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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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정담 나누는 동네 사랑방… 목욕은 덤
[포토 & 스토리]
서울 계동 50년 넘은
목욕탕 중앙탕
25세에 들어와 43년째 5남매 모두 키워
"이젠 떠날수도 없어요 정 때문에…"
양치용 소금…
나무 조각 달린 열쇠…
곳곳에 묵은 세월의 켜
주민들 한목소리 "문 닫으면 안돼"
글=이창호기자 chang@sphk.co.kr
사진=김지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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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탕에는 오래된 것이 많다. 카운터에 붙여 |
골목길은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목간'을 하던 곳.
벌거벗은 이웃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탕의 김을 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집집마다 목욕 시설이 변변치 않은데다 '공동 수도'를 이용하던 시절,
그것이 삶이었다.
사람 냄새 나는 오래 전 서울의 풍경이었다.
이젠 골목길에 뛰어 노는 아이도 없고, 세 가닥 수증기 표시로 더운 물이
이젠 골목길에 뛰어 노는 아이도 없고, 세 가닥 수증기 표시로 더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서민들의 사랑방'임을 알려주던 대중 목욕탕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도심 속, 조선 궁궐 사이의 골목길에 잊혀져 가던 목욕탕이
그러나 도심 속, 조선 궁궐 사이의 골목길에 잊혀져 가던 목욕탕이
남아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北村), 1908년 설립돼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긴 중앙의숙으로 가는 좁은 길 옆에 '중앙탕'이 아직도 영업 중이다.
"이젠 떠날 수도 없어요. 정 때문에…"
'중앙탕 지킴이' 담란향(67)씨는 골목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문 곁에 서서,
1평이 채 안 되는 카운터에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떠올린다.
1968년 젊은 화교 부부가 서울 종로구 계동(桂洞)의 대중 목욕탕을 인수했다.
남편은 30세, 아내는 25세이었다.
언제부터 문을 열었는지 몰랐다.
학교에서 만들었다가 몇 년 지난 뒤 일반인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우리가 43년, 그 전까지 합하면 50년은 넘겠네요.
"우리가 43년, 그 전까지 합하면 50년은 넘겠네요.
여기서 5남매를 모두 키웠어요. "
이들에겐 목욕탕이 낯설지 않았다.
이들에겐 목욕탕이 낯설지 않았다.
중국 장쑤(江蘇)성 양조우(揚州)가 고향인 처가 부모들이 한국전쟁 직후
충무로에서 목욕탕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떠나 담란향씨는 홀로 목욕탕을 지켰다.
중앙탕에는 직접 손으로 쓴 안내문이 여기저기 많이 붙어 있다.
중앙탕에는 직접 손으로 쓴 안내문이 여기저기 많이 붙어 있다.
목욕탕에 문의하세요.'
목욕탕 수익만으론 너무 힘겨워 담란향씨가 자신의 한옥집을 개조해
목욕탕 수익만으론 너무 힘겨워 담란향씨가 자신의 한옥집을 개조해
한달 전부터 문을 연'북촌 중앙 게스트하우스'를 홍보하는 글을
남탕 출입구 쪽에 붙어놓았다.
남탕으로 올라가는 카운트 유리창엔 반듯한 한자로
'定期休日 매주 水요일'이라고 써 붙였다.
2층 남탕 안에도 마찬가지다.
드라이기에는 '100원 투입구'란 글씨를,
화장실 입구에는 '2초 동안 지긋히 눌러주세요'란 문구를, 탕 입구 왼쪽에는
'금연구역 단속기간, 흡연하면 폐와 간을 손상시킨다'는 경고문을 붙여 놓았다.
글씨체가 다르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지만 지난 날 어디선가 본 듯한 정겨움으로
옷장에 걸려 있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열쇠 고리,
바가지에 담긴 양치용 소금, 둥근 숫자판이 붙어 있는
오래된 체중계 등이 '동네 사랑방'중앙탕의 그 때 그 시절을 말해준다.
그래도 계동 골목길 '중앙탕'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만원을 받아도 좋으니
문 닫지 말라'는 동네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는 탓이다.
계동 사람들에게 '중앙탕'은 시나브로 잊을 수 없는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