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중앙교우운영 독립신문집기 민족연배상금 못내가압류 처지!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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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56회 작성일 2009-09-02 14:04
(조선일보)중앙교우운영 독립신문집기 민족연배상금 못내가압류 처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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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60회 홍정식과 78회 신혜식후배 교우가 좌익온상 민족문제연구소에 배상금을 못물어 가압류 당하는 처지 입니다.교우여러분의 성원과 격려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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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연설 했다고 배상금 내게 하면서 불법 촛불시위 주동자는 왜 안물리나"

1일 오후 2시, 법원 집행관 3명이 서울 종로 홍파동에 있는 인터넷매체 '독립신문' 사무실에 나타났다. 이들은 컴퓨터, 모니터, 팩시밀리 등 사무용품 8개에 빨간색 가압류 스티커를 붙였다.

집행관들은 "10일 이내로 배상금을 내지 못할 경우 가압류된 물품이 경매에 부쳐진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이날 이뤄진 가압류는 지난해 11월 내려진 대법원 판결에 따른 강제집행이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신혜식(41) 독립신문 대표에게 김동주(43) 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대표, 홍정식(59) 활빈단장 등 2명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와 소장 임헌영(68·본명 임준열)씨 등에게 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신 대표가 2005년 8월부터 12월까지 서울 청량리 민문연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민문연과 임 소장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시했다.

신 대표는 "일부 집회 참가자들이 '빨갱이' '북으로 가라'는 구호를 외치긴 했지만,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발언자로 나선 신 대표에게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었다. 그가 직접 민문연 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집회 주동자로서 참가자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 대표는 "집회에서 연설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면,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불법 촛불시위 주동자들에 대해서도 배상금을 내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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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빈단 홍정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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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옆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중앙고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을 친일인사로 매도 폄하한 '민족문제연구소'를 규탄하는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활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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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정식 활빈단장과 성태진 푸른서울가꾸기시민운동본부 상임대표가 민족문제연구소 창립15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세종문화회관 입구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해체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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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사진 중앙)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헌법의 영토조항 재검토는 현 정권이 자유민주 통일을 거부하고, 赤化통일로 가는 '연방제-연합제' 음모라고 말했다. 좌측의 인물은 활빈단의 홍정식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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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정식 활빈단 단장이 이순신 동상 앞 횡단보도에서 일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철승(李哲承)의 추억

▽민족의 지도자를 만나다▽
200412140376.jpg抗日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全州北中(전주북중·전주고등학교 전신) 재학 시절부터 日帝가 강요하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국어(國語-일본어)도 하지 않으면서 민족차별을 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두들겨 패 가정근신 또는 정학을 당해 2학년 때 낙제를 하고 말았다.

1942년 5학년 졸업반 때에는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조선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不逞(불령)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출세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仲父 李錫柱(이석주: 제헌의원)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우리 힘으로 세운 민족학교인 普成전문학교(普專·고려대학교 전신)에 진학하라』고 권유해서 普成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 선생이 교장으로 계셔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仁村 선생님은 1914년 일본 와세다大를 졸업하고 기약 없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많은 人材를 양성해야 한다는 敎育立國의 신념 아래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하여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에는 1905년에 李容翊 선생이 설립한 普成전문학교가 경영난에 봉착하자 이를 인수, 교장에 취임했다. 나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지금 고려대학교 仁村 동상 아래 잔디밭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았던 仁村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仁村 선생은 學兵지원을 권유한 적이 없다▽

