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승철 논설위원
일본은 ‘평화’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자리는 ‘평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많은 대학교 등 공공장소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박물관 또는 비가 세워져 있다. 심지어 일본이 1995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민간기업의 지원으로 만든 ‘아시아 여성기금’의 공식 명칭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이다.
그런 일본이 시민단체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어제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한 조그만 ‘평화비’에 대해서는 유독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시하면서 평화비 철거를 요구했다.
평화비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일본인의 평화 사랑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1980년대 말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했을 때 전쟁보다 일본에 대한 분노가 더 강하게 치밀었던 기억이 난다. 전범으로서,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은 전혀 없이 피해자로서 전쟁 참상과 평화를 운운하는 관계자의 설명에서 역겨움마저 느꼈다.
일본은 빈협약을 거론하면서 ‘외교시설의 안전과 품위 유지’를 위해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불과 1m30㎝ 높이의 단아한 소녀상이 얼마나 일본의 품위를 훼손하기에 일본이 저처럼 난리를 치는 것일까. 일본의 태도가 오히려 일본의 품위를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외교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올해 유엔 총회를 앞두고 일본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에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요청해왔다. 그뿐 아니다.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해마다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 문제 제기를 막으려고 노력해왔다. 일본으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풀기보다는 덮어두고 가려는 자세에 측은함마저 느낀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비로 인한 품위 손상을 느낀다면 위안부 문제 해결이 유일한 답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비는 한·일관계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 상징물, 일본대사관 앞길은 관광명소로 재탄생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평화비가 재탄생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