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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52회 작성일 2007-08-01 09:50
주간한국 기사-전주 류씨 종가기행(제1회 자랑스런 중앙인 류면희 독립유공자 내용 포함)

본문

[종가기행 55] 全州柳氏三山柳正源(전주 류씨 삼산 류정원)
10대 종손 류동철(柳東澈) 씨
독립운동 참여한 선조 13명… 지사의 家學잇는 젊은 종손
'三山 문화' 이끈 전통 유가의 법도와 내력에 해박

 

 
 
안동의 명문가 종손을 서울 중구 충무로3가 (주)풍산 빌딩 로비에서 만났다.

서글서글한 호남형의 청년 류동철(柳東澈, 1975년 생) 씨는 조선 후기 안동 삼산의 전주 류씨 현조(顯祖)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선생의 10대 종손이다. 수인사를 마친 뒤 그가 내민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기업 구호를 내세운 (주)풍산에 근무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이제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다른 성씨 취재 때 고색창연한 종가 사랑채에서 소반에 차려진 다과상을 마주하고 한복을 갖추어 입은 종손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단정하게 와이셔츠를 입은 종손을 회사 1층 로비의 커피숍에서 만났다.

신세대 젊은이로 알고 대화를 나누던 중 후사(後嗣, 뒤를 이음), 종제(從弟, 사촌동생), 자괴감(自愧感, 스스로 부끄러운 느낌) 등 고급 한자어와 선대 인물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호를 앞에다 내세우고 있어서 놀랐다.

30대 중반의 젊은 직장인에게 듣기 어려운 ‘언어의 격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그의 명함을 보았다. ‘한자’로 이름과 직책이 표기되어 있었다.

종택 전경(화재전)

 

필자는 지금까지 종손의 생부를 종손으로 착각했다. 류종환(1944년생) 씨는 (사)박약회 창립 멤버로 필자와 오랫동안 간사 역할을 맡아 봉사해 단순히 알고 지내는 정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크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종손이 아닙니다. 선친이 종손이고, 제 자식 놈이 종손이지요.” 종손은 맏아들로 내려온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경우인가? 선친인 류기태(柳基泰, 1902년생, 호 曙崗) 씨는 한학자로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던 우국지사였다. 선친은 재종조부였던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의 학문과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류종환 씨의 형님이 있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종통이 둘째 아들인 류종환 씨의 맏아들 동철 씨로 이어졌다.

종손 동철 씨는 종통 계승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첨당에서 오신 제 5대 조모께서 후사가 없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조부께서는 경주 양동의 무첨당 종가 피를 받아 종통을 잇고 싶은 생각이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마침 큰아버지께서 그렇게 되시자, 제 외가가 무첨당이라서 자연스럽게 저로 후사를 잇게 할 생각이셨다고 해요. 이 이야기는 어렸을 때 외조부께 들었어요.”

무첨당은 경주 양동의 명문가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다. 예전 어른들은 벼슬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공부나 혼인에 대한 욕심은 대단했다고 알았는데, 그 실제 사례를 들은 것이다. 이는 아마도 가문의 전통을 잘 계승하기 위한 심사원려(深思遠慮)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종손의 생부 류종환 씨는 대구 능인고등학교에 37년간 봉직한 교육자며 교장으로 퇴임했다. 처가는 경주 양동 무첨당 종가며 외가는 존재 이휘일 종가인데, 존재는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의 아들이며 갈암 이현일의 형이다.

생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가문의 내력이나 전통 유가의 법도와 다른 문중의 내력에 대해 매우 해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전공이 역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물었다.

“저는 교육학을 전공했어요. 안동에는 유가의 내력에 대해 참 많이 아는 분들이 계셨어요. 우리 집안에는 류동희 전교(향교의 책임자)가 지금도 계시고, 돌아가신 의성 김씨의 김시박 어른, 돌아가신 류탁일 교수 같은 분은 정말 많이 아신 분이셨어요. 이제는 별로 물어서 깨칠 어른들도 거의 계시지 않습니다.”

 

종택 전경(화재후)

 

교장 선생님의 회고를 통해 가학(家學)의 전수(傳授) 경로나 방법을 엿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문중의 원로분과 지역사회의 어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러한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문중을 벗어난 지역사회의 경우도 별개의 사회가 아니라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학맥(學脈)과 혼인(婚脈)을 통해 종횡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완전한 남인 것 같은데, 결국은 이러저러하게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장 선생께 집안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저희 집은 다른 사람들이 그래요. ‘안동 삼산의 류씨들은 독립운동하다 버렸다’고요. 저희 집안에서 근세에 독립운동을 하신 어른이 13분이나 됩니다.

그 중에도 증조부이신 만산 류창식(1858-1912, 의병활동), 종증조부이신 동산 류인식(1865-1928, 협동학교 설립, 신민회, 신간회 활동, 민립대학 설립 주도), 그리고 동산의 부친인 서파 류필영(1841-1924, 대표적 한학자, 파리장서 서명, 항일 운동), 단주 류림(1894-1961, 임시정부 국무위원, 아나키스트, 정치가), 류면희(1906-1944, 중앙고보 학생으로 6ㆍ10만세 운동에 가담) 등 많은 분들이 독립유공자로 포장되었어요.”

