바 없으며 대선을 앞둔 정치검찰의 야당탄압용 강압적 표적 공작수사다"면서 대검 중앙수사부 폐지,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를 추진하겠다는 딴청이나하면서 검찰에 맞불 대응하는 박원내대표를 "즉각 강제구인해 철저조사후 사법처리 엄벌하라"고 강도높게 요구했다.
또한 활빈단은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을 악용해 법치주의를 짓밟는 상습적 뇌물잡범인 박 대표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 "민주통합당에 등돌리는 국민들의 분기탱천하는 민심을 직시해 목포역전에서 할복 자결 전 먹은 1억이상 뇌물 저축은행 피해자들에 기어내고 죄값 치루라"고 비난했다.
이어 활빈단은 박대표에 남노당 박헌영이 김일성 지령에 따른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주범으로 사형된 이는 朴누구이며,지리산 빨치산 반역질 하다 공비토벌 경찰에 쫓겨 진도로 도망갔다 진도경찰서 사찰계 경찰관들과 총격전 끝에 마지막까지‘인민공화국만세’만세를 부르다 사살된 朴머시개는 누구인지 이젠 국민들에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와함께 활빈단은 이해찬 민주통합당 당 대표에 국민적 지탄을 받는 박원내대표를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를 열 계략을 꾸미면 정치 권력으로 국가 사법체계를 무시하는 法경시 反개혁 구태 정당으로 매도되어 "족히 100만표가 날라 갈 것이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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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펌 글/박지원 아버지 인터넷 검색하니 뜨는 내용..국민들은 이 충격적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조선 토론마당
윤희성, 2010-09-19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된다. 서울 소공동 근태빌딩에는 일제 때 돈을 인쇄하던 정판사란 인쇄소가 있었다. 왜놈 기술자 “쫑”으로 있던 박지원 조부 박낙종께서는 해방이 되자 왜놈 사장이 버리고 간 인쇄소 정판사를 꿰차고 사장이 되신다. 사장님 깨서는 공산당 열성신도였다.
해방 두 달 뒤, 10월 15일, 정판사 사무실에는 공산당 제정부장 이관술, 박락종 사장이 위조지폐 인쇄를 모의, 박헌영과 김상룡에게 보고했다. 박헌영은 무릎을 쳤다. “그래, 돈만 찍어낼 수 있다면 이 나라를 먹는 건 식은 죽 먹기다.”
10월 22일, 이들은 네 차례에 걸쳐 1,500만원을 찍어 낸다. 모두 1억 원을 찍어낼 심산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꼬리가 잡혔다. 작업에 동참했던 빨이 지폐인쇄판을 팔려다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7명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박헌영은 잔대가리를 굴렸다.
5월 17일,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은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공산당은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잡혀있는 김낙기 부인이 면회를 할 때 부인은 남편에게 담배를 건네는 게 발각됐고, 담배 속에는 "김동무, 사흘만 버티면 30만원을 지불 하겠소"라는 쪽지가 발견된다. 수사반은 확신을 갖게 된다. 같은 시간, 서울 장안빌딩 공산당 아지트에서는 김상룡이 박헌영에게 "김낙기 처가 사식을 넣을 때 지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경찰 놈들이 억지를 쓴다고 선전만 쎄게 하면..."박헌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경찰계장이 집적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용의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500만원을 찍어 해방일보 사장과 공산당 재무부장이 전부 가져 같습니다."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가담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된다. 30여 회의 공판에서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검사를 협박하고 공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10여 명의 좌익 변호사들은 재판 기피로 폐정까지 연출된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된다. 서울 소공동 근태빌딩에는 일제 때 돈을 인쇄하던 정판사란 인쇄소가 있었다. 왜놈 기술자 “쫑”으로 있던 박지원 조부 박낙종께서는 해방이 되자 왜놈 사장이 버리고 간 인쇄소 정판사를 꿰차고 사장이 되신다. 사장님 깨서는 공산당 열성신도였다.
해방 두 달 뒤, 10월 15일, 정판사 사무실에는 공산당 제정부장 이관술, 박락종 사장이 위조지폐 인쇄를 모의, 박헌영과 김상룡에게 보고했다. 박헌영은 무릎을 쳤다. “그래, 돈만 찍어낼 수 있다면 이 나라를 먹는 건 식은 죽 먹기다.”
10월 22일, 이들은 네 차례에 걸쳐 1,500만원을 찍어 낸다. 모두 1억 원을 찍어낼 심산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꼬리가 잡혔다. 작업에 동참했던 빨이 지폐인쇄판을 팔려다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7명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박헌영은 잔대가리를 굴렸다.
5월 17일,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은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공산당은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잡혀있는 김낙기 부인이 면회를 할 때 부인은 남편에게 담배를 건네는 게 발각됐고, 담배 속에는 "김동무, 사흘만 버티면 30만원을 지불 하겠소"라는 쪽지가 발견된다. 수사반은 확신을 갖게 된다. 같은 시간, 서울 장안빌딩 공산당 아지트에서는 김상룡이 박헌영에게 "김낙기 처가 사식을 넣을 때 지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경찰 놈들이 억지를 쓴다고 선전만 쎄게 하면..."박헌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경찰계장이 집적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용의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500만원을 찍어 해방일보 사장과 공산당 재무부장이 전부 가져 같습니다."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가담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된다. 30여 회의 공판에서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검사를 협박하고 공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10여 명의 좌익 변호사들은 재판 기피로 폐정까지 연출된다.
