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정치가 전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font color=blue>장달중(55회)</f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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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정치가 전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1.12.01 00:00 / 수정 2011.12.01 00:06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해외출장 중 외국 TV에 비친 한국 정치를 보니 전쟁이 따로 없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전장이 연평도나 휴전선에 있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전장이 국회·한나라당·민주당, 그리고 시청광장 등 네 군데나 늘어난 모양새다. 19세기 독일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전쟁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국회가 전장이 된 지는 오래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의례화되다시피 한 의장석 점거, 전기톱, 해머, 그리고 최루탄의 등장. 이쯤 되면 정치세계에서 관용과 품위의 행동을 기대하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마찬가지다. 전쟁에도 살상을 규제하기 위한 제네바 규약이란 것이 있다. 하물며 ‘타협의 예술’인 정치에서는 이런 규약이 더더욱 필요하다. 타협이란 불가능의 상황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이 타협의 예술을 살리기 위해 의사당 회의장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큰 소리로 토론하면 타협을 이끌어낼 지혜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어떤가. 우선 목소리가 크고 거칠어야 한다. 상대방을 매국노나 변절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행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정치에서 살아남는 제1 조건은 ‘모욕적인 언사를 삼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국민의 평가 기준이 목소리의 크기나 물리력의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의회정치는 토론의 정치다. 정당은 토론을 통해 정강을 만들고 이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런데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지금 이런 것에는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전장에서의 전투대열 정비가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치 독일의 정치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기분이다. 1930년대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분에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윤리가 선과 악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듯이, 정치도 적과 동지의 구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 ‘투쟁’이 전제되어 있다. 토론을 통한 타협의 공간이 존재할 리 없다. 여기서는 ‘정치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고, 정당은 이를 쟁취하기 위한 군대일 뿐’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모습 그대로다. 정치권이 안철수 돌풍에 환골탈태 운운하지만 그것은 정권탈취를 위한 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정치는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이 전쟁을 위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투입될 군대의 전열을 정비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전쟁 같은 정치에서도 3김 시대에는 서로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선인 레드라인(red line)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래서 많은 외국 전문가들이 극단적인 지역정치 구도 속에서도 극단적인 정치로 파편화되지 않은 한국의 정치발전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포스트 3김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 레드라인은 무너져 버렸다. 이와 함께 정치세계의 금도(襟度)도 실종되어 버렸다. 정치의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탄핵이나 의장석 점거 같은 것이 다반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정치에서는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 될 핵무기라고 할 수 있는 폭력 행위가 오늘의 의정단상을 장식하고 있다.
국회가 전장이 된 지는 오래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의례화되다시피 한 의장석 점거, 전기톱, 해머, 그리고 최루탄의 등장. 이쯤 되면 정치세계에서 관용과 품위의 행동을 기대하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마찬가지다. 전쟁에도 살상을 규제하기 위한 제네바 규약이란 것이 있다. 하물며 ‘타협의 예술’인 정치에서는 이런 규약이 더더욱 필요하다. 타협이란 불가능의 상황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이 타협의 예술을 살리기 위해 의사당 회의장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큰 소리로 토론하면 타협을 이끌어낼 지혜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어떤가. 우선 목소리가 크고 거칠어야 한다. 상대방을 매국노나 변절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행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정치에서 살아남는 제1 조건은 ‘모욕적인 언사를 삼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국민의 평가 기준이 목소리의 크기나 물리력의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의회정치는 토론의 정치다. 정당은 토론을 통해 정강을 만들고 이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런데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지금 이런 것에는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전장에서의 전투대열 정비가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치 독일의 정치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기분이다. 1930년대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분에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윤리가 선과 악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듯이, 정치도 적과 동지의 구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 ‘투쟁’이 전제되어 있다. 토론을 통한 타협의 공간이 존재할 리 없다. 여기서는 ‘정치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고, 정당은 이를 쟁취하기 위한 군대일 뿐’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모습 그대로다. 정치권이 안철수 돌풍에 환골탈태 운운하지만 그것은 정권탈취를 위한 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정치는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이 전쟁을 위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투입될 군대의 전열을 정비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전쟁 같은 정치에서도 3김 시대에는 서로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선인 레드라인(red line)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래서 많은 외국 전문가들이 극단적인 지역정치 구도 속에서도 극단적인 정치로 파편화되지 않은 한국의 정치발전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포스트 3김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 레드라인은 무너져 버렸다. 이와 함께 정치세계의 금도(襟度)도 실종되어 버렸다. 정치의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탄핵이나 의장석 점거 같은 것이 다반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정치에서는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 될 핵무기라고 할 수 있는 폭력 행위가 오늘의 의정단상을 장식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시청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사회의 모습 또한 전쟁모드다. 시민사회는 품위와 관용, 비폭력의 대명사다. 그런데 폭력적인 시민 불복종이 시민사회의 용인된 전술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누군가가 말했다. 네 군데의 전장 때문에 국정(國政) 가도(街道)가 막혀 있다고. 여권은 글로벌을 외치면서도 부족(部族)적인 인사로 역주행 중이고, 야권은 서울시장 선거 승리로 활짝 열린 대로(大路)에서 정체성(正體性) 공방으로 정체(停滯)를 심화시키고 있으니, 요란한 것은 시청광장에서 들려오는 시민사회의 경적 소리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는 점점 상호의존적으로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식의 부족 정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네 곳 전장의 당사자들 모두는 알아야 한다. 절제 없는 전쟁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그네들이 아니라 국민들이라는 사실을. 총격전이 끝났을 때를 생각해 보라. 승자는 당신들이 아닐지 모른다. 국민들은 전쟁이 아니라 타협을 통한 통합의 정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누군가가 말했다. 네 군데의 전장 때문에 국정(國政) 가도(街道)가 막혀 있다고. 여권은 글로벌을 외치면서도 부족(部族)적인 인사로 역주행 중이고, 야권은 서울시장 선거 승리로 활짝 열린 대로(大路)에서 정체성(正體性) 공방으로 정체(停滯)를 심화시키고 있으니, 요란한 것은 시청광장에서 들려오는 시민사회의 경적 소리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는 점점 상호의존적으로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식의 부족 정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네 곳 전장의 당사자들 모두는 알아야 한다. 절제 없는 전쟁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그네들이 아니라 국민들이라는 사실을. 총격전이 끝났을 때를 생각해 보라. 승자는 당신들이 아닐지 모른다. 국민들은 전쟁이 아니라 타협을 통한 통합의 정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