당시 普專에는 민족진영의 金性洙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張德秀(장덕수), 安浩相(안호상), 兪鎭午(유진오), 陳承錄(진승록), 孫晉泰(손진태) 선생 등과 사회주의 진영의 尹行重(윤행중), 朴克彩(박극채), 崔容達(최용달) 선생 등이 있었다.
이분들은 이념은 달랐지만 仁村 선생 밑에서 抗日운동에는 대립 없이 서로 합작하면서 후진양성과 자주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다. 광복 후에는 바로 左右翼 진영의 지도자로 갈라져 각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 그곳 우리 普專은 「민족의 향기가 풍기는 젊은이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소개할 逸話(일화)가 있다. 1930년 仁村 선생은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에 계시는 부친 金暻中옹을 찾아뵙고 普專 인수를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부친은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仁村 선생은 宋鎭禹, 白寬洙 선생의 권유에 따라 부친을 무조건 서울로 모시되 중앙고보 학생들과 普專학생들로 하여금 서울역 플랫폼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하기로 했다.
金옹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중앙고보 학생들과 普專 일부학생들의 대대적인 환영이 있었다. 金옹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金옹은 그후 경영난에 빠져 있는 普專의 인수를 승낙하고 막대한 재산을 出捐(출연)하여 普專 인수가 이루어졌다.
1943년 10월20일 學徒志願制(학도지원제)가 실시되자 조선총독부는 경찰, 헌병, 기타 행정기관 각급 전문대학 당국을 총동원하여 학병지원을 강요했다. 그들은 지원성적이 부진하자 지도적 인사들을 총동원해 학병권유를 강요했다. 崔南善, 李光洙 선생 등은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東京까지 건너가 학병지원을 권유했고, 尹致昊 선생은 『조선 학도들에게도 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길이 열렸다』라고 권유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仁村 선생의 입장은 어떠하였겠는가?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仁村 선생은 『나는 그들의 교육을 맡았지, 전쟁터로 가라 말라고 맡은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일제에 아부하려고 무단히 仁村 선생의 이름을 판 기사가 실렸다. 뒷날 학병에 끌려가게 된 나는 우리들이 출정하는 날까지 仁村 선생으로부터 학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仁村 선생과 管鮑之交(관포지교)의 동지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古下 宋鎭禹(고하 송진우) 선생도 병 치료를 핑계삼아 학병 권유운동을 일절 기피하였다.
어느 날 내가 仁村 선생을 찾아뵌 자리에서 宋선생이 말씀하기를 『일제가 학병지원을 서두르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다는 증거야. 그들은 이 기회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의 싹을 없애 버리려는 것 같다. 알아서들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학병거부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또 다른 날 내가 尹元求 교우와 함께 칭병을 하고 입원 중인 安浩相 선생을 문병했을 때 선생은 내 귀를 끌어당기며 『패전이 확실해, 기피해』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연희전문학교 羅군의 하숙집에서 경성제대 李赫基(이혁기·광복 직후 좌익의 국군준비대 사령관)군과 학병거부운동을 결의, 이 운동을 조직화해서 강력히 전개하기로 했다.

조선 총독도 다루기 힘들었던 仁村 선생▽

그러나 이 비밀이 혜화전문학교의 金모 군에 의해 새어나가 金군의 친척인 文모라는 親日거두에 의해 고이소(小磯 ) 당시 조선총독에게 알려졌다. 그는 일의 심각함을 感知(감지)한 탓인지 바로 文씨를 통하여 우리 대표들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우리들은 난상토의 끝에 면담에 참석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총독과의 면담은 이루어졌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핵심적인 질문을 분담해서 하였다.
우리는 『일본은 대동아 聖戰(성전)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朝鮮만 독립시키지 않는가?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고이소 총독은 『조선과 일본은 同祖同根(동조동근)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內鮮一體(내선일체)가 되어야 해, 제군들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이소는 옆에 있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학교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보성전문 李哲承입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이모저모 살피더니 『金性洙군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순간 「仁村 선생은 총독까지도 다루기 거북한 존재이구나」 싶었다. 『이번에 전문대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라고 다그쳐 물었으나 분명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총독의 설득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총독 관저에서 나왔다.
그 뒤 1944년 조선총독부는 보성전문을 폐쇄시키지 못하고 보성전문을 京城拓殖經濟專門(경성척식경제전문)으로, 연희전문을 京城工業經營專門(경성공업경영전문)으로, 그리고 梨花女專(이화여전), 淑明女專(숙명여전)을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바꾸었다. 京城法專(경성법전), 明倫專門(명륜전문)과 惠化專門(혜화전문)은 폐쇄시켰다. 결국은 조선의 전문대학도 창씨개명을 당한 격이 되었다.

