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정주영, 그는 `한국판 잡스`였다 - 매경(<font color=blue>전병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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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정주영, 그는 `한국판 잡스`였다 | |
기사입력 2011.03.02 17:19:40 | 최종수정 2011.03.02 19:41:34 |
"`임자 해봤어?` 라는 도전정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능력 등 기업인을 넘어 창조자의 반열…10주기 맞아 항상 국민에게 자긍심 주었던 그가 그립다"
요즘 미국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조금 익살스럽게 표현하자면 애플 신제품의 성능이 어떨까 내기를 하면서 흥분해할 것 같다. 그 중심에 있는 스티브 잡스는 단연 히어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잡스는 한마디로 창조자다. 남이 걷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통해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까. 기자는 21일로 서거 10주년을 맞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그런 인물이었다고 굳게 믿는다. 정주영과 잡스는 기업인으로 입신한 시대와 성공 분야는 다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일에 대한 집념,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능력면에서 유사하다.
기업인에게 아이디어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연결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정주영은 이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경영자였다. 그의 유명한 어록 가운데 하나는 `임자 해봤어?`다.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하도 반대부터 해대니 정 회장이 아예 입에 달고 살았다는 그의 전매특허다. 1972년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건설할 때의 일화다. 정 회장이 영국은행에 차관을 빌리러 가면서 들고 간 것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 5만분의 1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정주영을 만난 은행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차관을 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정주영의 집념은 여기서 발휘된다. 그는 인근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도면을 한 장 빌려 마침 파리에서 휴가 중인 세계적인 선박왕 리바노스를 찾아갔다. 배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대한민국은 1500년대에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조선 우수국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결국 유조선 두 척을 수주했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불굴의 벤처정신이 일궈낸 창조적 마케팅의 사례다.
정주영은 새로운 도전에도 익숙했다. 서산 앞바다를 개간할 때 그는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서 거센 물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폐선 직전의 유조선을 끌고와 물길을 잠잠하게 한 뒤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는 나중에 `정주영 공법`으로 이름지어져 토목학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1975년부터 시작된 사우디 주바일항 공사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공사는 50만t급 유조선 네 척을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세계 최대 역사(役事)로 꼽혔다. 공사금액만 무려 9억달러. 당시 거대한 해상터미널 철재재킷을 국내에서 만들었지만 이를 사우디까지 가져갈 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정 회장은 바지선 두 대를 연결해 운반하는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둔다. 국산 자동차를 시작한 것도 그의 남다른 기질 때문에 가능했다. 포니 엑셀과 쏘나타로 대표되는 현대차의 `북미신화`는 불과 30년 만에 현대ㆍ기아차를 세계 5위 자동차 생산업체로 끌어올렸다.
기업인을 뛰어넘는 그의 위대성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소통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1981년 올림픽 유치 민간위원장을 맡은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사시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소떼방북도 마찬가지다. 그는 1998년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를 북한과의 경제외교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은 이를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떼 방북은 국민 모두를 하나로 묶어 `통일`을 한번씩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 출마, `왕자의 난` 등 옥의 티조차 신(神)이 아닌 인간 정주영을 보는 것 같아 친근하다. 21일이면 정 회장이 서거한 지 만 10년. 다시 정주영을 돌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살아생전에 보여준 창의성과 벤처정신, 그리고 국민과 호흡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기업인의 출현일 것이다.
[전병준 부국장 겸 산업ㆍ모바일부장]
요즘 미국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조금 익살스럽게 표현하자면 애플 신제품의 성능이 어떨까 내기를 하면서 흥분해할 것 같다. 그 중심에 있는 스티브 잡스는 단연 히어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잡스는 한마디로 창조자다. 남이 걷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통해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까. 기자는 21일로 서거 10주년을 맞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그런 인물이었다고 굳게 믿는다. 정주영과 잡스는 기업인으로 입신한 시대와 성공 분야는 다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일에 대한 집념,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능력면에서 유사하다.
기업인에게 아이디어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연결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정주영은 이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경영자였다. 그의 유명한 어록 가운데 하나는 `임자 해봤어?`다.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하도 반대부터 해대니 정 회장이 아예 입에 달고 살았다는 그의 전매특허다. 1972년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건설할 때의 일화다. 정 회장이 영국은행에 차관을 빌리러 가면서 들고 간 것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 5만분의 1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정주영을 만난 은행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차관을 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정주영의 집념은 여기서 발휘된다. 그는 인근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도면을 한 장 빌려 마침 파리에서 휴가 중인 세계적인 선박왕 리바노스를 찾아갔다. 배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대한민국은 1500년대에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조선 우수국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결국 유조선 두 척을 수주했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불굴의 벤처정신이 일궈낸 창조적 마케팅의 사례다.
정주영은 새로운 도전에도 익숙했다. 서산 앞바다를 개간할 때 그는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서 거센 물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폐선 직전의 유조선을 끌고와 물길을 잠잠하게 한 뒤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는 나중에 `정주영 공법`으로 이름지어져 토목학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1975년부터 시작된 사우디 주바일항 공사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공사는 50만t급 유조선 네 척을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세계 최대 역사(役事)로 꼽혔다. 공사금액만 무려 9억달러. 당시 거대한 해상터미널 철재재킷을 국내에서 만들었지만 이를 사우디까지 가져갈 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정 회장은 바지선 두 대를 연결해 운반하는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둔다. 국산 자동차를 시작한 것도 그의 남다른 기질 때문에 가능했다. 포니 엑셀과 쏘나타로 대표되는 현대차의 `북미신화`는 불과 30년 만에 현대ㆍ기아차를 세계 5위 자동차 생산업체로 끌어올렸다.
기업인을 뛰어넘는 그의 위대성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소통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1981년 올림픽 유치 민간위원장을 맡은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사시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소떼방북도 마찬가지다. 그는 1998년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를 북한과의 경제외교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은 이를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떼 방북은 국민 모두를 하나로 묶어 `통일`을 한번씩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 출마, `왕자의 난` 등 옥의 티조차 신(神)이 아닌 인간 정주영을 보는 것 같아 친근하다. 21일이면 정 회장이 서거한 지 만 10년. 다시 정주영을 돌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살아생전에 보여준 창의성과 벤처정신, 그리고 국민과 호흡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기업인의 출현일 것이다.
[전병준 부국장 겸 산업ㆍ모바일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