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활빈단,
홍대 앞 대학생들에게 심야 캠페인
내외국인 대학생들에게
北 김일성조선왕가 3대세습독재 타도 촉구시위
中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상자 석방요구 국제캠페인 전개
시민단체 활빈단 홍정식(KOREA TIGERS-6.25둥이 나라사랑실천운동 대표)단장이 0시 자정넘은 야심한 밤에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내외국인 대학생들이 밤중에 가장 많이 모이는 명소인 홍대입구 지하철역 5번출구에서 내외국인 대학생들에게 北3대세습독재 타도와 중국정부에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상자 석방 요구 국제캠페인에 세계대학생들이 한 목소리를 내 줄것을 촉구하는 야간시위를 벌였다.
자정이 넘은 밤중에 한자로 표기된 플래카드를 본 중국인 대학생 관광객 20여명은 타국에서도 류샤바오 석방 요구와 중국이 인권말살국인 현대판 세습왕조 북한을 비호하지 말고 탈북난민 강제북송 중단을 요구하는 한국의 시민운동가 심야시위에 놀란 표정이었다.
이어 마지막 운행하는 서울대입구역행 지하철 전동차 내에서 벌인 反北시위를 본 대학생들은 군대도 안간 27세 김정은이가 벼락치기 대장인 된 북한을 이구동성으로 규탄했다.
전동차 내 대학생들은 “배고파 못살겠다! 갈아치자 김정일-김정은 독재왕조!” “김정남 · 김정은의 왕자의 난 부추켜 김정일을 스트레스 충격사 시키자!” “김정일-김정은 제거 현상금 2억달러 벌자!” 등 구호를 서울대입구역 도착때까지 구호를 연호해 외치면서 北김일성조선왕조의 민중봉기 촉구글을 인터넷에 올려 김일성대학생 등 北청소년 네티즌들에 전파 확산시킬 것을 홍단장에 다짐했다.
지난 6.25전쟁기념일 부터 회갑기념 공익-국익을 위한 국가사회 봉사 100회 나라사랑 실천 애국캠페인을 청소년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활빈단은 연말까지 친북 전교조교사로 부터 미군철수, 삐뚠 용공교육을 받은 대학생 등 청소년들에 좌경의식화 차단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특히 활빈단은 대학생들이 야간에 많이 모이는 건국대역, 신림역, 신촌역, 이대역과 자정넘어 귀가하는 전동차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RIGHT NEW KOREA(바른새한국), 6.25둥이아버지모임, JC(한국청년회의소)애국실천모임, 백두산예술단 등 탈북자모임, 북민추협(북한민주화추진운동협의회)공동의장으로 추대될 김영삼-전두환 전직대통령과 함께 바른청년한국인되기운동과 종북세력삼청교육시키기 국가정체성 확립운동을 줄기차게 벌일 계획이다.
을 돈과 대북지원금 풀어 굶어죽는 북녘동포 살려내라 대북 규탄 시위
강원도고성군 화진포 김일성별장에 뿌려진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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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고성군이 복원한 김일성 별장, 화진포 경관이 제일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성장과정, 자질과 후계자 결정 배경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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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대해 현재 해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1988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의 요리사로 11년간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임.
- 그는 북한의 당과 군대, 국가의 고위간부들이 참석하는 연회뿐만 아니라 김정일 가족의 생일파티를 준비하였고, 김정일의 바캉스에도 동행함으로써 김정은의 개인적 신상정보와 자질, 위상 등에 대해 잘 알게 됐음.
- 그래서 필자는 2008년 12월 일본을 방문하여 후지모토 겐지와 장시간 북한의 주요 엘리트와 김정은의 위상 등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하였음.
- 아래에 소개하는 김정은의 성장과정은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 필자의 그와의 인터뷰, 그리고 기타 자료 등을 참고해 정리한 것임.
1) 김정은의 성장 과정과 자질
○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은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1983년 1월 8일에 태어났음.
- 김정일은 고영희를 1975년경에 만나 1976년경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일본과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은 고영희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인 고태문의 딸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남한 정보당국은 고영희가 1999년 사망한 재일동포 고경택의 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
- 김정은에게는 김정철이라는 친형과 김여정(또는 김일순)이라는 여동생이 있음.
- 김정철은 1980년생이고, 김여정은 1987년생이다.
