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村은 민족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동아일보)
仁村 김성수 선생(1891∼1955)의 탄생 120주년(10월 11일)을 맞으며, 그가 교육자 언론인 기업가 정치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큰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학술대회가 어제 열렸다. 인촌은 일제 식민치하의 엄혹한 현실에서 민족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기반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경성방직, 중앙학교(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 전신)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동아일보를 통해 국부(國富)의 초석을 다지고, 인재를 양성했으며, 정부를 대신해 민중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인촌이 세운 경성방직을 “오늘날 선진 한국경제를 만든 기업들의 선구자”로, 한용진 고려대 교수는 인촌이 인수한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독립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인재의 도량”으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인촌이 창간한 동아일보를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깨우친 등불”로 평가했다. 학자들은 “동아일보는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애국자들의 투옥과 석방 등에 관한 소식을 소상하게 전해 민족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신용하 울산대 석좌교수는 “일제 치하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실력을 배양하고 국외에서 무력 독립을 준비하는 이중노선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공유한 생각이었다”며 “좌파든 우파든 어떤 독립운동가도 인촌에게 친일의 잣대를 들이댄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해외에서의 애국활동보다 국내에서의 민족자강, 국권회복 노력이 더 가시밭길이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인촌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인민공화국에 속지 않고 임시정부를 봉대(奉戴)했다. 또 신탁통치 결정 이후 김일성의 정치 선동에 이용당한 김구의 남북협상론 대신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했다.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은 좌파 사학자들이 인촌을 부당하게 분단세력으로 몰아가는 근거가 된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은 무늬만 좌우합작이었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은 졸속이었다고 지적했다.
진덕규 이화여대 이화학술원장은 “인촌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권력욕에서 빚어진 정치 행태를 바라보면서도 건국이 민족 최대의 과제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감내했다”고 말했다. 인촌은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자 주저 없이 부통령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당시 불온문서로 취급받아 언론에 실리지 못한 인촌의 부통령 사임서를 복사해서 읽었다”고 회고했다.
인촌은 힘든 시대에 선각자적인 혜안과 뛰어난 현실인식, 겸허한 인품으로 중론(衆論)을 모으고 몸소 실천했다. 우리가 새삼 인촌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오늘날 국정의 난맥과 이념적 혼란이 인촌의 시대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