正義는 실현될 것이다▽

1944년 12월5일 거행된 壯行會(장행회)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우리들을 전송하는 행사였다. 이 장행회에는 李娥珠(이아주: 仁村 선생 부인) 여사, 朴恩惠(박은혜: 장덕수 선생 부인) 여사도 참석하였다. 仁村 선생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교장실에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식이 시작되자 연단에 올라 『나는 여러분의 교육을 맡았지, 입영을 맡은 게 아닌데 오늘 이렇게 모였다』며 비통한 심정을 말씀하셨다.
학생감 張德秀 선생은 『여러분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집단적인 훈련을 받고 행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죽으러 간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내일을 위해 여러분이 심신을 단련하러 간다고 생각하라』 라고 말씀하였다.
이어 安浩相 박사는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땅에는 민족의 정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 가슴속의 양심은 그 어떤 총칼로도 결코 꺾을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면 땅에는 정의가 가득할 것이요, 하늘의 태양은 더욱 빛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서관장이었던 孫晋泰 선생은 『나는 어제 밤 꿈을 꾸었는데 제군들이 나를 번쩍 들어 하늘에 헹가래치며 만세를 불렀다. 나도 따라 만세를 부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고 했다. 「言中有骨(언중유골)」, 우리나라의 독립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행회가 끝나자 본관 앞 운동장에서 우리들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지막 술잔을 들며 李娥珠 여사가 손수 만들어 주신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우리들은 통한의 울분을 「스톰(storm·폭풍)」으로 폭발시켜 스크럼을 짜고 「입실렌트·체이호」의 校號(교호)를 외쳤다. 그 순간 누군가 『일본놈의 경찰서를 쳐부수자』 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시위대를 형성하여 안암동을 빠져나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金性洙 교장선생이 나를 급히 부르셨다. 『이 사람들 일을 저지르겠어. 자네 흥분해서 일을 저지르면 학교는 폐쇄되고 그나마 후배들은 배울 곳조차 없게 돼』 하면서 『오늘이 있듯이 내일도 있네. 설움 속에서 시름을 씻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조선민족이야! 단칼에 베려 하지 말고 매사를 길게 보게』라고 하였다. 나는 흥분된 시위대의 선두를 다시 학교로 돌리고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학병권유의 글은 仁村 선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다▽