○ 필자는 그동안 여러 논문에서 군주제 국가에서 군주의 생일이 가장 중요한 명절인 것처럼,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 ‘최대명절’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그리고 북한이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이 1974년 그의 생일 바로 3일전인 2월 1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고,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것도 그의 생일을 전후하여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음.
- 필자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김정은은 바로 그의 생일 날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음.
○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초대소였는데, 그 때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함.
- 이는 김정일이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함.
○ 김정은은 후지모토 겐지를 처음 만나 악수할 때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았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김정은의 당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수기에 적었음.
-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임.
○ 김정은의 이 같은 면모는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김정일이 그를 통이 크게 키운데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것임.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음식이라면 술도 마시게 했고, 7세부터 초대소 안에서 벤츠600형을 운전하게 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에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왕자 정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수기에 ‘초등학생’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밝혔음.
- 그에 의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북한에서 정식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며, 장성택이 이들의 교육 문제를 담당했음.
- 장성택은 고모부로서 김정철 및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밀접하게 관여한 셈임.
○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호화 별장이 곳곳에 있는데, 그 중 평양 근처에 위치한 강동(별칭 ‘32호’)초대소에는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 고영희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한 ‘1호 건물’,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와 남편 장성택(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부부를 위한 ‘2호 건물’, 그리고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 있음.
- 초대소의 이 같은 구성은 외부세계에서 김정남의 ‘후원자’로 간주되는 장성택이 실상은 고모부로서 김정은과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줌.
- 후지모토 겐지는 바로 이 강동초대소에서 김정철, 김정은에게 당구를 가르쳤고, 그 후 이들은 줄곧 당구를 즐긴 것으로 보임.
○ 김정은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가 12세 때 여동생이 그에 대해 ‘작은 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는 일화에서도 나타남.
- 그 사건 이후 후지모토 겐지는 정철에게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은에게는 ‘작은’을 빼고 ‘대장동지’라고 불렀다고 함.
- 이처럼 정은은 상당히 기가 셌음.
- 그는 스포츠에도 만능이며, 김정일처럼 영화도 좋아했다고 함.
-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은 북한에서 ‘김대장’ 또는 ‘청년대장’으로 불려왔는데,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통해 이미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대장’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하고 있음이 가족의 식사자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술회하고 있음.
- 식탁에서 김정일이 가운데 앉고, 그 왼쪽에 부인 고영희가 앉았으며, 김정은은 고영희 왼쪽에 앉았음.
- 그리고 딸 김여정이 김정일 오른편에 앉았고, 김정철은 김여정의 오른쪽에 앉았음.
- 그래서 부인 고영희가 빠질 경우 김정은은 김정일 바로 옆자리에 앉았지만, 김정철은 늘 김정일 옆에 앉지 못했다는 것임.
2)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 국내외에서 알려진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에 대한 정보 중엔 부정확한 것이 많음.
- 스위스의 프랑스어 시사주간지 렙도(L'Hebdo)는 2009년 3월 5일자 기사에서 김정은이 베른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e)를 ‘박철(Pak Chol)’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고 보도했음.
- L'Hebdo의 이 같은 보도를 국내외의 많은 언론들은 무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베른국제학교를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다닌 것은 3남 김정은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임.
○ 김정철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베른에 유학한 사실은 이미 2006년에 국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일본인 오오노 가즈모토(大野和基)씨의 스위스 현지 취재에 의해 밝혀진바 있고, 국내의 한 월간지를 통해서 상세히 소개된 바 있음.
- 필자도 김정철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2008년 8월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철의 베른국제학교 재학 시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음.
○ ‘박철(Pak Chol)’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1998년 5월까지 스위스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의 망명한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의 남편)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철’은 김정철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임.
- 공교롭게도 후지모토 겐지의 북한 이름도 박철이었음.
- 그래서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철이 자신을 좋아해서 베른국제학교에서 ‘박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음.
- L'Hebdo는 또한 ‘박철’의 성격에 대해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3남 김정은의 성격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의 성격임.
○ 2009년 6월 14일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보도에 의하면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가 아니라 자택 인근의 공립중학교를 ‘박운(Pak Un)’이라는 가명으로 다녔음.
- ‘박운(은)’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스위스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운(은)’은 김정은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임.
