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정치’의 함정에 빠진 M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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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극장정치’의 함정에 빠진 M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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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한국 관찰자들은 민주화 이후 과연 한국 정치의 ‘본질’이 변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가 ‘대통령 한 사람의 쇼’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코 잘못 짚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의 지적대로 한국 정치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이런 정치의 본질을 바꾸는 데 있다. 그것은 대통령이 혼자 기획하고 연출할 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하는 ‘극장정치’의 극복에 다름 아니다.
극장정치에서는 국민이 주인이 아니라 그저 대통령의 연기를 구경만 하는 관객일 뿐이다. 국민과의 양방향 소통이 될 리 없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들은 ‘깜짝쇼’ 같은 내각 개편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방편으로는 유효했으나 안정된 지지 기반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이번 개각에서 나타난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 모습도 극장정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책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극장정치로는 전의(戰意)에 가득 찬 ‘포로정치’를 극복할 수 없다. 지난 정권에서 문제됐던 코드정치는 상대 입장의 정통성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단지 누가 옳으냐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하지만 작금 여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는 옳고 그른 것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다. 단지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를 저울질하는 포로정치에 다름 아니다.
전쟁에서 장군들은 될 수 있으면 포로에 대한 룰을 지키려 한다. 인간애의 발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을 죽였을 때 나타날 결사항전의 후유증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포로정치에서 나타나는 보복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구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특임장관의 교체는 이런 정치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의지 자체가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아마도 이번 개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민통합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4대 강 사업이나 세종시 문제 등으로 충청·강원 등 대통령으로부터 멀어지는 곳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링컨이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노예해방 때문이 아니다. 링컨의 가장 우선적 과제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분열의 위기에 처한 연방의 유지였다. 그래서 남북의 경계선에 위치한 주(州)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최우선적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연방도 유지되고 노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링컨의 교훈을 살리려면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경계선상에 있는 시·도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심각히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국토해양부 장관 유임에서 보듯 이런 반성과 성찰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교안보 면에서도 정상외교의 성공에 매몰되고 있는 남북관계에 숨통을 열어놓을 수 있는 모습이 전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핵 정상회의를 유치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어느 대통령보다 더 부각시켰다. 이 과정에서 국내 문제나 남북관계가 하찮게 취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 정치나 남북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정상외교에 경도되는 것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외교가 남북관계의 트랩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여 한·미동맹으로 대북 압박정책을 강화하면서도 남북관계에 숨통을 열어놓을 수 있는 이른바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2중 결정’ 전략 같은 것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팀의 유임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정상외교에 매몰되어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개각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과거 대통령들이 빠져들었던 함정들에서 이 대통령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반향 없는 메아리를 기대하는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와 같은 심정이지만, 그래도 8·15 경축사에서 나올 MB의 구상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본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