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폴로어십`이 아쉽다, <font color=blue>전병준(70회)</font>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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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멋진 폴로어십`이 아쉽다 | |
기사입력 2011.11.30 17:10:24 | 최종수정 2011.11.30 17:14:46 |
역사가들이 평가하듯이 2차 대전의 승부를 가른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그리 만만치 않은 작전이었다. 이미 작전의 가능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데다 나치독일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작전을 감행했고 결과는 대승리였다. 승리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폴로어십이었다. 사령관인 아이젠하워는 알고 있었다. 장병들의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그는 작전 전날 상륙 시 맨 앞에 투입되는 장병들에게 "내 지시를 따라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고 부하들은 "기꺼이 하겠다"고 화답했다. 결국 장병들의 자발적인 전투의지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선거의 해를 한 해 앞두고 벌써부터 차기 정부를 끌고 갈 리더십에 관한 국민적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더구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종래 `정치적 무관심권`에 머물던 사람들조차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에 대해 한마디씩 하고 있는 형국이다. 안철수와 박원순의 등장, 새로운 당의 창당 가능성, 기존 여야 정치권의 이합집산 등이 모두 그러한 국민적 관심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기자는 이 같은 최근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쉽게 달아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우리 국민의 성향을 감안할 때 어느 누가 집권해도 멋진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주화 이후 국민적 여망을 받으며 대통령에 선출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 모두 시쳇말로 `국민의 헹가래를 받다가 버려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가 그렇게 이상한 대통령들만 뽑은 것일까. 우리 정치구조가 제대로 된 국민적 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뽑아만 놓고 그 다음날부터는 약점만 찾는 듯한 우리 국민의 미성숙한 폴로어십 때문일까.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기자는 민주화 이후 선출된 대통령 모두 그 당시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인물들이라고 본다. 그들 각자의 장점들과 경륜을 살펴보면 국민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뽑아놓고 난 이후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란다. 그것도 국가적이나 공동체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해관계에서 대통령을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기도 전에 예단해서 비판하고 무시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쇠고기 파동, 4대강 투쟁,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이 그 예다. 한 정치학자의 말처럼 "뽑은 다음날부터 죽도록 미워하는 국민적 병리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선후진국을 구분할 때 리더의 능력보다는 폴로어들의 지혜와 공동체의식이 더 중요하다. 국가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복지혜택을 줄이지 말라고 데모하는 남유럽 국민들을 보면 한심한 폴로어십의 극단이 느껴진다. 반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자기보다는 남을 더 배려하는 일본인들로부터는 무서울 정도로 성숙된 폴로어십을 보게 된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보수꼴통` `친북좌빨` 하면서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한국인들도 결코 멋진 폴로어십의 소유자는 아니다.
`안철수 현상`이 현상을 넘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으로 이어지려면 기품 있고 참을성 있는 폴로어들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아니 그러한 폴로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 역량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2040세대, 사회적 약자, 기대만 큰 기회주의자들 편에 설 경우 그 세력 역시 `헹가래 받다 버려지는`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미 50년 전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선진국 폴로어십의 정의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슨 일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전병준 부국장겸 산업·지식부장]
선거의 해를 한 해 앞두고 벌써부터 차기 정부를 끌고 갈 리더십에 관한 국민적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더구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종래 `정치적 무관심권`에 머물던 사람들조차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에 대해 한마디씩 하고 있는 형국이다. 안철수와 박원순의 등장, 새로운 당의 창당 가능성, 기존 여야 정치권의 이합집산 등이 모두 그러한 국민적 관심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기자는 이 같은 최근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쉽게 달아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우리 국민의 성향을 감안할 때 어느 누가 집권해도 멋진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주화 이후 국민적 여망을 받으며 대통령에 선출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 모두 시쳇말로 `국민의 헹가래를 받다가 버려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가 그렇게 이상한 대통령들만 뽑은 것일까. 우리 정치구조가 제대로 된 국민적 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뽑아만 놓고 그 다음날부터는 약점만 찾는 듯한 우리 국민의 미성숙한 폴로어십 때문일까.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기자는 민주화 이후 선출된 대통령 모두 그 당시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인물들이라고 본다. 그들 각자의 장점들과 경륜을 살펴보면 국민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뽑아놓고 난 이후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란다. 그것도 국가적이나 공동체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해관계에서 대통령을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기도 전에 예단해서 비판하고 무시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쇠고기 파동, 4대강 투쟁,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이 그 예다. 한 정치학자의 말처럼 "뽑은 다음날부터 죽도록 미워하는 국민적 병리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선후진국을 구분할 때 리더의 능력보다는 폴로어들의 지혜와 공동체의식이 더 중요하다. 국가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복지혜택을 줄이지 말라고 데모하는 남유럽 국민들을 보면 한심한 폴로어십의 극단이 느껴진다. 반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자기보다는 남을 더 배려하는 일본인들로부터는 무서울 정도로 성숙된 폴로어십을 보게 된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보수꼴통` `친북좌빨` 하면서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한국인들도 결코 멋진 폴로어십의 소유자는 아니다.
`안철수 현상`이 현상을 넘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으로 이어지려면 기품 있고 참을성 있는 폴로어들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아니 그러한 폴로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 역량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2040세대, 사회적 약자, 기대만 큰 기회주의자들 편에 설 경우 그 세력 역시 `헹가래 받다 버려지는`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미 50년 전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선진국 폴로어십의 정의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슨 일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전병준 부국장겸 산업·지식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