<사진>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김정은의 스위스 베른중학교 시절 16세의 모습
○ 필자는 잘 아는 사이인 일본 주간 겐다이(週刊現代)의 콘도 다이스케 부편집장에게 마이니치신문의 보도 직후 전화를 해서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해 공개한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해 후지모토 겐지의 견해를 물어보게 하였음.
- 그랬더니 후지모토 겐지는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사진이 “100%” 맞고, “그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김정은과 같이 놀았던 시절이 생각났다”고 대답했다고 함.
○ 김정은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베른에 체류했음.
- 처음에 1년간 외국어교육학생반에 있다가 6학년 때 정규반으로 옮겼으며, 그후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서 7학년과 8학년을 이수하고 고등학교 단계인 9학년에도 일정 기간 재학하다가 2000년 말에 학교를 그만 뒀음
○ 김정운이 다녔던 베른의 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측은 “북한 외교관 자녀의 신분으로 1998년 8월부터 2000년 가을까지 북한 출신의 한 학생이 재학했다”고 2009년 6월 15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음.
- 이 기자회견에서 베른 칸톤(州) 쾨니츠 게마인데(區)의 윌리 슈투더 구청장은 “이 학생은 잘 어울렸으며 부지런하고 야심에 차 있었다”면서 “그의 취미는 농구”라고 말했음.
- 김정은이 다녔던 학교의 현재 교장이자 당시 수학 교사였던 페타 부리(52)씨는 김정은에 대해 “나는 그 학생을 기억하지만 직접 가르친 적은 없다”고 말하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 학생이 잘 어울리고, 부지런하고, 야심 찬 학생이었다는 것 뿐”이라고 덧붙였음.
○ 김정은은 농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친형인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됨.
-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철은 특히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로 7년 연속 리바운드 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니스 로드맨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로드맨의 등번호가 새겨진 시카고 불스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했음.
- 후지모토는 1996년에 일본에 귀국했다가 1998년 북한에 돌아와서는 과거 김정철과 김정은이 사용하던 체육관이 멋진 농구 코트로 변했으며 각종 기구도 미 NBA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됨.
- 오랜만에 김정철과 김정은을 다시 보게 된 후지모토 겐지는 “2년 사이에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자랐으며 근육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음.
○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욕과 리더십을 보여 왔음.
- 반면 그의 형 김정철은 어렸을 때부터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야망이 없기 때문에 북한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말했음.
- 정철팀과 정은팀이 농구시합을 한 후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정은은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음.
- 김정은은 팀원들에게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했느냐? 더 연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함.
- 그의 승부욕과 보스 기질을 확인해주는 대목임.
○ 김정은에게는 강한 면만 있는 것이라 아니라 사람을 감동시키는 세심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임.
- 2000년 7월 김정일 일가와 백두산에 올랐을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과 안개 속에서 나란히 소변을 보게 되었음.
- 그 때 후지모토 겐지가 그에게 “혹시 내 것 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한 그 마음 씀씀이에 후지모토 겐지는 감동했다고 회고하고 있음.
○ 또한 백두산에서 마실 맥주가 떨어져 무심코 김정은에게 이야기했더니 며칠 후 밤에 그가 후지모토 겐지의 방으로 찾아와 양쪽 바지 주머니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두 병 꺼내면서 마시라고 내밀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는 그 때를 기억하며 김정은의 “그런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다”고 수기에 적었음.
○ 장성택과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간의 관계는 적어도 2003년 황장엽 전 비서가 한국 국회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김정일 이후 장성택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함으로써 이후 장성택이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직무정지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것으로 보임.
- 1990년대 중반 김정일 패밀리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정일과 장성택이 싸운 적이 있었음.
- 이 때 장성택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김정일은 냅킨을 던지려 했고, 이를 고영희가 말렸음.
- 그 때 상황이 매우 심각했는데, 고영희는 장성택의 편이 되어 주었고, 당시 고영희와 장성택 간의 사이는 좋았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설명했음.
3)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와 장성택의 직무정지
○ 후지모토 겐지는 1992년 김정일이 부인 고영희 및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수기에서 적고 있음.
- 이는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 이전에 이미 김정일이 고영희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함.
○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에 대해 북한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숭배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김정은의 북한 지도부 내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음.
- 1998년경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는 2002년에 절정에 도달하였음.
- 북한 내부자료에서 고영희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 “인민군 장병들을 충성과 위훈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자애로운 스승” 등으로 치켜세워졌음.