나는 1945년 8월15일 日皇(일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듣고 학병 동지들과 함께 9월2일에 상경하여 桂洞(계동)에 있던 仁村 선생 댁을 찾았다. 인자하신 선생은 한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휘~」 하고 한숨을 내쉬시더니 혼자 말처럼 『事必歸正(사필귀정)이야』 하면서 『철승아 잘 살아 돌아왔구나』 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仁村 선생의 울산 金氏와 우리 全義 李氏와는 오랜 세교와 連査(연사: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관계가 있었다. 나의 외조모는 仁村 선생의 종가인 월평(장성)의 울산 김씨다.
나는 계동의 仁村 선생과 韓學洙, 白寬洙, 黃泰文 선생의 사랑방 출입을 했다. 특히 나는 이 댁 사랑방 손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단골이어서 때로는 밥상을 나르는 심부름도 사양치 않고 光復 후 혼란 속에서 건국 前夜 애국 선배지도자들의 경륜과 일거수일투족을 배워 익혔다.
당시 나는 한민당에 참여할 민족진영의 대표적 원로, 특히 金性洙, 白寬洙, 元世動, 徐相日 선생과 한민당 본부를 경비하는 경비대장 역할을 했다.
학교가 건준, 좌익 전위대 손아귀에 들어가자 尹元求, 朴錫圭(박석규) 등 동지들이 복교하고, 나의 복교를 간곡히 권유했다. 특히 仁村 선생 사모님인 李娥株 여사가 간곡히 복교를 권유하여 나는 1945년 11월 보성전문 제1전문부 정치과 3학년에 복교하게 되었다.
요즘 일부에서는 仁村 선생을 친일파 운운하는데, 광복 직후 소련 군정과 공산당이 붉은 정부를 세우기 위해 李承晩 박사를 美帝의 앞잡이, 仁村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했다. 내가 모교에 복교한 당시에도 공산당의 지령을 받는 좌익 학생들은 仁村 선생을 친일파로 배척했다.
1988년에는 仁村 선생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고려大의 일부 좌익분자들이 내려와 도민들이 선생의 고귀한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동상에 페인트칠을 해 전북도민의 분노를 산 일이 있었다.
같은 해 설립자인 金性洙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 全교우들이 성금을 모아 고려大 교정에 건립한 동상을 당시 親北 主思派 학생들이 동아줄로 묶어 구덩이를 파서 매장하려는 패륜행위를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仁村 선생을 만나 뵌 적이 있는가? 배워 본 일이 있는가? 광복후 반세기가 지났는데 무슨 의도와 근거로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자 지도자이며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선생에 대해서 지주 친일파라고 떠들어 댈 수 있는가? 일제시대에도 여러분들의 조부모들은 仁村 선생을 민족적 지도자로 숭앙해 온 것을 알고 있는가? 이런 파렴치한 행위의 배후에는 金日成 집단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음모에 편승하고 있음을 조심하라』고 설득했다.
좌익들이 仁村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仁村 선생의 학병격려 글이다. 이에 대해 兪鎭午 선생은「養虎記」란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학병지원소동이 일단락되어 해당학생이 대부분 학병으로 나가게 되자, 이번에는 某某하는 인사들에게 학병을 격려하는 글을 신문에 쓰라는 명령이 총독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신문이라야 그때 우리말로 간행되는 것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뿐이었다.
나한테 그 명령을 전달해 온 것은 매일신보 기자인 金秉逵(김병규)군이었다. 金의 말에 의하면 집필자 명단은 경무국에서 직접 인선한 것으로서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이광수, 장덕수 그리고 나와 그밖에 1~2人이었다. 그때 조선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총망라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글 쓰지 않는 仁村 선생이 문제였다. 金은 벌써 仁村을 만난 모양으로 仁村 선생의 글은 자기가 대필하겠다 하였더니, 『정 안 쓸 수 없는 것이라면 대필은 하되, 쓴 것을 나에게 반드시 보이고 내도록 하라』고 仁村 선생이 말씀하였다고 전하였다. 전화로 확인해 보았더니 「창피한 글」이나 안 되도록 주의해 달라는 仁村 선생의 대답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즐겨 「창피」한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 기왕 본의 아니게 쓰는 글이니 창피하고 안 창피하고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입을 열면 으레 「八紘一宇(팔굉일우)」니 「內鮮一體(내선일체)」니 해가며 과잉 충성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仁村 선생은 일제 탄압에 맞서 학교 문을 못 닫고 있지만 그러한 「창피」를 특히 싫어하였다. 죽어도 끝까지 민족혼을 지킨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金이 대신 집필해 온 「仁村 선생의 글 아닌 仁村 선생 명의의 글」을 보니 수재인 만큼 염려한 것 같은 「창피」한 표현은 거의 없는 조촐한 글이었다. 나는 「조선청년의 入營은 조선인의 힘의 증대다」라는 취지의 글을 써서 仁村 선생 명의의 글과 함께 金군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지금 그때 학병격려문이 나가게 된 경위를 말하고, 특히 仁村 선생 명의의 글에 관해서는 진짜 집필자의 이름까지 밝힌 것은, 그 글 때문에 仁村 선생은 광복 후 좌익세력들로부터 심히 부당하고 억울한 비난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참여를 극도로 자제했던 仁村 선생▽

