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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中)
댓글 0건 조회 367회 작성일 1970-01-01 09:00
이제 우리들만의 잔치는 끝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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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이다. 지금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학교 이름을 1985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종로학원에서 세상 구경 을 하던 동기놈하고 이야기하다가 문득 학교 이야기를 했었 다. '야, 우리 학교는 좋은 학교야! 강남에 있는 모 학교는 교장 이 들어오면, 서무과장이 현관까지 나와서 차문을 열고, 90도 인사를 한대. 그 학교 나온 친구녀석이 하는 이야기인데, 자기 네 학교는 학교도 아니랜다 야. 야 ** 그게 무슨 학교냐!' 다시 한번 계산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꼈었다. 1980년대 말. 한참 전교조 문제로 전국이 시끄러웠을 때, 전교 조의 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때. 밖에서 보았 던 우리 모교는 많은 선생님들께서 이미 그런 사업들을 하고 계셨었고, 우리는 그런 기반 위에서 교육받았음을 다시 한번 자랑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중앙에서 뒹굴었고, 그렇게 중앙이 우리의 기반 이었다.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다. 한없이 자랑스럽기만 했었 다. 일본 제일의 후지산을 오르면서 가슴에 중앙 마크 달린 T를 입고, 벅찬 마음을 함께 하기도 했었다. 한번씩 뵙는 중앙 의 선배들은 정말 우상이었고, 신앙이었고,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저 크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선배들이었다. 6.10만세의 주동 이시라면서 두루마기를 입고 우리 앞에 서셨던 朴龍柱 선배님 을 뵈면서, 연단보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꼭 개교기념일 만 세 삼창을 외치시던 一石 이희승 선배님을 뵈면서, 우리는 어 느 새 중앙에 하나 하나 물들어 가고 있었다. 군 훈련소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74회 선배는 한없이 반가웠 고, 후임임에도 몰래 가지고 와서 후배를 위해 같이 건빵을 먹 으면서 중앙을 느꼈었다. 일본 동경의 어느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다가 우연치 않게, '흘러 흘러 들어온 여기'라는 말을 듣 고, 혁대의 중앙 마크를 보여드리면서 무릎을 끓었던 60 몇 회 선배님. 十竹郞 선배라며, 재수할 때 긴 머리를 하고, 집회 실에 찾아와서, '야, 열심히 들 해 임마.' 하면서 200원짜리 라면을 돌렸던 73회 호상이 형. 언젠가 YMCA에서 행사를 하는데, 우리가 먼저 행사하기로 했 던 대강당을 갑자기 사정이 있어서 못 빌려주겠다고 하는 일 이 있었다. 딱 한마디 했었다. '우리는 괞챦습니다. 그런데, 저희 21년이나 된 선배님들하고 함께 하는 행사인데, 그 분들께는 무어라 말씀드립니까.' 결국, 종로 2가 회관의 대강당에서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중앙이 있었다. 사람마다 차이 가 있겠지만, 정말 중앙은 우리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사회라는 물들을 먹으면서 보니, 그 신앙은 우리들만 의 신앙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들이 든다. 계산이라는 동산에 서 안주하면서 살았던 우리들만의 '오기' 아니었나 싶다. 중앙과 관련있는 많은 행사를 가보고, 다른 곳의 행사도 참석 해보고, 점차로 느낀 것은, '우리들만의 잔치' 아니었나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잔치를 누가 하였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나'였다. 언젠가, 야구장에서 본 응원이 있었다. 우리들의 18번. '나가 자 중앙'이었다. 그러나, 재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기에 는 이미 너무 숨이 차 있었다. 반가움보다는 어설픈 웃음을 짓고 말았다. 가끔 계산에 오른다. 식구들과 함께 하기도 한다. 하루는 후 문에서 나오는데, 하복 단추를 전부 풀어헤치고 오는 후배를 보고. '옷 잘 입자.'라고 하였을 때, 그 후배의 시선이 지금 도 집사람의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같은 방향임을 확인 하고, 태워주겠다고 말을 하였을 때, 냉랭하던 그 시선을 지 금도 잊지 못한다. "개인차이 이겠지. 그래도, 우리는 낼름 집어타고. '선배님, 감사합니다.' 했었는데. . . " 자위를 해보지만. . . . 그네들에게 우리는 무엇일까. 고등학교 3학년 6월 어느 날. 푸른 제복 빵떡 모자를 쓰고, 종 로 한일관에서 열린 62회 동창회에 참석해서 밥 한 그릇 얻어 먹으면서 무한히 선배들이 존경스러웠었는데. . . 다시 그 나이가 된 나는 재학생들에게 무엇일까. 넘을 수 없는 산이었는데, 야구장에서 함께 노래를 하며 얼 굴 벌개지던 선배님들처럼 나도 그렇게 비추어 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만의 잔치에 내가 원흉인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야구장에서 선배님들과 응원하면서 술 한잔 은 했었지만, 그 응원을 재학생들과 본격적으로 하지는 못했었 다. 몇번 시도는 했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었다. 그리고 야 구장에서 느꼈던 그 거리감. 서울의 어느 명문과 시합을 하였 을 때. 우리의 응원은 오합지졸이었다. 또 한번의 우리들만의 잔치를 보는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들만의 잔치는 하지 말자. 부정도 하지 말자.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자. 강북에 점점 과거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는 학교이다. 서울대에 서도 더 이상 동창회가 힘든 학교이다. 다른 학교에서도 후배 들 보기가 예전같지 않은 학교이다. (물론, 대학이 전부는 아 니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자. 분명, 서로서로 하나씩은 할 일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그 하나씩의 길을 갔으면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길이지만 하나씩 가도록 하자. 거름 거름 덕성을 쌓아올리지 않더라도, 하늘 뚫고 말려는 저 뫼 같지는 않아도, 흘러 흘러 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고, 솟아 솟아 솟아서 끝이 없다면, 넓고 깊고 큰 그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다. 歷史가 오래된 傳統이 있는 곳이라면, 그만큼 저력이 있다. 그 저력을 여기에서 말 수는 없다. 우리들만의 잔치가 아니고, 정말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야 한다. 내 미력한 힘이나마, 작은 것 하나씩을 하고자 한다. * 높으신 선배님들께 무례한 말을 함부로 써서 죄송합니다. * 이제부터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제가 알고 있는, '응원가'를 하나씩 올리겠습니다. 얼마만에 한번씩 일지, 얼 마가 갈지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나 걸릴 지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더 가까운 우리 학생들과 역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심이 있고, 집에서 함께 보내기를 바라는 집사람과 두 딸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다른 길은 아닐 것입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를 있게 해준. 中央이기에. . . . . 그리고, 故人이 되신 朴龍柱 선배님께 감히 약속드립니다. 2001년 3월 23일 면목동에서 76회 朴星奇 * 저는 응원반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고 3 황금사자기도 담임 선생님 몰래 응원하였던 평범한 학생일 따름입니다. 많이 틀린 내용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마다 동문들의 정정을 바라겠습니다. 아울러, 이 싸이트에 재학생들이 많이 들렀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응원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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