10대 종손 류동철 씨

한집에 한분도 나기 어려운 독립유공자가 이 집안에서는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온전하게 살림을 유지할 수도 자손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킬 여건도 모두 마련되지 못했다. 자신보다 국가와 이웃을 더 사랑한 사람들의 희생이었다.

여러 번 삼산 마을을 답사하면서 항상, 어떻게 이렇게 물과 산으로 막힌 오지에서 그 같은 유명한 학자가 나고 배운 바를 실천한 지사(志士)들이 배출되었나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그분들의 주된 관심사는 세속적인 현달이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고, 조상과 선생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들은 남 탓 하지 않고 늘 배운바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만히 실천했다.

“저는 우리 집이 독립운동하다 이렇게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고 하니, 이제 그 정신을 우리 사회에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칭 ‘삼산리 광복기념비’를 세울 생각입니다.”

교장 선생님의 걱정은 한 둘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2006년 여름에 삼산 종가 사랑채가 전소(全燒)되었다.

부친이 세상을 버린 뒤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느라 비워두었던 종가에 원인 모를 불이 난 것이다. 다행한 것은 사랑채만 불탔다는 정도다. 이제 그 재건이 현안이다.

이 집은 개인 종가이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의 성지기도 하다. 그래서 그 재건은 우리 민간과 정부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 집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원상 복원의 문제는 현재 제반 여건상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 기약할 수 없다.

교장 선생님은 근자에 이 일을 풀어보려고 경향 각처로 출입하며 당국자를 만나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 문제를 종손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자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생긴 불상사라고 생각합니다. 망극한 일입니다, 속도 상하고요. 고조부 이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한 상처가 남은 집인데, 이제라도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 당장은 아니라도 몇 대 쌓아 가면 예전의 삼산(三山) 문화(文華)를 다시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큰집 주인다운 포부요 발상이다.

종손은 고등학교 동창생인 항일독립투사요 애국시인인 이육사의 맏손자인 이승엽(안동 박실의 전주 류씨로 출입, LG근무) 씨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다.

이 두 사람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전통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는데, 이는 아주 특별한 모습일 것 같다. 종손은 대구의 오성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대(94학번)를 나온 뒤 지난 2001년에 풍산에 입사했고 아직 미혼이다. 현재 서울에서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아우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 류정원 1702년(숙종28)-1761년(영조37) 본관은 전주.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목민심서에 8곳 등재된 주역 연구의 대가

삼산(三山)은 어떤 분인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영남 인물을 소개할 때마다 생기는 고민이다. 영남 출신 인물들은 가문의 전통 계승을 아주 잘 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현달한 서울 양반에 비해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고위 관직에 이르지 못해 역사서에 그 이름이 크게 오르지 못했다. 둘째, 두드러진 공을 세우지 못했다.

어렵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갔다 하더라도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영남 인물들은 어떤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를 이어 후세의 존경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삼산정 현판

 

답은, 선비 정신을 실천했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후진을 양성한 선생님이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벼슬보다는 학문과 덕망에 보다 후한 점수를 주었다. 부귀영화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인 경우 남긴 저술로 평가 받는다. 그렇지만 많은 저술을 남겨야만 보다 많은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한훤당 김굉필, 남명 조식이나 퇴계 문도 가운데의 후조당 김부필과 같은 경우 남긴 저술은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도학이요 절의며 선비정신이었다.

다행한 것은 삼산의 경우 영남 인물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쉽게 설명할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이 분은 다산 정약용의 대표적 저술인 목민심서(牧民心書)에 11곳이나 본받아야 할 목민관(牧民官)의 사례로 올라 있고, 둘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장 호기심이 자극되어 눈과 귀가 열린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절용(節用), 공납(貢納), 유애(遺愛), 전정조(田政條) 등에서 삼산의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소개했다. 삼산은 여러 번에 걸쳐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그런데 항상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말에 올라 채찍 하나만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고을에 남아 있던 자제들이 뒤미처 헌 장롱 한 틀을 집으로 부쳐왔다. 마을 주민들이 그 속에 좋은 비단이 들어있을까 싶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지 짚만 가득 들어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돌아갔다. 이는 자제들이 농을 보내면서 비어 있으면 부서질까 염려해 속을 일부러 채웠기 때문이다. 다산은 삼산이 통천군수를 지내다 부교리 직을 받고 돌아갈 때 고을 주민들은 은혜에 감사하며 차마 보내지 못했고, 뒤에 동(銅)으로 유애비(遺愛碑)를 주조해 기념했다는 사적도 적고 있다.

삼산은 대신들이 경학(經學)이 있다고 추천해 경연에 입시했고, 국왕인 영조의 인정으로 사도세자의 선생님이 된다. 이때의 정황은 ‘서연강의(書筵講義)’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53세의 완숙한 학자와 20세의 세자가 경전 구절을 풀이하며 이끌고 따랐던 장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은 주역(周易)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물로 역해참고(易解參攷)를 남겼다.

