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공안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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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경찰, 김정일의 측근 강해룡 국제수배 방침
신광수
일본인 납치 피해 사건을 추적하는 일본 정부의 노력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끈질기다. 내각에는 각 부처로부터 차출된 40여 명의 공무원으로 구성된 납치문제대책본부가 설치돼 있다. 본부장은 총리가 직접 맡고 있다. 국가공권력을 총괄하는 국가공안위원장은 납치문제 담당 각료를 겸임한다. 공안위원장은 수시로 납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대책을 협의하고 요구사항을 듣는다. 2002년 9월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납치 피해자 5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열광했고 다음 해 총선에서 자민당은 대승을 거뒀다. 이 때문에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납치문제에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일본 경찰이 이번에 강해룡이 납치를 주도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국제수배 조치를 내리기로 한 것도 장기간에 걸친 추적과 조사의 산물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강해룡은 하라 씨를 납치한 북한 공작원 신광수(82)에게 일본인 남성을 납치하도록 지시해 ‘국외 이송 목적의 약취’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신광수는 일본인 부부를 납치한 혐의로 2006년 일본 경찰에 의해 이미 국제수배됐다.
신광수는 1980년 6월 오사카(大阪) 시내 중국 음식점에서 일하던 하라 씨를 미야자키 시 해안에서 공작선을 이용해 북한으로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청 조사 결과 강해룡은 신광수에게 자금을 주며 일본과 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1982년에는 무역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직접 방문해 신광수로부터 보고를 받기도 했다. 신광수는 자신이 납치한 하라 씨 행세를 하면서 일본에서 스파이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경찰이 하라 씨 납치 사건과 관련해 신광수를 수사선상에 올려놓은 것은 신광수가 공작활동을 하다 한국에서 체포된 1985년이었다. 당시 신광수가 한국 공안당국의 조사에서 납치 혐의를 인정하면서 “강해룡의 지시였다”고 진술한 대목을 놓치지 않은 것. 신광수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99년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신광수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2000년 9월 그를 북한으로 보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신광수에 관한 한국 재판기록 등을 철저히 분석했고, 2008년부터는 수사관을 한국에 파견해 증거자료를 수집해 왔다. 1978년 북한에 납치됐다 1986년 탈출한 여배우 최은희 씨를 직접 만나 북한 대외정보조사부의 내부 사정에 대해 탐문했고,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 씨를 통해서도 관련 정보를 캐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일본 경찰은 강해룡이 하라 씨 납치사건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78년 1월 22일 홍콩에서 피랍 8일 만에 남포항에 끌려온 최은희. 그 옆은 북한 대외정 보조사부 부부장(정보부차장) 강해룡. 동아일보DB
강해룡은 지금까지 일본이 납치 혐의로 국제수배한 북한인 가운데 최고위급이다. 하라 씨 납치사건 당시 차관급인 대외정보조사부의 2인자였고, 각료급인 부장도 지냈다. 현재 나이는 80대 중반으로 알려졌다. 일본 경찰은 강해룡이 김 위원장의 직접 지시를 받아 일본인 납치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은희와 김현희 씨의 저서에 따르면 강해룡은 신상옥 최은희 씨 납치와 김현희 공작원 선발 등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향후 외교 경로를 통해 북한에 강해룡의 신병 인도를 요청하는 한편 진상규명을 촉구할 방침이다.
일본 경찰의 집요함이 드러나는 것은 비단 납치사건뿐만 아니다. 경찰청 산하에는 1973년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과 관련한 ‘김대중 체포감금 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100% 진실’을 밝힐 때까지 집요하게 수사를 계속하는 것이다.
한편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국민들에게 저지른 강제 징용·징병, 군위안부 문제 등에서는 진실을 외면하는 데 대해 이중적 처신이란 지적도 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