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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55회 작성일 2007-11-20 09:23
[한국일보] 4전5기 홍수환(60회)의 링은 교실이다 <7> - 3라운드 들어서며 전세 역전

본문

 

카라스키야 강펀치에 4번이나 링 바닥에… "포기할 순 없어"


[4전5기 홍수환의 링은 교실이다] <7>

3라운드 들어서며 전세 역전…그의 복부·턱에 회심의 한 방
세계복싱사 4전5기 신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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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다운된 뒤 역전 펀치를 날린 홍수환 선수가 링에 쓰러진 카라스카야 선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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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27일.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와의 1회전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오히려 속이 시원하고 편안해졌다. 최소한 내가 녀석을 눕힐 것인가 아니면 내가 맞고 나가떨어질 것인가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카라스키야가 어느 정도인지 주먹을 맞부딪쳐봤다. 상대가 비록 11전 11KO승으로 KO율 100%를 자랑하지만 별 것 아니란 생각을 했다. 한가지 걱정이라면 너무 푹신한 링 바닥이었다. 어쩌면 후반으로 가면 불리할지도 몰랐다.

나는 계속 움직이면서 간간이 연타를 적중시켰다. 카라스키야가 코피를 쏟았다. 1회전 종료 공이 울리고 나는 코너로 돌아왔다. “선생님, 저 자식 별거 아닌데요”라고 했더니 조순현 트레이너가 “수환아, 잘했어”라고 격려했다. 1라운드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공격 작전으로 효과를 톡톡히 본 나는 2라운드에서도 공격적으로 나섰다. 어차피 15라운드까지 갈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5라운드 이전에 승부를 낸다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꼭 한번만이라도 기역(ㄱ)자 방향으로 각을 이루는 레프트훅이 맞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펀치 중에서 레프트훅 만큼은 강하고 위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카라스키야의 레프트가 나왔다. 나는 라이트훅으로 크로스카운터를 날렸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곧 이어 카라스키야의 전광석화 같은 라이트 어퍼컷과 레프트훅을 얻어맞았다. 글러브에 뭔가 깔깔한 촉감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링 바닥이었다. 첫 번째 다운을 당한 것이다. ‘다운됐어. 하지만 침착하자. 이대로 쓰러질 순 없어. 침착하자’며 정신을 추스리고 일어섰다.

카라스키야는 더 강하게 나오며 레프트 어퍼컷과 더블훅을 날렸고 나는 두 번째 다운이 됐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더니 라이트 어퍼컷과 훅으로 나를 처박아버렸다. 세 번째 다운이다. 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다시 코너쪽을 바라봤다. 형이 보였다. 형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수환아, 제발 일어나지 마라. 그까짓 권투 안 하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발동했다.

예전 같으면 포기했겠지만 나는 일어났다. 그때부터는 침착이고 냉정이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경기를 끝내려는 카라스키야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라스키야를 코너로 밀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런데 카라스키야가 반 스텝 빠지며 또다시 공격을 해왔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네 번째 다운이다. 내 귀에는 레퍼리의 카운터 소리와 관중의 함성 소리가 클로즈업돼 들어오고 있었다. 레퍼리가 카운트8을 셀 때 나는 다시 일어났고 남은 30초 동안 묶여 있는 강아지처럼 쥐어터졌다. 잠시 후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구원의 공 소리가 들렸다.

조순현 트레이너는 “1회전만 더 뛰어. 마지막이야”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네 번 간 사람이 다섯 번은 못 가겠냐’고 결심했다. 어찌 됐든 하나님, 제발 레프트훅 한 방만 걸리게 해 주쇼라고 빌며 3회전에 나섰다.

레프트훅으로 보디를 가격하며 공격을 시도했지만 카라스키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자식이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보복 공격을 해왔다. 그 순간 나는 왼쪽으로 돌며 레프트잽을 날렸다. 카라스키야와 나는 자리를 바꾸며 한 바퀴 회전했고, 그는 재차 레프트를 던졌다.

순간 내가 날린 라이트크로스는 빗나갔지만 노리고 있던 레프트훅이 카라스키야의 관자놀이에 명중했다. 카라스키야의 두 다리가 허공에 뜬 느낌이었다. 찬스를 잡았다는 생각에 다시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들어갔지만 아쉽게 회심의 연타는 적중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짧은 라이트 어퍼컷으로 카라스키야의 턱을 들어올렸다. 동공이 풀린 카라스키야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동안 40여전의 시합 중에 내 주먹을 맞고 그렇게 눈동자가 풀린 상대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충격을 받은 카라스키야는 로프 주변으로 급격히 쏠렸다. 카라스키야는 무의식 중에도 펀치를 날렸지만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카라스키야의 목을 팔로 누르고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쳤다. 카라스키야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복부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이 한방의 펀치를 맞은 카라스키야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카라스키야가 로프 사이에 끼어 쓰러지려는 순간, 나는 그의 턱을 향해 피니시 블로를 날렸다. 속된 말로 ‘확인 사살’이랄까. 그는 일어나지 못했고 나는 승자가 됐다.

당시 시합을 앞두고 박병학 아나운서가 “카라스키야가 주먹이 강하면 턱이 약할 것이고, 너는 주먹이 약하다면 맷집은 강하지 않냐”면서 “기회는 있을 것이고 이길 수 있다”고 용기를 줬던 말이 생각났다.

세계 복싱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4전5기의 신화는 이렇게 쓰여졌다. 74년 WBA 밴텀급에 이어 국내 복싱 사상 최초로 두 차례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일주일후면 그 4전5기 신화가 꼭 30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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