이는 주역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 책이다. 14살에 처음으로 접한 주역은 그의 일생동안 주된 연구의 대상이었다. 30년 뒤인 44살 때 마침내 방대한 역해참고(18권 10책)와 하락지요(河洛指要, 8권 4책)가 동시에 완성된다.

사후 이 책은 후학들의 검토를 거쳐 함께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들 책자가 자신의 문집(8권 4책)보다 12년 먼저 간행된 것은 그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왜 역해참고를 저술했을까? 삼산은 세상에서 주역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역의 글에만 몰입하면 지리멸렬해 산만함에 빠지고, 세부적인 괘(卦)만 주목하면 음양술수(陰陽術數)의 말단에 빠지기 쉽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한(漢), 진(晉), 원(元), 명(明)으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선배 학자들의 학설을 상호 참작하고 자신의 견해도 더해 책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학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삼산은 주역 학자로서의 면모 때문인지 시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문집에 올라 있는 시는 47편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많은 상소문(19편)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그의 상당한 역할을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조선왕조실록 등 국사에는 자세하게 등재되어 있지 못하다. 그의 저술 가운데, 조령(문경재재)의 산성(山城) 설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그의 경세가(經世家)로서의 면모를 알게 해준다.

삼산은 글씨에도 조예가 있었던 이다. 안동시 풍산읍 장터에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남아 있다. 정자 이름은 체화정(棣華亭)이다. ‘산 앵두나무 체’ 자는 여러 형제를 상징하는 글자다.

그림 같은 정자에 게판 된 ‘체화정’ 현판을 보면 그 왼편 하단에 삼산주인(三山主人)이란 주인(朱印)도 함께 새겨져 있다. 분명 삼산 류정원의 작품이다. 삼산이 이 현판을 쓴 것은 이 정자 주인과 사돈의 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삼산이 문과에 급제한 것과 관련해 영남 지방에 내려오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있다. 영조는 즉위 후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영남 남인(南人) 인재들을 적극 발굴했다. 이 때 안동 지방에서 다섯 사람이 동시에 영조11년(1735) 문과에 급제한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영조는 이를 고대했고 현실로 나타나자 크게 기뻐했다. 나이순으로 보면, 제산 김성탁(을과 1인), 양파 류관현(병과 8인, 삼산의 再從叔), 학음 김경필(을과 6인), 삼산 류정원(을과 5인), 대산 이상정(병과 28인)이 그들이다. 제산(52세)과 대산(27세)은 무려 25세차를 보이고 있다. 당시 삼산은 34세였다.

국왕은 이들 중 대표자인 제산을 어전으로 불러 기뻐하며, “어제의 영남의 추천 받던 사람이/오늘엔 머리위에 어사화 새롭구려/어버이 위하려는 그대에겐 기쁜 일/ 내게는 문학하는 신하가 생겨서 좋아라”라는 시를 짓고 직접 써서 내렸다.

그러나 스승인 갈암 이현일을 신원(伸寃, 억울한 사정을 품)하려고 상소했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어 11년 뒤 황량한 바닷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의 기림을 받던 영남의 대표적 학자가 당파의 참담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정치적 환경 하에서 삼산은 벼슬에 즐겁게 나갈 수도 경륜을 펼 수도 없었다.

외직을 택해 목민관으로서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한 정도였다. ‘문예와 학식에 있어서 앞설 이가 없었다’는 삼산이 문과 급제 뒤 26년 뒤 대사간(정3품)에 이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삼산의 행장(行狀)은 고향 후배면서 퇴계학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은 영남 남인의 종장(宗匠)이었던 번암 채제공이, 묘지명은 대산의 대표적 제자인 입재 정종로가 각각 지었다. 이들 필자의 면면을 통해 당시 삼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교장 선생님은 “류탁일 교수께서 우리 삼산 할배는 뚜렷한 사승(師承, 선생님으로 모신 이) 관계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셨어요.

저도 살펴보니, 어려서 삼산께서 선친에게 배우다 20세에 족부(族父)인 용와(柳升鉉, 문과)에게 배운 정도예요. 그런데, 문하에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영남의 대표적 예설서인 상변통고 16책 편저자)이 났고 또 손자가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이지 않습니까?” 라고 맺었다.

강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가문의 학문 연원(淵源)이다. 학문에 있어서 완벽한 ‘자급자족’이 이루어진 셈이다.

종손은, 11대와 10대에 해당하는 시대에 재종숙질이 문과에 급제했고 참 목민관으로 추앙되어 함께 목민심서에 실렸으며, 또 고조부 대에는 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떨쳤던 가운의 융숭함을 다시 이루려는 꿈을 서울 하늘아래서 꾸고 있다. 종손의 포부가 불원간 실현되기를 필자도 희망한다.

다음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대계(大溪) 이주정(李周禎)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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