1946년 5월 14일, 수도 청장 장택상은 기자 회견을 갖고 "이번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이 한국 경제를 교란시키고 조직 확대를 위해 벌인 천인 공로할 사건입니다." 장택상의 기자회견은 석간신문에 대서 특필됐고 국민들은 경악 했다. 신문을 읽은 국민들은 한마디씩 했다. "민족, 진보, 수구, 껄텅 거리던 빨갱이 들이 드디어 일을 저지르는구먼, 속 빨간 놈들..."
박헌영은 혜화동 아지트에서 석간신문을 모조리 읽었다. 그 옆의 김상룡과 이주희도 침통한 얼굴로 장택상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투덜거린다. "투쟁, 투쟁 하시오. 전국에 투쟁 지령을 내리시오." 박헌영이 눈에 불을 켜며 고함을 쳤다. 전국 주요 도시에 벽보가 붙기 시작 한다. [인민이여 위폐사건은 날조다, 장택상을 타도하자!]
부천 변두리 북떡빵 늙은 푼수머슴 허돌이는 "맞아 장택상이 꾸민 일이이야!" 맞장구를 쳤다. 20여개 신문들은 증거가 없는 위폐사건을 장택상이 공산당을 잡기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쓰기 시작 했다. 좌빨의 억지 투쟁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 한 것이다. 박헌영은 경찰서 안에 있는 빨갱이들에게 끝까지 오리발 투쟁을 벌이라는 지령을 내리고, 제 2인자인 가짜 김상룡을 체포시켜 경찰서 안의 분자들과 접촉하려 했으나 가짜는 조재천 검사의 기지로 발각된다.
가짜 김상룡이 들통 나고 몇 분 만에 조 검사 앞에 한통의 편지가 전달된다. "조 선생, 판단에 앞서 타협이 있음을 아시오, 김상룡." 편지를 본 조 검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나 김상룡이요, 우리 공산당 조직을 만만히 보지 마시오, 지령만 내리면 행동할 많은 전사가 있다는 걸 명심 하시오"
조 검사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경찰서 안에 얼마나 많은 세작들이 있길래...” 좌익들은 담당 경찰계장의 집을 폭파했다. 가짜 김상룡 사건과 경찰직원 집 폭파 사건은 면밀히 보도되고 위폐사건은 점점 좌.빨들이 불리해 진다.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최신식 인쇄소를 빼앗겼고 해방일보(박헌영 주간), 중앙일보(여운형 주간), 인민일보(이영수 주간)등 세 개가 폐간된다.
그런데도 경찰서에 잡혀있는 박락종 이하 빨갱이들은 고문으로 정신이 돈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발광투쟁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테러에 대비해 현장 검증도 비밀리에 했다. 법정에서는 난동이 벌어졌다. 김창선이 법정에서 웃옷을 모두 벗고 상처투성이 몸을 보이며 고문의 증거라고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대못으로 자해 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박헌영에게 체포영장이 발부 된다.
박헌영은 졸개들에게 투쟁하라는 교시를 남기고 관속의 시체로 위장해 서울을 벗어나 포천 뒷산에서 관에서 나와 38선을 넘어 월북한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자기 수하로 온다는 말에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박헌영은 북한의 부수석이 되어 남한의 조직을 동원해 이승만 암살사건, 장택상 수류탄 암살사건, 제주도 폭동, 여수, 순천 폭동 등 6.25전 남한 전역을 혼란에 빠뜨린다, 김일성과 6.25를 일으키고 전쟁 후 김일성에게 처형당했다.
정판사 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사장 박낙종 등 조선 공산당 7명이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이다. 11월 28일 선고공판에서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과 이관술, 송언필, 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15년 형이 선고된다. 6.25가 터지고 이들은 일제히 사형에 처해진다. 박지원의원님 조부님 박낙종은 목포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박지원 아버지·큰아버지도 경찰에 사살 당하셨다. 박지원의원님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부터 해방 될 때까지 45년까지 고향 진도에서 일본인 하수인으로 목화 수매책임자로 일했다. 박지원 아버지 박종식은 재갈 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이다.
해방 후 박종식(박지원 아버지)은 남로당 진도 책임자가 되고 삼촌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이 된다. 박종식,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고, 그들은 지방 유격대장으로 한국 경찰을 무수히 죽인다. 그들의 은신처 지리산 피아골이 국군에 함락 당하자 신안으로 피신하다 진도 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와 총격전 끝에 마지막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다 사살된다. (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군지(郡誌)에 기록과 곽순배 형사의 친척 곽우불 진도 번영회 회장 증언)
1993년 8.15 행사 때 박종식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건국포장을 받는다.(포장증. 제1552호). 박지원 삼촌, 고모는 괴뢰군 앞잡이로 면민을 북괴군에 징용시키다 9.28 수복 후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미제 도끼자루로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진도군 무공 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며칠 전에도 박지원 의원님은 개정일에게 무상 쌀 50만 톤을 주자고 주장 하셨다. 그 집안은 개정일 집단을 큰집으로 여기는 가문인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