- 이처럼 고영희가 북한 내부에서 ‘국모(國母)’로 내세워짐으로써 그와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또는 3남 김정은이 김정일과 성혜림 간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보다 후계자로 지명받기에 더욱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음.
○ 1998년에 미국에 망명한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은 고영희가 1990년대 초부터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대남 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은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김용순 대남 비서는 2000년에만 해도 김국태 비서와 함께 김정일 총비서의 각종 공개 활동을 각각 37회 수행하는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 인사였음.
- 고영숙은 또한 김용순 비서와 고영희가 특히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을 기도하다 적발돼 추방된 후 북한에 귀환하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후계자 옹립작업에 들어갔다고 주장했음.
- 고영숙의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김용순 대남 비서가 음주운전으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2003년 6월 16일이 고영희 생일이라는 점은 김 비서가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함.
- 김용순 비서가 동년 10월 26일 사망함으로써 고영희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이후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을 통해 김정철 또는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을 추진한 것으로 판단됨.
○ 고영희의 부상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중반 권력엘리트의 부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됨.
- 고영희는 김일성 사후인 1995년경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에 동행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2002년 시점에는 확고하게 제2인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음.
-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7월 4일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하여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발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
- 황장엽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철 또는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고영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음.
- 그 결과 2003년 7월 이후 장성택의 공식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2004년에는 직무 정지되기에 이르렀음.
- 이는 고영희와 리제강, 리용철 등 그의 측근들이 한국 국회에서의 황장엽 발언을 빌미로 장성택을 김정일의 권력을 넘보는 ‘야심가’로 몰아 무력화시킨 결과로 해석되고 있음.
○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에서 유선암으로 사망하여 6월초에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확인됨.
- 고영희의 사망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동년 8월 말이었음.
-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고영희 사망으로 인해 기존의 후계구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들이 제기됐음.
- 물론 고영희의 사망으로 김정철과 김정은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 중 한명을 상실하게 되었음.
- 하지만 절대권력자 김정일의 마음이 김정남보다 여전히 그들에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이었음.
4) 김정은으로의 후계자 내정과 북한 엘리트들의 입장
○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는 북한사회에서 김정은은 단순히 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의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서 성장했음.
- 사람들은 김정은을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김정은은 자신보다 나이가 31세나 더 많고 김정일의 스케줄을 관리했던 서기 김옥(김정일의 현 동거인)에게 ‘이모’나 ‘김옥 동지’도 아니고 그냥 ‘옥이’라고 불렀음.
-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함.
○ 김정은이 18세 때에 후지모토 겐지에게 “나는 매일 제트스키를 타고, 해양스포츠를 하고, 롤러블레이드․승마를 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은 적이 있음.
- 이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18세의 나이에 벌써 일반 사람들의 생활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음.
○ 김정은은 원산, 신천, 평양 등 전국에 있는 초대소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당과 군대 간부들을 만나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들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3대 세습을 통한 후계 계승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 앞에서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고영희도 간부들과의 식사에서 김정철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필자에게 말했음.
- 후지모토 겐지는 또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지원할 것이라고 내다봤음.
- 또한 김정일의 현부인인 김옥도 성격이 착한 사람으로서 야망을 갖기보다 김정은을 지원할 것이라고 전망했음.
- 이처럼 김정일 패밀리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임.
○ 결국은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었지만, 2000년대 상반기까지만 해도 차남 김정철이 후계자로 결정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2003년 12월 말경,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책임일군들 앞에서 내년(2004)은 “내가 김일성 주석의 위업을 이어 간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나간 10년은 우리에게 간고하였지만 우리의 선군 령도가 천만번 지당한지 알게 해 주었다”고 말하면서 김정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음.
-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이 백전백승의 력사와 전통을 이어 위대한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끝없이 빛내어 나가야 할 신성한 임무가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하여 자신처럼 김정철을 잘 받들어 보좌할 것”을 지시하였음.
- 당시 김정철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간부부 과장으로 막 승진하여 중앙당 내부에서 사업하고 있었음.
- 그러나 그 후 김정철이 김정일의 뒤를 이을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김정일의 마음이 3남 김정은에게로 기운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
○ 김정일은 자신을 닮아 적극적인 성격의 김정은을 더 좋아했음.
- 그래서 한 번은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 정운은 나하고 닮았다”고 말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은은 김정일의 얼굴을 쏙 빼닮았으며 체형까지도 흡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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