仁村 선생은 평생 동안 정치참여를 원하지 않았다. 仁村 선생은 오직 학교(고려大), 언론(동아일보), 산업(경방 등)의 뒷받침을 하며 살아오셨다. 선생은 당신과 管鮑之交의 관계에 있던 古下 宋鎭禹 선생을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였으나 古下 선생이 韓賢宇(한현우)에 의해서 해를 당하여 한민당이 혼란에 빠지자 민족진영 각 계파와 지역관계자들을 규합하는 「중심」의 인물로 추대되어 어쩔 수 없이 한민당 대표를 맡게 되었다.
자유당 정권의 거창 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인권 유린과 무능, 부패 등에 항의해 李始榮 부통령이 사임하자 仁村 선생은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다가 자유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려는 정치파동을 보면서 선생은 『부통령 자리가 尸位素餐(시위소찬: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먹는 일)일지라도 독재정권의 부통령직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 앞에 부끄럽다』는 말씀을 하면서 1952년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仁村 선생은 진솔, 담담하며 요즘과 같은 정치적인 요령과 제스처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선생은 가정의 순수한 할아버지, 아버지의 기풍을 보여 줌으로써 상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선생에 친근감을 가지고 부모 대하듯이 하였다.
1947년 3월 미국 보스턴 국제마라톤대회 선수파견을 요청받은 한국육상경기연맹은 당시 최고 기록 보유자인 건국전문학교의 徐潤福(서윤복) 선수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徐선수를 고려大에 편입시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시키면 고려大의 명예를 선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金源權(김원권) 체육담당 교수와 孫基禎(손기정) 선배에게 간곡한 부탁을 해 徐선수의 고려大 편입을 내락받았다. 徐선수에게 고려大의 정식 학생이 되기도 전에 고려大 유니폼을 입혀 뛰게 하였다. 徐潤福 선수는 1947년 4월19일 당당히 우승(2시간25분39초)했다.
徐潤福 선수의 우승 소식은 미국의 통신과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李承晩 박사는 仁村 선생에게 축하 전화까지 하였다.
나는 玄相允(현상윤) 총장에게 늦게나마 그간의 경위를 보고하고 徐선수의 고려大 편입을 간청했다. 그러나 玄총장은 『학교에는 엄연히 학칙이 있는데 자네 마음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네』라며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고려大 개교 이래 이렇게 고려大 선전을 세계적으로 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대들었다. 그리고 바로 仁村 선생을 찾아뵙고 통사정했다.
선생은 『그 동기가 애국애교의 충정에서 비롯되었고, 그 결과도 나라와 학교의 명예를 높였음은 좋지만 학교의 규칙을 어긴 점은 분명하다』고 꾸중을 하셨다. 결국 仁村 선생의 도움으로 徐선수는 소급입학을 할 수 있는 예외규정을 적용받아 고려大에 정식 입학할 수 있었다.

仁村은 大義로써 普成專門을 지켰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려대학교로 승격한 학교당국에서는 보성전문 전문부 출신학생들에 대한 편입 시험을 치르게 했다. 나는 학교 측에 동맹휴학 등 학원 소요를 일으킨 공산당을 물리치고 학원을 수호한 공로가 있는 학생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특별히 고려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玄相允 총장, 兪鎭午 학장을 찾아다니며 호소를 했다.
그러나 나의 뜻이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나는 동지들을 사주하여 비상수단으로 입학원서를 탈취해 開運寺에 모이도록 했다. 이 사건은 즉시 仁村 선생에게 보고되어 한민당 임원회의를 주재하던, 仁村 선생은 바로 달려오셔 『철승이 어디 갔어. 철승이를 찾아와. 철승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했겠는가』라고 하며 나를 찾았다.
나는 仁村 선생 앞에 불려갔다. 仁村 선생은 『자네는 지난날 학병 갈 때도 학교의 위기를 극복해 주었다. 해방된 오늘날 학교의 재건도 자네들의 헌신적인 공훈에 있었다는 것도 잘 안다. 자네 공훈도 가상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네가 학교를 망칠 작정이냐』라며 사정 반, 꾸중 반으로 말씀하였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으며 부인했다. 그렇지만 선생의 실색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겁도 나고 「안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후 나는 『나가서 알아보지요』라고 말하고 그 길로 개운사로 가 입학원서 뭉치를 되돌려 주도록 해 무사히 시험을 치르게 했다.
이 사건으로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으로 반탁학련에 힘쓰던 우리 동지들은 고려大 편입을 못 하게 됐다. 그들은 거의 다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의리로 학교를 그만두려했으나 全國學聯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과 학교전체의 입장을 살핀다는 생각으로 계속 학교에 남아 있기로 했다.
나는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일들을 상기하면서 어질고 온화하면서도 진솔 담담하며 다른 한편으로 大義를 중시하고, 늘 민족과 함께하려는 愛國愛族의 큰 자취를 남긴 불멸의 민족지도자 仁村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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